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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화. 또 다른 사람 (3) (83/197)

83화. 또 다른 사람 (3)2022.03.17.

무덤덤하게 말을 하긴 했지만, 정말 검은 머리의 누군가가 길리언에게 소설 속 얘기를 했다면 큰일이 날 터였다. 시카르는 속이 타는 것을 느끼며 유라를 보기 위해 그녀의 방을 찾았지만 유라는 없었다.

165497901121.jpg“마님께서는 오늘 도련님의 방에서 주무신다고 하셨습니다.”

16549790112105.png“키안이 몇 살인데 다 큰 아들과 함께 잔다는 거지?”

안드레아는 자신이 다 기분이 좋다는 듯 포근한 얼굴로 웃었다.

165497901121.jpg“키안 도련님께서는 자주 외로워 보이시는데, 마님과 함께 계실 때만큼은 누구보다도 행복해 보이시니 오늘은 그냥 두 분이 함께 잠자리에 들게 놔두시는 게 어떨까 합니다. 공작님.”

16549790112105.png“안드레아가 그렇게까지 얘기한다면 그래야겠지.”

165497901121.jpg“잘 생각하셨어요. 공작님.”

안드레아는 푸근하게 웃으며 발길을 돌렸다. 시카르는 제 방으로 돌아갈까 하다가 둘이서 뭘 하는지 보기 위해 키안의 방문을 조심히 열어 살폈다. 서로를 꼭 끌어안고 잠들어 있는 키안과 유라를 보자 그는 지금까지 겪지 못했던 감정이 치솟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가슴 한쪽을 벽난로에 쬐고 있는 듯 어딘가 따뜻해지는 묘한 감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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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레이독스가 공작저를 찾은 것은 그로부터 며칠 뒤였다. 그는 이번엔 쌍둥이가 아닌, 나와 같은 동양인의 검은 눈동자를 지닌 여인과 함께였다. 그전만 해도 정말 그녀가 나와 같은 차원에서 왔을까 하는 의심도 들었지만, 실제로 내 눈으로 보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어깨까지 내려오는 약간 웨이브가 들어간 머리를 하고 이곳의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아마, 그녀도 이곳에서 생활을 하다 보니 이곳 옷을 입고 다닐 수밖에 없었지 않았을까 한다. 그녀는 정말 나와 같은 동양인이었다. 나는 그녀를 보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고, 그것은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16549790112129.png“세상에!”

16549790112133.png“세상에!”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껑충껑충 뛰고 싶은 것을 애써 참으며 주변을 물렸다.

16549790112129.png“전 이분과 단둘이 얘기 좀 나누고 싶으니, 두 분께서는 자리 좀 비켜주시겠어요?”

16549790112105.png“하지만, 초면엔 악수를 나누는 게 예의겠지.”

아무래도 시카르가 그녀의 기억을 읽고 싶어 하는 게 훤히 보였다. 그래서 나는 시카르를 밖으로 내몰다시피 밀어냈다.

16549790112129.png“나가요. 어서 어서.”

그렇게 두 남자를 쫓아내고 나서야 나는 평온하게 미소 지을 수 있었다.

16549790112129.png“앉으세요. 한서연 씨.”

한서연은 자기 이름을 어떻게 알았냐는 듯 보다가, 이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16549790112133.png“아. 시카르 님께…… 아니, 아니. 공작님께 제 이름을 들으셨군요.”

16549790112129.png“네. 맞아요. 너무 반가워요. 서연 씨. 참, 서연 씨라고 불러도 되죠?”

16549790112133.png“당연하죠. 얼마든지 편한 대로 부르세요.”

16549790112129.png“제 이름은 유라예요. 진유라요.”

16549790112133.png“네. 들었어요. 이렇게 초대해주셔서 감사드려요. 공작부인.”

나는 그녀가 날 부르는 호칭에 손사래를 쳤다.

16549790112129.png“아, 아니에요. 공작부인이라뇨. 그냥 유라 씨라고 불러주세요. 저도 편하게 서연 씨라고 부를게요.”

서연은 자신은 절대 그렇게 부를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부르르 떨었다.

16549790112133.png“어떻게 그래요. 그랬다가 공작님께 들키는 날에는, 아휴. 저도 이 소설의 원작을 봤거든요. 그래서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잘 알고 있었어요.”

서연은 정말 너무 걱정된다는 얼굴로 누가 엿듣기라도 할 듯 밖을 살피며 말했다.

16549790112133.png“공작부인께서는 어떠세요? 좀 지낼 만하세요? 혹시 협박을 받고 잡혀 계신다거나 그런 건 아니에요?”

물론 처음엔 그랬지. 그래서인지 그녀가 그렇게 생각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나 또한 처음에는 너무 무섭기만 했으니까. 그때의 생각이 나서 그런지 웃음이 나와서 나는 오랜만에 박장대소를 하듯 손뼉을 치며 웃었다.

16549790112129.png“하하. 맞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던 때가 있었죠. 그래서 서연 씨가 충분히 그렇게 오해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서연은 도저히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16549790112133.png“네? 오해라고요?”

16549790112129.png“겪어보시면 알게 되실 테지만, 시카르는 생각만큼 그렇게 무서운 사람은 아니에요. 그리고 지금까지 제게 하신 말들을 시카르가 다 보게 될 거예요.”

그녀는 그제서야 자신이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닫고 입을 쩍 벌렸다. 그리고 또 한 번 더 입을 벌렸다. 그 표정을 보아하니, 시카르가 기억을 모두 보기 때문에 내가 말을 조심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16549790112129.png‘아 정말 그런 게 아닌데.’

16549790112129.png“서연 씨는 사람이 사람에 의해 변할 수 있다는 걸 믿으세요?”

서연은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16549790112133.png“사람은 사람에게 많은 영향을 받으니까요.”

16549790112129.png“제가 알기론 시카르도 많이 변했어요.”

서연은 화들짝 놀라서 문밖에 있는 사람들의 눈치라도 보듯 말했다.

16549790112133.png“저런, 그렇게 공작님 성함을 막 부르셔도 괜찮아요?”

16549790112129.png“네. 정말 괜찮아요. 사실 저희는 둘이 있을 땐 서로의 이름을 부르거든요. 제 기억을 다 보고 있으니 의외로 편한 구석도 있었어요. 제가 사는 곳의 문화를 아니까 저를 이해해주는 부분들이 은근히 많거든요.”

서연은 도저히 이 상황이 적응이 안 된다는 듯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말했다.

16549790112133.png“정말 이상해요. 전 정말 공작부인께서 포로처럼 잡혀서 꼼짝없이 감금당하고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지금 공작부인의 표정이 너무…… 정말 너무 편안해 보이셔서 사실 많이 놀랐어요.”

그거야 정말 편하니까.

16549790112129.png“네. 정말 편해요. 시카르는 서연 씨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편한 사람이기도 하고요.”

아, 정말 이렇게 시카르를 칭찬해주는 말을 하기는 싫었는데. 내 기억을 보고 나면 또 자기가 그렇게 편하냐는 둥 말하며, 좋아할 걸 생각하니 괜히 심통이 났다. 예의상 한 말이라고 해도 믿어주지도 않을 것 같으니까.

16549790112133.png“듣기로는 공작님이 애처가에 로맨티스트라는 소문이 자자하더군요, 그래도 저는 믿을 수가 없었죠. 워낙 무서운 분이시니, 겉으로만 그러신 건지 알 수가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지금 공작부인을 보니 그 로맨티스트 정도는 아니어도 공작님께서 조금은 자애로운 분이 아니실까 하는 생각이 드는 군요.”

나도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물론 아직도 갈 길이 멀긴 하지만, 그래도 시카르는 꽤 많이 변했다고 생각한다.

16549790112129.png“저라도 그렇게 생각했을 거 같아요.”

16549790112133.png“이해해 주시니 감사드려요.”

16549790112129.png“이제 그럼 우리 서연 씨의 이야기 좀 할까요?”

16549790112133.png“제 이야기요?”

16549790112129.png“네. 전, 정말 서연 씨에 대해 궁금해요.”

16549790112133.png“저도 공작부인에 대해 궁금하지만, 저에 대해 모르는 것이 더 많으실 테니 제가 먼저 말하는 게 순서겠죠?”

16549790112129.png“그렇게 해 주신다면 전 너무 고맙죠. 서연 씨.”

서연은 활짝 웃으며 제 얘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서연은 이게 갓 간호 실습을 나가기 시작한 간호대생이었다고 했다. 대학 병원에서 실습을 하는 동안 간호사들과 똑같은 교대 근무를 하였는데, 거의 하루 종일 서 있다 보니 다리에 부종이 차는 건 기본이라고 하였다. 실습을 하면서도 서연은 생계 때문에 알바를 병행했는데, 알바도 편의점 알바 일이다 보니 꼬박 매일 16시간 이상을 서서 하는 일들만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매일을 전쟁처럼 보내던 어느 날, 과로로 쓰러졌는데 눈을 떠보니 이곳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이 소설은 병원에 입원해 있던 환자가 두고 간 소설이었고, 틈틈이 쉬는 시간마다 즐겨 읽게 된 소설이었다고 했다.

16549790112133.png“그땐 정말 너무 힘들었거든요. 몸도 몸이지만 심적으로도 너무 힘든 때여서 이 소설이 큰 힘이 됐죠. 이 소설 속 주인공이 온갖 시련을 다 겪다가 결국엔 왕좌를 차지하는 게 매우 인상적이었어요. 저도 힘들 때마다 나도 언젠간 나만의 왕좌를 찾겠다는 마음으로 일을 할 수 있었거든요. 정말, 그때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3개월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뒹굴어 보자, 는 게 제 꿈이자 목표일 정도였으니. 제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상상이 되시나요?”

16549790112129.png“정말 힘들었을 거 같아요. 저도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매일이 힘들었거든요. 여기 와서 요즘에야 느끼는 건데, 사람들은 다 자기만의 고초를 이겨내야 진정한 행복을 찾는 건 아닐까 생각하게 됐어요.”

내 말을 들은 서연은 환하게 웃었다.

16549790112133.png“정말 좋은 말씀이군요.”

16549790112129.png“서연 씨는 여기 와서는 어떻게 지내셨어요?”

16549790112133.png“여기 와서는…….”

서연은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 설마 자신이 소설 속 세계에 떨어졌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는 이곳이 유럽 어딘가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데 제르미를 만나고는 이곳이 소설 속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처음 서연을 본 제르미의 첫마디는 이것이었다.

16549790225518.png“혹시 공작부인이십니까?”

16549790112133.png“공작부인이요?”

16549790225518.png“시카르 블레이크 공작님의 아내 되시는 공작부인이 맞으신가 해서 여쭈는 겁니다.”

그때 시카르의 이름을 들은 서연은 이곳이 그 소설 속이 맞다는 걸 확신할 수가 있었다. 그런 무서운 공작이 있는 곳에 떨어진 데다 몸만 달랑 떨어진 것이기에 오갈 데가 없던 서연은 자신에게 말을 붙인 상대에게 물었다.

16549790112133.png“그러는 그쪽은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데요?”

16549790225518.png“저는 제르미 아이커라고 합니다, 공작부인. 부인께서는 왜 제게 신분을 속이려 하시는 거죠?”

제르미? 제르미라면, 레이독스의 친구이자 마법사를 말하는 거잖아! 제르미는 의리가 있고 사람을 함부로 해치지 않으며 유별나지만 만인을 존중할 줄 아는 천성이 착한 마법사였다. 서연은 제르미를 만난 게 너무나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은 나를 버리지 않았어!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다른 차원에서 왔고 미래를 볼 줄 안다고 예언했다고 한다. 음…… 그건 나와 방식이 비슷하군. 역시 살아야 하는데 그 정도 거짓말이야 아무것도 아니지, 나는 매우 잘했다는 듯 손뼉을 쳐주었다.

16549790112129.png“맞아요. 여기선 생존력이 필요해요. 잘하신 일이라고 생각해요.”

16549790112133.png“그런데 제르미 님께서는 바쁘셔서 저를 돌볼 수 없다며 후작께 저를 맡기셨죠. 처음에 후작님께서는 제게 머물 곳을 마련해 주신다고 하셨지만, 제가 이곳을 잘 모르는 데다 혼자서는 살아갈 수가 없을 것 같아서 조용히 숨어 살도록 창고 방이라도 내어 달라 청하였는데, 후작님께서는 저를 별택에서 살 수 있게 해주셨어요. 다행히 그 별택은 게스트 용이었구요. 그래서 쌍둥이들도 출입하지 않는 곳이었죠.”

음. 그래서 눈이 맞은 거군. 역시 서연의 볼이 살짝 붉어지는 것을 보니 다음 대목에서는 둘의 러브스토리가 나오는 게 분명한 듯했다. 서연은 제 볼이 매우 뜨거워서 제 손으로 식혀보겠다는 듯 제 볼을 손등으로 꾹꾹 누르며 말했다.

16549790112133.png“그리고 그 뒤로 후작님과 자주 만나다 보니 어느새…… 연인 사이가 되었더군요.”

으응. 이건 아니지. 난 좀 더 자세하게 듣고 싶단 말이다. 나는 서연을 향해 밝게 미소를 지어주었다.

16549790112129.png“서연 씨. 그 러브스토리 말인데요. 좀 더 자세히 들려줄 수는 없나요? 너무 궁금한걸요.”

서연은 얼굴에 불이라도 난 사람처럼 양 볼을 벌겋게 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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