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또 다른 사람 (2)2022.03.14.
그런 일은 미처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나 외에도 다른 사람이 이곳에 왔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그런데 그런 누군가가 시카르의 말대로 길리언의 편이 된다면?! 그때는 모든 계획이 틀어지고 말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길리언 쪽에서 별다른 움직임이 없는 것을 보면 아직 그런 일이 일어난 것 같지 않으니 지레 겁먹지 마라. 내가 잘 알아보도록 할 테니까.”
나갔던 키안이 무슨 일이냐는 듯 어색한 얼굴로 들어왔다.
“어머니. 스승님께서 급한 일이 생겼다며 먼저 일찍 가셨던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나쁜 일은 아니고 볼 일이 생겨서 나가신 거야.”
“그런 거라면 다행이에요. 스승님이 석찬까지 안 드시고 그냥 가셔서 무슨 일이 있는 건지 걱정했거든요.”
내 기분 탓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말하는 키안이 은근히 시카르를 향해 눈을 흘긴 것 같았다. 그리고 시카르는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기도 했었다. 마치 시카르와 키안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듯 둘 사이에 미묘한 긴장감이 보였다. 아무래도 석찬이 끝난 후에 키안에게 아직도 시카르에게서 냉기가 보이는 건지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 석찬을 즐기는 중에는 키안과 시카르의 사이가 좋아 보였다. 둘 사이에 긴장감이 보인다고 착각한 건 내 기우였던가 싶을 만큼 말이다. 그래도 혹시나 모르니까 키안에게 물어보는 게 좋겠지. 식사 후 나는, 키안에게 넌지시 물었다.
“키안. 요즘도 공작님에게서 냉기가 느껴지니?”
대답 전에 키안이 한숨을 내쉬는 것을 보니 역시나 여전히 안 좋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아서 나는 조금 조마조마해졌다.
“솔직하게 말해줬으면 좋겠구나.”
“아직 공작님에게서 온기를 느끼고 있지는 않아요.”
그랬구나. 역시 그랬어. 그래서 아직 적대감을 보이고 있는 건가.
“그런데…….”
“그런데?”
“냉기도 느껴지지 않아요.”
“그럼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는 말이니?”
키안은 조금은 머쓱한 듯 제 볼을 긁적거렸다.
“아주 조금. 정말 아주 조금 미지근한 온기가 느껴지긴 해요.”
미지근한 온기라니! 그게 어디야! 시카르가 이만큼이나 키안에게 마음을 열었다니. 나는 그제야 마음이 툭 놓이는 기분이었다. 나는 내심 많이 놀랐지만,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키안을 향해 방긋 웃었다.
“너와 공작님의 사이가 정말 좋아진 것 같아서 나도 이제 마음이 푹 놓이는 것 같아.”
키안은 자신도 더없이 행복하다는 듯이 내 품을 파고 들어와 안겼다.
“어머니의 마음이 푹 놓인다니 저도 너무 행복해요.”
“그럼 우리 오랜만에 같이 잘까? 다 커서 엄마랑 자기 좀 그럴까?”
내가 어색해하는 표정을 짓자 키안은 결코 아니라는 듯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아, 아니요! 전혀요. 저 아직 다 안 컸어요. 어머니! 저도 오랜만에 어머니와 같이 잠들고 싶어요.”
지난 3년간 키안을 매일 재워줬지만, 키안이 10살이 된 올해부터는 더는 밤마다 키안을 재워주지 않았다. 이곳에서 10살이면 현대로 따지면 중학생이 되는 시기였다. 그래서 이제는 다 커서 싫어할 줄 알았는데 여전히 내 품을 좋아해 주는 키안이 내심 고맙고 기뻤다. 처음에 시카르와 키안의 사이를 좋게 해주려 할 때만 하더라도 일생을 타인에게 마음 한 번 주지 않은 시카르가 키안에게 마음을 잘 열 수 있을지 확신은 없었다. 최선을 다해보겠다고 생각만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드디어 냉기가 느껴지지 않는다고 하니, 이제야 정말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앞으로 시카르의 저주만 풀게 된다면, 여기서 내 목표는 완전히 이루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키안과 시카르 모두가 더욱더 잘 지낼 수 있기를. 그리고 다음에는 온기가 아닌 열기가 활활 느껴질 수 있게 둘 사이가 더 돈독해지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 시카르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매만지며 자신의 서재 소파에 앉아 있었다. 아직도 토끼 머리띠를 머리에 착용하고 있는 듀리온은 볼을 긁적이며 눈치를 보듯 시카르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비카는 피곤하다는 얼굴로 하품을 하다가 듀리온의 머리에 달린 토끼 머리띠를 보며 말했다.
“넌 그걸 왜 아직도 차고 있어?”
듀리온은 머쓱하게 웃으며 제 머리띠에 달린 토끼 귀를 만지작거렸다.
“도련님이 그러는데 이걸 쓰고 있으니까 내가 귀엽대. 그리고 쌍둥이 소후작님들께서는 내 인상이 좋아 보인대.”
비카는 한심하다는 듯 입을 벌렸다.
“그래서 넌, 그 말 듣고 기분 좋냐?”
“당연하지. 사람은 모름지기 칭찬에 약한 법이니까.”
그리고 나서 헤- 하고 웃는 듀리온을 보며 비카는 혀를 찼다.
“애들한테 귀엽다는 소리 듣고 좋댄다. 아주.”
듀리온은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두 손으로 자신의 볼을 잡았다.
“응. 좋아.”
비카는 역겨워서 더는 못 보겠다는 듯 입술을 비죽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진짜 못 봐주겠네.”
그때, 시카르가 침묵을 깨고 고개를 들었다.
“비카.”
낮게 깔린 중저음의 목소리가 공기마저 울리며 파장을 일으키는 것만 같았다.
“말해.”
“비카 네가 유라처럼 검은 눈동자를 가진 사람이 또 있는지 알아보도록 해라. 그리고 듀리온은 계속해서 베로니아를 찾아보도록 하고.”
“알겠습니다. 공작님.”
아무 질문도 없이 그저 명령에만 따르는 듀리온과는 달리 비카는 궁금해서 못 견디겠다는 얼굴로 시카르의 얼굴을 살폈다.
“뭘 시킬 땐 무슨 일인지 납득을 먼저 시키고 나서 부려 먹어. 뭐야. 무슨 일이야.”
“사실, 유라는 다른 차원에서 온 사람이다.”
듀리온과 비카는 얼떨떨한 눈으로 서로를 한번 쳐다보았다가 다시 시카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다른 차원?”
“그래. 자세한 얘기는 집어치우고 간략하게 말하자면, 그곳의 사람들은 미래를 본다.”
시카르는 두 사람에게 이곳이 소설 속이라는 말을 하고 싶지가 않았다. 타인에게 제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시카르였기에 유라에게 내색하지 않았을 뿐. 처음 이곳이 소설 속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받은 충격이 꽤 컸었다. 부모를 모두 잃었을 때, 시카르는 생각했었다. 세상을 구성하는 많은 사람 중에서 누군가는 행복하고, 누군가는 불행해야 한다면. 왜 하필 그 불행을 떠안게 된 사람이 자신인지. 그저 모든 것이 원망스럽기만 했었다. 폐왕이 자신의 부모를 짓밟고 행복을 찾았듯이, 행복해지기 위해서 반드시 누군가를 짓밟아야 한다면, 그는 이제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무엇이든 짓밟을 생각이었다. 다시는 불행의 과녁이 되기는 싫었다. 그런데 유라의 기억 속에서 본 그의 삶은, 온전한 불행 속에서 살다가는 삶이었다. 이 수많은 사람 중에. 누군가는 반드시 불행한 삶을 살다 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 대상이 온전히 자신이란 말이었다. 그것을 좋은 마음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시카르는 그것만은 철저히 비밀로 하고 싶었다. 시카르는 다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유라가 본 미래에서 우리는 모두 죽었다.”
듀리온은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듯 두 눈을 깜빡거렸다.
“우리가 죽었다고요? 왜…….?”
“우리는 모두 길리언 때문에 죽음을 면치 못했지.”
“그럼 국왕께서 우리를 배신한단 말씀입니까?”
물론, 배신은 아니고 이용이었지만. 그렇다고 키안에게 죽임을 당한다고는 말할 수가 없으니 시카르는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비카와 듀리온은 그제야 시카르의 말을 이해했다. 하지만 비카는 이제서야 이런 말을 하는 게 조금은 못마땅했다.
“그 말을 왜 이제야 하는 거지?”
“그건, 그때 가서 말해도 늦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그때가 지금이니까.”
“마님께서 다른 차원에서 왔다면, 키안 도련님도 다른 차원에서 온 건가?”
키안의 얘기마저 나오자 시카르는 오늘 해야 할 얘기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깨닫고 극심한 피로를 느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키안은. 레카도르의 핏줄이다.”
잠자코 듣고 있던 듀리온은 뒤통수라도 한 대 맞은 듯 얼얼했다. 비카만은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는 듯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성 마법이라곤 배운 적도 없는 도련님이 가끔 신성 마법을 쓰는 걸 보며 이상하다고 느끼긴 했지.”
듀리온은 제 머리를 긁적거렸다.
“어. 나도 도련님께서 신성 마법을 쓰시는 걸 몇 번 봤는데…… 난 왜 이상하다고 생각을 못 했지?”
“너는 멍청하니까.”
“내가 멍청하면 비카 너는 촉새다.”
“하지만, 넌 촉새보다 멍청하지.”
“내가 그런 건 둔감할지 몰라도 검술로는 재빠르지. 한번 겨뤄볼래?”
“머리가 딸리니 또 힘을 쓰려고 하는군.”
시카르는 날을 세우고 있는 두 사람을 향해 팔을 뻗으며 말했다.
“두 사람, 싸우는 건 좋은데 이 대화가 끝난 후 나가서 싸우도록 하지.”
두 사람이 툴툴거리고 있긴 했지만, 더는 싸움을 이어나가진 않았다. 그래서 시카르는 하던 얘기를 계속해 나갔다.
“그래서 그전에 반드시 베로니아 공주를 찾아야 한다. 키안이 베로니아의 아들이라는 것을 길리언이 눈치채기라도 한다면, 공주를 볼모로 잡고 우리를 구워삶으려 할 테니까.”
듀리온은 이번에도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코를 긁적거렸다.
“그런데 공작님. 그러면 그런 위험을 무릎 쓰시고 도련님을 입양한 이유가 있으신 겁니까?”
“그래. 그건 나도 궁금했어. 대체 키안 도련님은 왜 입양을 한 거야? 도련님이 아니었다면, 바로 길러언을 쳐도 우리에게 승산이 있잖아? 되레 도련님 때문에 베로니아 공주님을 지켜야 해서 일이 더 힘들어진 거 같은데?”
“키안은 내 저주를 풀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니까.”
그 말은 단 한 번에 비카와 듀리온을 설득시켰다. 두 사람은 그 이유가 완전히 와 닿는다는 듯 입을 벌렸다.
“납득이 되네.”
“그러니 반드시 키안도 지켜야 하고, 베로니아 공주도 지켜야 한다.”
“그래. 도련님의 친모니까 지켜야겠지.”
듀리온은 손에 힘을 꽉 쥐고 결연한 얼굴로 말했다.
“지금까지는 공작님의 명이라 맹목적으로 베로니아 공주님을 찾아다녔지만, 앞으로는 도련님을 위해서…… 아니, 장차 이 나라의 왕이 되실 키안 국왕 전하를 위해서 반드시 공주님을 찾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생각해준다면 더욱 든든할 것 같다. 듀리온.”
“일전에 공작님께서 몽타주를 만들어 주신 덕분에 더 찾기가 용이해졌으니, 믿고 맡겨만 주십시오.”
시카르가 어떻게 하겠냐는 듯 비카를 쳐다보았다. 그녀도 탐탁지는 않지만, 알겠다는 듯 고개를 눈을 길게 한 번 깜빡였다.
“네가 저주를 풀고 나면 우리의 맹약도 깨줄 테니, 마님을 닮은 검은 눈동자의 인간이 또 있는지 내가 잘 찾아봐 주지, 뭐.”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는 잘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모두 잘 부탁한다.”
“부탁? 지금 부탁이라고 했어? 공작?”
늘 명령만 내릴 줄 알지 시카르가 부탁한다고 말한 것은 처음이었기에 비카와 듀리온은 놀란 눈으로 시카르를 쳐다보았다.
“지금 부탁이라고 하셨습니까? 공작님?”
시카르는 이들이 왜 이렇게 놀라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래. 부탁이라고 했다. 뭐가 문제 있나?”
“아. 아니요. 그냥 듣기 좋아서 물어본 것뿐입니다. 그럼 이만 저희는 나가보겠습니다.”
듀리온은 왜 그런 안 하던 말을 다 쓰냐고 비카가 공작에게 물을까 봐 얼른 인사를 하며 비카를 잡고 끄집고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