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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화. 또 다른 사람 (4) (84/197)

84화. 또 다른 사람 (4)2022.03.21.

낯선 세계에 떨어진 서연은 앞길이 막막했다. 마침, 이 세계 인물 중 한 명인 제르미를 만나지 않았다면 오갈 곳이 없었던 서연은 꼼짝없이 굶어 죽었을지도 모를 터였다. 하지만, 제르미에게 계속해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래서 서연은 제르미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16549790326868.png“저를 도와주시면, 제가 마법사님의 앞날을 봐 드릴 수가 있어요.”

16549790326877.png“앞날이요?”

16549790326868.png“네.”

16549790326868.png“나중에, 제르미 님께서 좋아하는 여자분이 위험에 처하지 않게 제가 도와드릴 수 있어요!”

제르미는 도저히 이 여자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처음엔 블레이크 공작부인과 똑같은 검은색 머리에 검은색 눈동자를 지닌 사람이어서 호기심에 도움을 준 것이었다. 그런데, 미래를 본다느니 등의 얼토당토 않는 말을 하는 바람에 곧 집에서 내보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레이독스에게서 공작부인이 미래를 본다고 하는 말을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제르미는 서연을 레이독스에게 부탁하기로 판단한 것이었다. 유카나다르 별택에 가게 된 서연은 레이독스에게 곧, 길리언 측에서 유카나다르에 파멸의 정령을 풀 테니, 블레이크에 도움을 요청하라는 것도 조언해주었다.

165497903269.png“블레이크 공작은 지금의 국왕을 왕좌에 올리신 분입니다. 그런데 현 국왕을 지지 않는 유카나다르를 도와주겠습니까?”

하지만 서연은 시카르가 레이독스를 도와줄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16549790326868.png“제가 알기론 블레이크는 왕실에 충성하고 있지 않아요. 그러니 도와주실 거예요.”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레이독스는 완전히 서연의 말을 믿지는 않았다. 하지만, 블레이크 공작이 정말로 레카도르의 왕손인 키안을 숨기고 있는 것을 확인하게 되니 서연의 말을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정말 그녀의 말대로 후에 파멸의 정령이 활개하기 시작했고, 블레이크가에 지원을 요청했을 때도 금세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때부터 레이독스는 서연의 말을 믿기 시작했다. 물론 서연이 아는 원작 내용과는 달리 사건의 전개들이 빠르긴 했지만 이 모두가 블레이크 공작 곁에 있는 공작부인이 미리 언질을 한 까닭이라는 사실을 서연은 알 수 있었다. 서연의 설명을 듣던 유라는 손사래를 치고 웃으며 말했다.

16549790326908.png“서연 씨. 그래서 후작님과의 러브스토리는 언제쯤 들을 수 있는 거예요?”

서연은 짓궂게 웃는 유라를 보며 부끄러운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말했다.

16549790326868.png“…… 얼마 안 됐어요.”

16549790326908.png“얼마 안 됐다면……?”

16549790326868.png“몇 개월 안 됐어요. 사실 먼저 좋아한 것도 저였어요. 후작님께서는 돌아가신 아내분 때문에 누군가에게 마음을 열기 힘들어하셨거든요. 그리고 공작부인께서도 아실지 모르겠지만, 루시가 아직 아빠의 여자 친구를 받아들이기에 힘들다고 해서 많이 망설이셨죠.”

두 사람이 만난다고 해서 설레는 그런 이야기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우여곡절이 많았던 것 같았다.

16549790326908.png“참, 제르미 님에게 좋아하는 여인이 생길 거라고 말씀하셨다고요? 혹시 그분의 성함도 알려드렸나요?”

16549790326868.png“아니요. 제가 로엔 님에 대해 말씀드렸을 때, 제르미 님께서는 별로 관심 없는 눈치셨어요. 그래서 말씀드리지 않았는데, 결국 예정보다도 더 빨리 그분을 만나셨더군요.”

나는 굳이 두 사람을 만나게 하기 위해서 내가 노력한 사실들은 말하지 않았다.

16549790326908.png“그랬군요. 서연 님께서도 이곳에 오셔서 정말 많이 놀라셨겠어요.”

16549790326868.png“처음엔 정말 많이 놀랐죠. 원래는 주인공 키안이 잠시 머물던 민가 아시죠?”

알다마다. 내가 이곳에 와서 가장 먼저 찾은 곳이 그곳이었는데.

16549790326908.png“당연히 알죠. 설마 서연 님도 이곳에 오셔서 가장 먼저 찾았던 곳이 주인공이 머물던 민가인가요?”

16549790326868.png“네. 근데 거기에 먹을 게 하나도 없었어요. 시기를 보니 주인공이 떠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그런데도 먹을 게 하나도 없어서 뭐라도 먹을 걸 구하러 나갔다가 제르미 님 눈에 띄게 된 거죠.”

서연의 말을 듣는 그 순간, 사람들이 만약 내가 있던 차원에서 이곳으로 오게 된다면 나와 서연처럼 키안이 머물렀던 민가부터 찾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16549790326908.png‘이 일은 나중에 시카르에게 말해줘야겠어.’

16549790326908.png“참. 서연 님. 혹시 후작님께 이곳이 소설 속이라는 이야기를 하셨나요?”

서연은 그건 결코 아니라는 듯 강하게 손사래를 쳤다.

16549790326868.png“아뇨. 아뇨. 그런 말을 하진 않았어요.”

16549790326908.png“다행이군요. 잘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이곳이 소설인 걸 알게 된다면 꽤 많이 놀라거나 실망이 클지도 몰라요.”

16549790326868.png“그렇죠. 그런데, 블레이크 공작님은 어떠셨어요? 그분께서는 이미 이곳이 소설이라는 걸 알게 되시지 않았어요?”

16549790326908.png“네. 알게 됐어요.”

16549790326868.png“아무 말도 없으시던가요……?”

16549790326908.png“워낙 정신력이 강하시잖아요. 금세 받아들이시더군요.”

서연은 그럴 수 있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긴 하면서도 의심쩍은 표정이었다.

16549790326868.png“그래도 그런 걸 금세 그렇게 쉽게 받아들이기는 힘들 텐데. 역시, 역할이 미친놈이라…….”

나는 서연이 말실수라도 할까 싶어서 열심히 손으로 엑스자를 그렸다. 서연은 생각하듯 말을 잇다가 나의 격한 반응을 보고는 시카르가 내 기억을 읽게 된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은 모양인지 손으로 쩍 벌어진 입을 막았다. 그러고는 정정하듯이 다시 보이지 않는 곳에 아부를 하듯 조금은 비굴하게 웃음을 띠며 말했다.

16549790326868.png“우리가 흔히들 천재를 미쳤다고 표현하잖아요? 블레이크 공작님께서 역시나 천재라서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넘어가신 건가 봐요. 아하하.”

웃으면서도 속은 울고 싶은 심정이겠지. 시카르가 무서워서 제 존재를 지금까지 숨기고 살았던 사람이니 지금 얼마나 두려울까. 그녀는 시카르가 당장이라도 나타나 제 목에 칼을 겨누지는 않을까 걱정하듯 벌벌 떨리는 시선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도 저런 때가 있어서여서인지 그녀의 지금 행동이 매우 공감이 갔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손을 지그시 잡아 주었다.

16549790326908.png“괜찮아요. 시카르는 정말 많이 사람이 됐거든요.”

그녀는 내가 시카르라고 부르는 것에 또 한 번 놀란 표정을 지으며 소곤소곤거리며 말했다.

16549790326868.png“그럼 두 분이 정말 쇼윈도 관계가 아니라는 건가요?”

16549790326908.png“그럴 뻔했지만, 시카르가 저를 진심으로 좋아하게 돼서…….”

서연은 감탄하기 보다는 과연 정말 그럴까 하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시카르가 내 기억을 보고 있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없이 이런 대답을 한다고 생각하는 듯해 보였다. 하지만, 괜찮았다. 어차피 시카르 들으라고 한 말이었으니까.

16549790326908.png“그런데, 서연 님. 속삭이며 말을 해도 시카르에게 다 보일 텐데…….”

그녀는 다시 제 입을 막으며 울상을 지었다.

16549790326908.png“서연 님께서는 그럼 계속 별택에 머무실 생각이신가요?”

16549790326868.png“네. 갈 곳도 없고 별택에 오래 있다보니 이제는 그곳이 제 집 같고 편해서요. 그런데, 그건 왜……?”

16549790326908.png“혹시 별택이 불편하시면, 저희 공작저에 와 계시는 건 어떨까 해서요.”

서연은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기겁을 하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16549790326868.png“아, 아니요! 제안은 감사하지만, 저는 후작저의 별택이 편하고 좋은 것 같아요. 마음만 감사히 받을게요.”

시카르가 그렇게 무서울까. 알고 보면 그렇게 겁먹을 인간은 아닌……. 아니지. 생각해보니까 나도 처음엔 겁을 많이 먹었지. 내가 그런 제안을 해서인지, 아니면 나와 나누는 대화들을 시카르가 다 볼 수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계속 긴장한 표정을 짓던 서연은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16549790326868.png“저, 공작부인. 오늘은 이만 가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제가 실수를 많이 한 것 같아서 다음엔 후작님께 좀 더 예법을 배운 후에 찾아오도록 할게요.”

16549790326908.png“어. 벌써 가시려고요?”

16549790326868.png“저도 더 있고 싶은데…….”

서연은 내게 다시 낮게 속삭였다.

16549790326868.png“제가 계속 말실수를 하는 것 같아서 너무 무서워서요.”

고향 친구를 만난 듯 너무 반가웠지만, 그럼 뭐하나. 시카르가 기억을 읽는 것을 알고 있으니 나와 마음 편히 대화를 나눌 수가 없는 상대인 것을. 나는 너무나 아쉬웠지만, 그녀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16549790326908.png“그래요. 그럼. 같이 나가요 배웅해 드릴게요.”

16549790326868.png“감사합니다. 공작부인.”

그때, 먼저 복도로 나갔던 서연이 뭔가에 보고 놀란 듯 기겁한 얼굴로 뒤돌아서 다시 내게로 걸어왔다. 서연의 뒤를 보니 시카르가 복도에 서 있는 게 보였다.

16549790326908.png“왜 그러세요? 서연님?”

서연은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닦아내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16549790326868.png“아. 공작님이 복도에 서 계셔서 너무 놀라서요.”

시카르는 그저 굳은 얼굴로 서 있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봐도 그 모습은 꽤 위압적으로 보였다. 다음엔 손님이 왔을 때도 미소를 짓고 있는 법을 좀 가르쳐야겠는걸.

16549790326908.png“따라오세요. 서연 님.”

나는 서연의 손을 붙잡고 복도를 걸어 나갔다. 그러자 서연의 가냘픈 손이 덜덜 떨리고 있는 게 느껴졌다.

16549790326908.png‘정말 많이 무서운가 보네.’

시카르는 그녀가 자신을 무서워하든 말든 관심 없다는 듯 내 앞으로 걸어오며 서연을 보고 말했다.

16549790441397.png“가는 건가?”

16549790326868.png“네? 네. 공작님.”

16549790441397.png“그럼 가기 전에 악수나 한 번 하지.”

이렇게 너무 대놓고 속 보이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서연은 도움이라도 구하듯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시카르를 은근히 노려보며 말했다.

16549790326908.png“시카르. 악수는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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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이 말 한마디를 하자 시카르가 내밀었던 손을 다시 내려놓는 것을 보고 서연은 깜짝 놀란 얼굴로 날 쳐다보았다. 여태까지 내가 했던 말이 시카르가 내 기억을 보기 때문에 일부러 한 말이 아니라, 시카르가 정말 날 좋아하는 게 사실이냐는 듯 묻는 눈빛과도 같았다. 그래서 나는 조용히 고개만 끄덕여 주었다. 서연은 또 한 번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자신이 두 눈으로 보고서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하긴, 나도 내가 이렇게까지 미친놈을 교화시킬 수 있을 줄은…… 음. 아직 교화는 이르겠군.

16549790441397.png“이름이 한서연이라고?”

서연은 시카르의 목소리에 뺨이라도 맞은 듯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16549790326868.png“네, 네.”

16549790441397.png“앞으로 자주 들르도록 하지.”

16549790326868.png“자, 자주요?”

16549790441397.png“그래. 자주 와서 내 아내의 말동무가 되어줬으면 좋겠군.”

거절하면 죽이겠다는 눈으로 쳐다보면서 묻긴 왜 묻는 건지. 내가 없었다면 또 칼을 겨누며 물었겠지. 서연은 덜덜 떨리는 제 손을 잡으며 공손히 대답했다.

16549790326868.png“네. 아, 알겠습니다. 공작님. 부, 부름에 응하겠습니다.”

16549790441397.png“후작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나가보도록 하지.”

16549790326868.png“네. 고, 공작님.”

  *** 서연이 가고 나서 시카르와 나는 거실에서 나란히 마주 보고 앉아 오랜만에 손을 잡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다정하게 손을 잡고 있는 것처럼 보였을 테지만, 역시나 나는, 그저 기억을 읽히고 있는 중이었다.

16549790441397.png“고향 친구를 만나서 그런지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

좋다마다. 같은 곳에 살던 사람을 만나는 일은 기분 좋은 일이었고, 서연은 예의를 아는 사람이어서 대화를 나누는 동안 즐거웠다. 역시 로판을 보는 사람들 중에 좋은 사람이 더 많을 것이라는 믿음은 날 배신하지 않았다랄까.

16549790441397.png“참, 헤르시아 좀 부르도록 해.”

16549790326908.png“헤르시아는 왜?”

16549790441397.png“왕후가 네게 선물을 했으니 나도 보답을 해야겠지.”

시카르의 섬뜩한 표정으로 보아선, 그 선물이 좋은 선물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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