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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화. 또 다른 사람 (5) (85/197)

85화. 또 다른 사람 (5)2022.03.24.

그래도 헤르시아에게 해를 입히진 않을 테니 나는 알겠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것보다 더 빨리 전해야 할 말이 있었다.

16549790573274.png“시카르. 그 민가를 조사해봐.”

시카르는 내 말을 한 번에 알아듣지 못했다.

1654979057328.png“민가라니?”

16549790573274.png“내가 여기 처음 왔을 때 할머니와 함께 몸을 맡겼던 곳 말이야. 서연 님도 이곳에 오자마자 거기부터 생각이 나셨대.”

1654979057328.png“비어 있는 곳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겠군.”

16549790573274.png“거기를 꽉 잡고 있으면 적어도 이곳으로 오는 사람들 일부는 붙잡을 수 있을 거야.”

1654979057328.png“민가를?”

16549790573274.png“그래.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당장 사람들을 보내야 해.”

시카르는 내 말에 깊이 공감하는 듯 보였다.

1654979057328.png“네 말이 맞아. 그런 일은 빨리 진행해야겠지.”

16549790573274.png“근데, 정말 누군가 길리언의 편에 서려고 할까?”

1654979057328.png“길리언은 네 고향이 어디인지, 어디서 온 사람인지 궁금해하고 있지. 그러니, 네 고향에서 온 자가 길리언의 편에 서려고 하지 않아도, 길리언의 근위대가 검은 눈동자를 지닌 사람을 발견하게 된다면 그냥 두진 않을 것이다. 이미 길리언의 수중에 잡힌 사람이 없길 바라는 수밖에.”

16549790573274.png“그럼, 네 말은 그 어떤 고문이라도 가해서 어디서 왔는지 자백을 받아낼 거라는 거야?”

1654979057328.png“그렇지. 반드시 그러겠지. 그래야 네 정체를 파악할 테니까.”

16549790573274.png“하지만, 실토를 한다고 해도 어차피 다른 차원에서 왔다고만 말할 텐데. 길리언이 그 말을 믿을까?”

1654979057328.png“차마, 소설 속이라고는 못 할 테니까 네 말대로 다른 차원이라고 속이겠지. 그리고 자신의 말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곳의 정보를 주게 될 테고. 서연이 그랬던 것처럼 내가 사람들의 기억을 본다는 말을 전할 수도 있고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서 예견하거나 키안의 정체를 실토할 수도 있겠지.”

16549790573274.png“그렇게 되면 우리 키안이 위험하단 얘기잖아. 키안은 아직 어려서 힘이 없는데…….”

1654979057328.png“길리언 쪽에서 별 미동이 없는 걸 보면 아직 네 고향 사람을 본 적은 없는 듯하군. 아니면, 다른 꿍꿍이를 품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아직 베로니아의 행방도 모르는 상황이니 반드시 전자의 경우여야만 했다.

1654979057328.png“길리언을 감시하려면, 여러모로 헤르시아가 필요하겠군.”

16549790573274.png“길리언을 감시하는데 헤르시아가 필요하다고?!”

1654979057328.png“그래. 왕후의 측근이 된다면, 길리언의 곁을 맴도는 게 더 수월해질 테니까 나중에 여러모로 쓰임새가 있을 것이다.”

지난 3년간 내가 본 헤르시아는 길리언을 두려워할 뿐 아니라. 그와 있는 걸 치가 떨리게 싫어했다. 그런 헤르시아가 길리언의 곁에서 뭘 제대로 할 수나 있을까?

16549790573274.png“헤르시아가 거절한다면?”

시카르는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1654979057328.png“헤르시아는 거절할 수 없을 것이다.”

또 협박할 생각이구나. 헤르시아는 지난 3년간 내 친구가 되어줬던 사람이었다. 그녀와 함께 과일청을 담고, 그녀와 함께 소설을 읽고, 그녀에게서 사교계 얘기를 듣기도 했다. 가끔 할머니를 뵙기 위해 대신전에 갈때도 헤르시아가 곧잘 따라오곤 했었다. 내게는 헤르시아가 이곳에 있는 단 하나뿐인 친구와 다를 게 없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를 협박한다니. 하지만, 시카르에게 아내의 친구를 협박하면 안 된다고 좋게 말해봤자 알아먹을 인간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사실, 이럴 때 쓰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비장의 카드란 모름지기 필요할 때 꺼내 드는 법이니까. 그렇다면 지금이 가장 적절하다고 볼 수 있겠지. 나는 팔짱을 끼고 시카르를 향해 따지듯 말했다.

16549790573274.png“참, 시카르. 할 말이 있어.”

1654979057328.png“할 말?”

16549790573274.png“너 왜 편지 안 했어?”

시카르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두 눈을 깜빡거렸다.

1654979057328.png“편지?”

16549790573274.png“출정가서 왜 편지를 한 통도 하지 않았냐고.”

1654979057328.png“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16549790573274.png“너 가서 밥 먹었지?”

1654979057328.png“먹었지.”

16549790573274.png“작전회의도 많이 했지?”

1654979057328.png“많이했지.”

16549790573274.png“그런데 가족에게 안부를 전하는 편지를 할 시간이 없다는 건 핑계이지 않아? 아니면, 우리를 가족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든가 말이야. 로즈마리를 선물한다고 그게 가족을 위하는 건 아니니까.”

나는 꽤 실망이 크다는 얼굴로 시카르를 한번 슬쩍 쳐다보았다. 이 작전은 사실, 할머니께서 시카르에게 쓰시던 방법이었다. 그럴 때마다 시카르는 할머니의 눈치를 보며 사납게 들어 올리고 있던 발톱을 내려놓고는 했었다. 시카르가 우리를 정말 가족이라고 생각한다면, 내 말을 들을 것이다. 시카르는 조금 미안했는지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1654979057328.png“좋아. 그건 내 실수다. 만회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지?”

16549790573274.png“그럼, 헤르시아를 겁박하지마. 내 기억을 봐서 알겠지만, 그녀는 지금 내 유일한 친구야.”

1654979057328.png“알겠다. 헤르시아를 겁박하지 않고도 설득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보도록 하지.”

16549790573274.png“겁박, 협박 다 안 돼.”

1654979057328.png“알겠다. 하지만, 거래는 되겠지.”

넌 거래를 목에 칼을 겨누고 하잖아. 이 자식아. 라고 말하는 대신 나는 생긋 웃으며 물었다.

16549790573274.png“어떻게 거래를 할 생각이야?”

1654979057328.png“길리언이 헤르시아를 하멜 백작가에 시집 보내려 한다는군.”

16549790573274.png“하멜 백작가?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은데…….”

1654979057328.png“운송업을 하는 가문이지. 북부대로 횡단을 열어주는 조건으로 헤르시아와의 혼인을 추진하고 있다고 하는군.”

헤르시아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꽤 충격을 먹을 것이다. 그리고 원작에서처럼 또 거부하지 못하고 그 결혼을 이어갈지도 모르고 말이다. 길리언은 어떻게든 헤르시아를 정치적으로 써먹으려는구나.

16549790573274.png“아, 안 돼. 네가 막아줘. 시카르.”

1654979057328.png“헤르시아가 날 도와준다면 나도 도움을 줄 수가 있겠지.”

시카르는 더 이상은 양보할 수 없다는 태도였고 나도 더는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국왕이 추진하는 결혼을 무산시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란 것도 알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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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음 날, 헤르시아는 일찍 공작저를 찾아왔다. 공작저를 방문한 헤르시아의 반응도 서연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뭔가 대죄라도 저지른 건가. 하는 긴박한 얼굴로 나에게 총총거리며 달려왔다.

16549790684578.png“공작부인! 공작님께서 절 왜 찾으시는 거예요? 제, 제가 뭘 잘못한 걸까요?”

16549790573274.png“아니에요. 헤르시아. 공작님께서는 뭘 잘못한 사람들만 찾아서 부르고 그런 사람은 아니에요. 그냥 헤르시아 님께 물어볼 게 있다고 부르신 거예요.”

헤르시아는 그야말로 죽다 살아난 얼굴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16549790684578.png“휴. 다행이네요. 공작님이 저를 찾는다는 서신을 받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르거든요.”

헤르시아는 거기까지 말해놓고 난 후에야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이 다름 아닌 그 블레이크 공작가의 안주인인 블레이크 공작부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듯했다.

16549790684578.png“아, 공작부인 앞에서 입에 담으면 안 될 소리를 하였군요. 죄송합니다. 공작부인.”

그나마 헤르시아는 시카르가 기억을 본다는 사실을 몰라서 다행이었다. 그녀가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서연처럼 나를 멀리했겠지. 안 그래도 시카르 때문에 귀족 부인들이 나와 가까워질 엄두를 못 내는데, 헤르시아 마저도 없었다면 얼마나 쓸쓸했을까. 나는 헤르시아의 기를 살려주기 위해 그녀가 좋아하는 칭찬을 해주었다.

16549790573274.png“그나저나 헤르시아. 오늘 머리가 정말 예쁘게 잘 되었군요.”

다행하게도 그녀의 관심은 금세 자신의 헤어스타일로 향했다.

16549790684578.png“그렇죠? 요즘 이렇게 동글동글 말아 올린 머리가 유행이라고 해요. 공작부인께서도 이 머리 한 번 해보세요.”

저번에는 향수더니 이제는 헤어스타일로 바뀐 모양이군. 하지만, 그 머리는 난 별로 하고 싶지 않은 머리였다. 그 머리는 긴 머리를 동글동글하게 말아 올린 머리라서 아무리 긴 머리라도 어깨까지 올 정도였다. 그래도 헤르시아가 하니 귀엽긴 하네.

16549790684578.png“참, 아론이 이번에 유카나다르의 기사로 임명된다고 해요.”

16549790573274.png“축하해요. 헤르시아.”

16549790684578.png“대단한 건 아니고 말단 기사들 중 하나라고 했어요. 그래도 월급도 받고 이젠 밥벌이도 할 것 같으니 집에서 나와도 아론에게 시집간다고 해도 먹고 살 걱정은 덜 수 있을 거 같아요.”

헤르시아는 아직 국왕이 저를 시집 보내려 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걸까. 걱정스러운 마음에 조심히 물어볼까 싶던 차에 그녀가 먼저 말을 꺼내었다.

16549790684578.png“사실, 전하께서 저를 하멜 백작에게 시집 보내려고 하고 있어요. 그래서 저는 정말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16549790573274.png“실은 저도 그 얘기를 들었어요. 헤르시아.”

16549790684578.png“정말이요?!”

16549790573274.png“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해맑던 헤르시아의 눈에 눈물이 슬며시 고이기 시작했다.

16549790684578.png“공작님께서도 이미 알고 계신 걸 보니 정말 그렇게 결정이 날 건가 봐요…….”

헤르시아는 갑자기 온갖 감정이 복받쳐 오르는 듯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맑은 눈물이 꼭 그녀의 진솔한 사랑을 투영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16549790684578.png“전 이제 어쩌면 좋아요. 이제 꼼짝없이 하멜 백작가에 시집가게 생겼나 봐요…….”

16549790573274.png“어쩌면 공작님이 해답을 주실지도 모르겠어요. 헤르시아.”

16549790684578.png“고, 공작님이요?”

그녀는 기대하기보다는 되레 더 바짝 긴장하는 눈치였다. 본능적으로 시카르가 맨입으로는 도와주지 않을 걸 알고 있는 것처럼. 긴장을 많이 한 탓인지 헤르시아는 하녀가 응접실 문고리를 붙잡는 소리를 듣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16549790684578.png“오, 오랜만이십니다. 공작님.”

시카르는 관심 없다는 얼굴로 자리에 앉으며 나를 보고 말했다.

1654979057328.png“헤르시아와 얘기 좀 하게 자리를 비켜주…….”

내가 자리를 비켜주면 헤르시아에게 위협적으로 나갈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럴 수 없다는 듯 시카르를 슬쩍 노려봐주었다. 시카르는 조금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1654979057328.png“주지 않아도 될 것 같군요. 부인.”

금세 꼬리를 내리는 걸 보니 확실히 편지 얘기를 한 것이 효과가 있긴 있었다. 하지만 시카르는 아직 눈물을 흘리고 있는 사람을 대하는 방법을 전혀 모르는 듯했다. 레이독스라면 벌써 주고도 남았을 손수건을 그는 꺼내지 않았으니까.

16549790573274.png“공작님. 손수건 좀 주시겠어요?”

시카르는 미간을 찌푸리며 헤르시아를 쳐다보고는 진심이냐고 묻듯 나를 쳐다보았다. 자신의 귀중한 손수건을 정말 헤르시아의 눈물을 닦는 데나 쓸 거냐는 뜻이겠지. 나는 어서 내놓으라는 듯 손가락을 까닥거렸고 그러자, 시카르는 인상을 쓰며 손수건을 내게 건네주었다. 나는 받아든 손수건으로 헤르시아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하멜 백작의 나이가 헤르시아보다 거의 스무 살이 많다고 했으니 얼마나 결혼하기가 싫을까.

16549790573274.png“헤르시아. 눈물을 그쳐요.”

16549790684578.png“흑…… 감사합니다. 공작부인.”

이런. 딱하기도 해라. 시카르는 헤르시아의 울음소리가 듣기 싫은 듯 인상을 쓰며 테이블을 노크하듯 몇 번 두드렸다.

1654979057328.png“헤르시아. 운다고 해결되지도 않을 일에 마음 그만 쏟고 진정하지. 지금 내가 기다리고 있는 게 안 보이나?”

본래였으면 죽고 싶지 않으면 그만 울라고 했을 성격에 그나마 저렇게 말하는 것도 많이 교화된 것이었다. 시카르는 겁을 먹고 눈치만 보고 있는 헤르시아의 빈 찻잔에 차를 따라주며 느릿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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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979057328.png“헤르시아.”

물론 그로서는 긴장을 풀라는 의미로 나름의 친절을 베푼 것이지만, 헤르시아로서는 그게 더 무서웠는지 몸을 뒤로 흠칫 빼고 있었다.

16549790684578.png“네. 공작님…….”

1654979057328.png“하벨 백작가의 사람이 되는 것을 피하고 싶은가?”

내가 좀 전에 시카르가 도와줄 수도 있을 것 같다고 말한 까닭인지, 헤르시아는 나를 한 번 힐끗 쳐다보다가 내가 고개를 끄덕여 주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16549790684578.png“네, 공작님…… 할 수만 있으면 피하고 싶습니다.”

1654979057328.png“그렇다면, 내가 너를 도울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어때. 내 말대로 한번 해보겠나?”

헤르시아는 자신의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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