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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화. 또 다른 사람 (1) (81/197)

81화. 또 다른 사람 (1)2022.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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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이독스는 머뭇거리다 시카르의 눈치를 살피며 대답했다.

16549789592078.png“갑자기 악수를 하자고 하시니 당황스럽군요.”

시카르가 레이독스에게 악수를 청한 이유는 그의 기억을 보기 위해서라는 걸 난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레이독스가 악수를 피하고 있으니 시카르의 성격상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었다.

16549789592082.png“이상하군? 악수를 거부하는 건 예의가 아니란 걸 모르는 후작이 아닐 텐데?”

이런 상황을 예기치 못한 듯 레이독스의 얼굴엔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시카르는 그 틈을 노리고 들어가듯 사납게 몰아붙였다.

16549789592082.png“계속 이렇게 악수를 거부할 생각인 건가?”

레이독스는 대답하지 않았고, 두 사람은 한동안 침묵의 시선을 주고받았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시카르였다.

16549789592082.png“뭔가를 알고 있는 눈치 같군. 사실대로 실토하지 않으면 넌 오늘 이 공작저를 나갈 수 없을 것이다.”

한동안 버티고 서 있던 레이독스는 할 수 없다는 듯 입을 뗐지만, 그 말은 나를 소름 돋게 만들었다. 레이독스는 긴 한숨을 뱉으며 끼고 있던 머리띠를 빼서 내려놓으며 말했다.

16549789592078.png“제가 사실대로 말한다면, 제 기억에서 보이는 그녀를 살려주실 겁니까?”

분명히 레이독스는 ‘제 기억에서 보이는 그녀’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레이독스도 시카르가 기억을 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던 건가? 어떻게? 충격을 받은 나와는 달리 시카르는 이미 알아차렸다는 듯 보였다.

16549789592082.png“역시 그랬군. 내가 기억을 본다는 사실을 알게 됐군.”

16549789592078.png“약속해 주십시오. 그녀를 살려주시겠다고.”

16549789592082.png“대체 그녀는 누구를 말하는 거지?”

16549789592078.png“제가 들키지 말아야 할 것을 들켰군요. 공작님께서 제게 악수를 청하지 않으실 것이라 여겼는데, 제가 실수했습니다. 공작님의 눈치가 빠르다는 것을요. 그녀는 공작부인과 같이 검은 머리, 검은 눈동자를 하고 있습니다.”

나와 똑같은 눈동자라고?!

16549789592078.png“그녀를 살려주신다면 제 기억을 보게 해 드리겠습니다.”

16549789592082.png“네가 보여주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못 볼 거라고 생각하나?”

16549789592078.png“약속해 주시지 않으면 저도 쉽게 제 기억을 허락하지 않겠습니다.”

두 사람은 누군가 말리지 않으면 한참을 저렇게 대치하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두 사람을 중재시켰다.

16549789622258.png“공작님께서는 후작님이 지키고 싶어하시는 그분을 해치지 않으실 거예요. 그러니, 이만 경계를 풀도록 하세요.”

레이독스의 시선이 곧장 내게로 꽂혔다. 그는 내 말에 신뢰를 갖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시카르는 못마땅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16549789592082.png“부인. 그 여자가 어떤 여자인 줄 알고 그런 약속을 하는 겁니까?”

어떤 여자긴. 나처럼 얼떨결에 이곳으로 떨어진 사람이겠지. 시카르가 기억을 본다는 것도 알고 있는 것을 보면, 소설을 읽은 사람이 분명했다. 더군다나 레이독스의 측근이 된 것을 보면 우리가 적대감을 가질 만한 인물은 아닐 것이다.

16549789622258.png“제가 볼 때 그녀는 우리에게 해를 끼치진 않을 것 같아요. 그렇죠? 후작님?”

16549789592078.png“물론입니다. 공작부인.”

16549789622258.png“그럼, 이제 공작님이 기억을 볼 수 있게 해주세요.”

16549789592078.png“그러겠습니다.”

레이독스는 이제서야 악수를 청하듯 시카르에게 손을 내밀었다. 시카르는 곧장 그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 그는 손을 빤히 보다가 마지못한 듯 손목을 붙잡았다. 그리고 기억을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16549789592082.png“네 말대로 유라와 같은 종족으로 보이는 검은 눈동자의 여인이 또 있군. 너도 이제 다 알게 됐구나. 내 아내가 변방의 어느 나라가 아닌, 다른 차원에서 왔다는 것을.”

16549789592078.png“네. 그녀에게 그렇게 들었습니다. 동양인이라고 한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레이독스를 향해 빙긋 웃으며 말했다.

16549789622258.png“그런 말까지 했다면, 아무래도 내가 왔던 세계에서 온 사람일 확률이 매우 높겠군요. 너무 궁금한 게 많은데, 그녀를 만나볼 수 있을까요?”

레이독스는 시카르의 눈치를 살피다 다시 말했다.

16549789592078.png“그분께서는 블레이크 공작님을 매우 두려워하고 계셔서…… 먼저 물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말은 시카르의 신경을 긁었다.

16549789592082.png“감히 공작부인이 만남을 요청하는데 거절하겠다는 건가? 아무리 차원이 다른 곳에서 왔다고 해도 이곳에 온 이상은 이곳의 법을 따라야 하는 것이지! 내 아내의 부름에 냉큼 응하지 않으면 유카나다르와의 전쟁도 불사할 것이니 그리 알아라.”

아니. 무슨, 뭐 그런 걸로 전쟁을 불사한다고. 나는 시카르를 진정시키듯 그를 향해 이를 꽉 물고 말했다.

16549789622258.png“공작님. 저는 그런 일로 전쟁이 발발하길 원하지 않으니 그런 험한 말은 삼가하시죠.”

시카르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내 아내의 청을 거절하기만 해봐.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하듯 비소를 띄고 있었다.

16549789622258.png“그녀와 같은 동양인인 제가 있다고 말을 해도 두려워하던가요?”

16549789592078.png“네…….”

레이독스는 시카르의 눈치를 다시 살핀 후 또다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16549789592078.png“제가 괜찮다고 말씀을 드렸지만, 그분께서는 여전히 두려워하고 계십니다.”

16549789592082.png“그래서 내가 공작저를 비운 지난 3년 동안, 그 여인을 한 번도 이곳으로 데려오지 않은 건가?”

16549789622258.png“그녀를 알게 된 지 벌써 3년이나 되었다고요?”

16549789592078.png“그렇습니다.”

16549789622258.png“혹시, 제르미 님께서도 그 여자분에 대해 알고 계신가요?”

16549789592078.png“그 여자분을 만나게 된 것이 제르미 덕분이었습니다.”

그래서 3년 전에, 레이독스도 그렇고 제르미도 그렇고 나에게 고향이 어딘지 물어본 것이었구나. 그냥 호기심에 물어본 말이 아니었어.

16549789592082.png“오랫동안 숨기느라 애썼군.”

16549789592078.png“반드시 말해야 할 일은 아니었으니까요.”

레이독스의 개인사일 뿐이니 우리에게 반드시 알려줄 필요는 없었겠지.

16549789622258.png“후작님. 그럼, 그분에게 어린이집 교사로 일하던 진유라라는 여성이 한번 만나 뵙길 청한다고 전해주시겠어요?”

16549789592078.png“공작부인께서 어린이집 교사이셨군요. 정말 좋은 직업에 몸을 담고 계셨었군요. 저희 쌍둥이에게 자비로우실 수 있었던 게 그런 이유 때문이었군요. 루시는 공작부인께서 3년 전에 주신 숄을 아직도 애지중지하고 있지요. 앞으로도 공작부인을 더 존경하게 될 것 같습니다.”

16549789622258.png“좋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후작님.”

시카르는 괜히 자신이 더 뿌듯해졌는지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레이독스를 보면서도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말했다.

16549789592082.png“그녀는 이곳에 어떻게 오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아내는 어린아이를 구하다 이곳으로 오게 됐을 만큼 존경해도 좋은 사람이라 말할 수 있지.”

16549789592078.png“공작님께서 더 뿌듯해하시는 것 같군요. 그녀도 공작님의 이런 모습을 보게 된다면, 공작님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뿌듯한 기색을 보이던 시카르는 이내, 레이독스의 말에 심기가 거슬린 듯 인상을 썼다.

16549789592082.png“내가 두렵든 말든 공작부인의 부름에 반드시 응해야 할 것이다. 그녀에게 가서 전해라. 공작부인의 초대를 거절한다면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또, 협박이다. 또. 레이독스의 얼굴엔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는 점잖게 대답했다.

16549789592078.png“공작님의 뜻. 알겠습니다.”

그리고 레이독스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16549789592078.png“오늘은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어서 빨리 그녀에게 이 얘기를 전해줘야 할 것 같으니까요.”

16549789592082.png“그러는 게 좋겠지. 그동안 쌍둥이들에게도 감추느라 꽤 조심했던 것 같은데, 언제까지고 아이들을 속일 수는 없잖아?”

아. 쌍둥이들에게도 아직 말하지 않았구나.

16549789592078.png“쌍둥이들에게 말하지 않은 건 루시가 아직은 제게 여자친구가 있다는 걸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지 않아서였을 뿐입니다.”

16549789592082.png“이제 보니 감추고 속이는데 재주가 있군.”

나는 벌떡 일어나 시카르의 앞을 막으며 레이독스를 보냈다.

16549789622258.png“후작님. 이만 가보세요.”

16549789592078.png“감사합니다. 공작부인.”

레이독스가 가는 것을 보고 나서야 나는 진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니까 정말로 내가 살던 세계. 즉, 나와 같은 소설을 읽고 이곳으로 온 사람이 또 있다는 말이잖아? 나와 같은 차원에서 온 사람이 있다고 하니, 그녀의 정체에 대해 너무나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빨리 그녀를 만나게 되면 좋을 텐데. 시카르는 그런 내 마음을 훤히 보고 있다는 듯 무심한 듯 말했다.

16549789592082.png“이곳에 온 건 너보다는 늦은 것 같다. 그때, 레이독스와 악수를 나눌 때만 해도 그녀를 본 적 없었으니까. 제르미가 공작저에 온 첫날을 기억하나?”

눈이 매우 쏟아지던 날, 새로 변신해서 창가로 날아온 제르미의 모습이 기억이 났다.

16549789622258.png“물론 기억 나.”

16549789592082.png“그때부터였던 것 같군. 레이독스의 그녀가 이곳에 온 게 말이지. 대신전에서 제르미가 내가 옷 치수를 잴까 봐 기겁한 일도 기억하겠지?”

16549789622258.png“물론이야.”

16549789592082.png“그때 제르미가 염려한 것은 내 손이 제 몸에 닿는 것이었던 것 같군. 내가 기억을 읽는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그렇게 예민했던 거였구나.

16549789592082.png“그녀의 이름은 한서연, 나이는 올해로 25세. 그녀도 이곳의 소설을 읽은 사람인 것 같다. 하지만 그녀는 현명하게도 이곳이 소설이라는 것을 레이독스에게는 말하지 않았군. 다만, 그녀도 미래를 본다는 것과 이곳의 이야기들을 조금씩 전했고, 키안을 잘 돌봐야 한다고도 일러주었다. 레이독스가 그날 제르미와 함께 이곳을 찾은 이유가 모두 한서연 때문이었으니까.”

16549789622258.png“그럼 한서연 씨가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된 거잖아.”

16549789592082.png“하지만, 내가 두렵다는 이유로 너의 초대를 거부한다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16549789622258.png“응. 그건 염려하지 않아도 돼. 그녀는 거절하지 않을 거니까.”

시카르는 그걸 어떻게 아느냐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16549789592082.png“어떻게 장담하지?”

16549789622258.png“왜냐면 그녀는 망설였을 테니까?”

16549789592082.png“망설였다고?”

16549789622258.png“그녀도 레이독스에게서 내 얘기를 들었겠지?”

16549789592082.png“그래. 들었고 궁금하다고 했지만 나 때문에 볼 엄두는 내지 못했던 것 같더군. 그녀는 네가 나에게 협박받아서 감금이라도 당하고 있는 줄 알고 있으니까.”

16549789622258.png“그래. 그리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몰라서 더욱 조심스러웠을 거야. 그런데, 이제는 레이독스가 너에게 기억을 다 들켜버렸으니 오고 싶지 않아도 무조건 오게 될 거야. 그녀도 이 초대를 거부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을 테니까.”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시카르의 입꼬리가 포물선을 그렸다.

16549789592082.png“현명한 판단이라고 해 주지.”

16549789622258.png“그런데, 한 가지 의문인 게 있어.”

16549789592082.png“뭐가?”

16549789622258.png“그녀는 네가 기억을 읽는다는 것을 아는데, 왜 레이독스를 이곳에 보내고 우리의 왕래를 막지 않은 걸까.”

16549789592082.png“그건 키안 때문이지.”

16549789622258.png“그렇겠구나. 미처 그 생각을 못 했어.”

16549789592082.png“기억을 못 보면 그리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지.”

시카르는 내게 자신의 손을 잡으라는 듯 은근하게 내밀며 말했다.

16549789592082.png“또 궁금한 게 있으면 얼마든지 물어봐. 네가 내 기억을 읽어가듯 내가 다 말해줄 테니까.”

나는 시카르가 내게 내민 손을 물끄러미 보다가 외면했다.

16549789622258.png“됐어. 그녀를 만나게 되면 직접 물어보지 뭐.”

내가 너무 매몰차게 외면했나? 내게 내민 손을 거절당한 시카르는 시무룩한 눈으로 거절당한 제 손을 보고 있었다. 저러고 있으니 좀 귀엽기도 하고. 뭐래. 누가 귀엽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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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무룩한 얼굴을 하고 있던 시카르는 갑자기 무언가가 번뜩 생각이 난 듯 매서운 눈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16549789592082.png“그런데, 만약에.”

16549789622258.png“만약에?”

16549789592082.png“네가 있던 차원에서 온 사람 중 다른 누군가가 또 있다면? 그 사람이 키안이 아닌 길리언의 편이 되었다면, 키안의 정체가 모두 들통나겠군.”

16549789622258.png“뭐,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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