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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화. 불길한 예감 (1) (86/197)

86화. 불길한 예감 (1)2022.03.28.

16549790845166.png“공작님께서 저를 도와주신다면 그 은혜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16549790845174.png“그래야지. 하지만, 헤르시아. 내가 아무런 대가도 없이 너를 도와줄 것이라는 헛된 기대를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이미 각오는 한 듯 보였지만, 헤르시아는 꽤 불안한 눈빛으로 시카르를 쳐다보았다.

16549790845166.png“고, 공작님께서 제게 원하시는 것이…….”

16549790845174.png“왕후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서 내게 보고하라.”

헤르시아는 꽤 충격적인 표정을 지었고, 충격적인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왕후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라니! 그건 너무 불가능한 요구조건이었다.

16549790845166.png“공작님. 그 부분은 다시 한번 더 생각해 주세요. 제가 감히 어떻게 왕후 전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수 있겠습니까.”

16549790845174.png“왕후의 시녀 중 한 명이 출산을 앞두고 있어서 당분간을 직무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동안은 왕후 곁에 시녀가 둘 뿐이니, 네가 그사이에 왕후의 시녀로 들어가면 되겠지.”

16549790845166.png“하, 하지만 제가 어떻게 무슨 수로 왕후 전하의 시녀가 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허락하지 않으실 텐데요.”

16549790845174.png“국왕에게 청하라. 하멜 백작가에 시집가기 전 왕후의 시녀로 일하고 싶다고 말이다. 사촌 동생의 청이니 그 정도는 들어주겠지.”

16549790845166.png“네? 하, 하지만, 전하께서 윤허하신다 해도 케일리안 백작 부인께서 그 일을 아시게 된다면…….”

케일리안은 권세 있는 가문의 백작 부인이었다. 그녀가 왕후의 시녀를 도맡아 하게 된 것은 왕후에 대한 충정이자 명예 때문이었기 때문에 누군가 그 자리를 대신하겠다고 하는 것은 케일리안에 대한 도전과 마찬가지였다. 케일리안은 그 대상이 아무리 헤르시아라고 해도,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는 꼴을 가만히 지켜 보고 있기만 할 성격은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도전할 성격이 못되는 헤르시아로서는 두려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16549790845174.png“제까짓 게 화나봤자, 국왕이 자신의 정치적 이점을 위해 하멜 백작가에 시집 보내려는 너를 어쩌지는 못할 것이다.”

16549790845166.png“하지만…… 저는 너무 가슴이 떨려서…….”

물론 그렇겠지. 케일리안 뿐 아니라, 왕후의 성격이 보통이 아니라 그 곁에 있는 것만도 숨이 막힐 것 같을 테니까. 하지만, 시카르는 어차피 헤르시아의 입장 따위야 어떻든 안중에도 없는 사람이었다.

16549790845174.png“네 자신을 위해 그까짓 일도 못 하면서 어떻게 무언갈 바꿀 생각을 하는 거지? 날 위해 그 정도 일도 못 한다면 넌 내게 아무짝에도 쓸모없을 뿐이다.”

시카르는 자리에서 느릿하게 일어나며 말했다.

16549790845174.png“부인. 애석하지만, 헤르시아를 도울 방법은 없을 것 같습니다.”

나는 절망한 눈으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헤르시아를 보다가 시카르를 따라나섰다.

16549790882872.png“시카르!”

내가 쫓아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시카르는 그대로 걸음을 멈추어 세웠다.

16549790845174.png“왜.”

16549790882872.png“이러고 가면 어떡해. 다른 방법은 없어?”

16549790845174.png“없어.”

16549790882872.png“그럼 헤르시아에게 설명이라도 해줘.”

16549790845174.png“무슨 설명.”

16549790882872.png“이미 겁을 먹고 있는 사람을 그렇게 몰아치면 어떡해. 지금 넌 눈앞이 캄캄한 사람에게 두건을 씌우고 있는 거라고.”

16549790845174.png“말했을 텐데. 난 헤르시아를 일방적으로 도와줄 생각이 없다고. 국왕이 헤르시아를 하멜 백작가에 보내려는 것이 그저 사촌 여동생을 좋은 가문에 시집보내려는 게 아니라는 건 너도 알겠지. 목적이 분명한 결혼이니만큼, 나도 길리언을 회유하려면 대가를 치러야 하지. 그러니 어린아이처럼 징징 짠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란 말이다.”

물론 시카르의 말에 틀림이 없긴 했지만, 모두들 그렇게 냉정하게 생각할 수만은 없다는 것을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

16549790882872.png“시카르. 네 말이 맞아. 하지만 처음부터 다 잘하고 용기 있는 사람이 어디 있어. 특히 지금 헤르시아는 너무 막연해서 그러는 거야. 네가 앞으로 헤르시아가 어떻게 하면 되는지 먼저 잘 설명해주고 나서 결정하게 해도 늦지 않다고. 다짜고짜 왕후의 시녀가 돼서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해라! 라고 하니까 겁부터 먹는 거지.”

시카르는 이보다 더 어처구니없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16549790845174.png“어린애도 아니고 다 큰 성인에게 설명까지 해야 한다니. 어처구니가 없군.”

16549790882872.png“어른이라고 해서 누구나 다 성숙하고 이성적이진 않으니까.”

시카르는 골치 아프다는 듯 한숨을 쉬며 응접실을 향해 걸어갔다.

16549790845174.png“설명 정도는 하도록 해보지.”

나는 시카르를 조르르 따라가며 말했다.

16549790882872.png“내가 방금 널 설득한 것처럼 너도 최선을 다해서 헤르시아를 설득해야 해.”

잘 걸어가던 시카르는 일순 걸음을 멈추고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16549790845174.png“너무 많은 걸 시키는데.”

16549790882872.png“시키는 게 아니고 부탁이라고.”

16549790845174.png“부탁을 참, 명령같이 하는 게 점점 날 닮아가는 것 같군. 그런 독한 모습도 나쁘지 않지.”

시카르는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응접실로 들어섰다.

16549790882872.png‘그런 걸로 뿌듯해하지 말라고!’

헤르시아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가 다시 우리가 들어서자 놀란 듯 벌떡 일어섰다.

16549790882872.png“앉아요. 헤르시아.”

16549790845174.png“앉지.”

헤르시아는 시카르가 앉고 나서야 자리에 앉았다.

16549790845174.png“내 부인께서 네가 뭘 해야할 지 구체적인 설명을 원하셔서 말해주는 거니 잘 들어라.”

16549790845166.png“감사합니다. 공작님…….”

시카르는 잔뜩 주눅이 들어있는 헤르시아를 향해 설명을 이어나갔다. 왕후에게는 현재 두 명의 시녀가 함께하는데 이들은 평소 케일리안의 기에 눌려 있었기 때문에 이들이 헤르시아에게 텃세를 부릴 일은 적을 것이라고 했다. 다만, 이들을 잘 이용하기 위해서 케일리안과 다르게 다정하게 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이들이 말을 못 했을 뿐 속으로는 케일리안을 매우 싫어한다는 것이었다. 이들과 친해지고 나면 나머지는 일사천리다. 헤르시아가 일일이 쫓지 않아도 언제든 헤르시아가 물어보면 이들이 모두 다 말을 해 준다. 그러니까 시카르가 헤르시아에게 지시하는 바는 이와 같았다. 시녀들과 술을 마시고 어울릴 수 있을 만큼 친해질 것. 그리고 헤르시아의 집에서 모여 소소한 정찬회를 열고 그곳에 우리를 초대할 것이었다.

16549790845174.png“시녀들과 친해지게 되면, 왕후의 일거수일투족은 자동으로 알게 될 것이다. 그러니 이 정도는 해줄 수 있겠지?”

막상 듣고 보니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이 됐는지 헤르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16549790845166.png“해볼게요. 공작님.”

16549790845174.png“명심해. 시녀들과 반드시 친해져야 한다.”

16549790845166.png“네. 공작님.”

헤르시아는 왜 시녀들과 친해져야 하는 건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왕후를 감시해야 하는지 알고 겁을 먹고 있다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고 느꼈던 모양인지 조금 안심하는 듯 보였다. 나는 시카르가 헤르시아에게 시녀들과 친밀감을 쌓으라고 한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정찬회 때 그녀들의 기억을 보려고 하는 것 같았으니까. 헤르시아를 이용해서 왕후의 일거수일투족을 알아내고, 좀 더 세밀한 부분들은 시녀들의 기억을 통해 보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왕후의 시녀들은 사교모임에 함부로 돌아다닐 수도 없었으니 시카르의 입장에서는 그녀들의 기억을 읽고 싶어도 마땅한 방법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불법적이거나 조금 위험한 방법으로 기회를 엿볼 수도 있었을 테지만, 그것은 최후의 보루쯤으로 남겨둔 듯했다.

16549790845174.png“그 모든 걸 하기 전에 네 사촌 오빠인 국왕을 먼저 설득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넌 하나도 빼먹지 말고 내가 일러주는 대로 해라.”

그리고 시카르는 헤르시아가 앞으로 대처해야 할 모든 걸 일러주었다. 헤르시아가 필기를 하려고 하자, 시카르는 그 어떤 증거를 남겨서는 안 된다며 모두 기억하라고 일렀다. 그래서 헤르시아는 시카르의 말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꼬박꼬박 새겨들었다.

16549790882872.png‘진작 이렇게 설명했으면 좋았을 것을. 정말 사람과 대화하는 법을 모른다니까.’

안심한 듯 보이는 헤르시아를 마음 편히 보내고 나서, 나는 시카르에게 물었다.

16549790882872.png“정찬회 때 시녀들의 기억을 보려는 거지?”

16549790845174.png“물론이지. 아니면 내가 왜 그런 쓸데없는 파티에 참석하겠나.”

16549790882872.png“헤르시아의 표정을 보니까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았어. 자신감이 붙어 있더라니까.”

16549790845174.png“그 정도 능력도 없다면 자신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기대도 하지 말아야겠지.”

16549790882872.png“잘할 수 있을 거야. 오늘 그녀의 눈빛은 그동안 내가 본 것 중 가장 자신 있어 보였거든.”

시카르는 나를 보며 슬쩍 미소를 짓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16549790845174.png“네가 즐거워하는 걸 보니 나쁘지 않은 것 같군.”

그러고는 휙 돌아서 복도를 걸어 나갔다. 그냥 내가 웃어서 보기 좋다고 하면 될 것을. 그래도 헤르시아 때문에 기뻐하는 날 보며 은근히 미소짓고 있는 시카르를 보니 나도 괜히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시카르는 길리언의 측근도 아닌 왕후의 측근을 이용해서 뭘 알아내려는 것일까. 나와 같은 곳에서 온 사람들을 알아내기 위한 방법은 아닌 것 같았다. 궁금했지만, 그가 미리 말을 하지 않았기에 나도 더는 물어볼 수가 없었다. 지금으로선, 언제나처럼 그가 알아서 잘해줄 것이라고 믿어주는 게 가장 큰 도움이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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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작저를 다녀온 후 국왕을 알현하기까지가 쉬운 일만은 아니었지만, 하멜 백작에게 시집가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 이것뿐이었기에 헤르시아는 이를 악물었다. 숨소리마저도 웅장하게 울리는 것만 같은 알현실에 서서 그녀는 길리언에게 예의를 갖추었다.

16549790845166.png“알현을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의자에 앉아 있던 길리언은 앉으라는 듯 헤르시아를 향해 손을 까딱거리며 말했다.

16549790968192.png“언제나 날 피해 다니기만 하던 네가, 날 보잔 말을 먼저 하니 궁금해서 견딜 수가 있어야 말이지. 어서 거기 앉아라.”

16549790845166.png‘그래서 알현일을 일찍 잡으신 거구나.’

헤르시아가 알현을 신청했을 때만 해도 대기 명단에서 한참 뒤에나 있었기에 국왕을 알현하기까지 한 달은 넘게 걸릴 것만 같았다. 대기명단에는 각 영지의 영주들의 알현 날짜들로 빼곡했었다. 차라리 날짜가 늦게 잡히니 긴장이 풀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날 길리언으로부터 입궁하라는 명이 떨어진 것이었다. 의자에 등을 기대고 있던 길리언은 헤르시아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16549790968192.png“날 보자고 한 용건을 말해 보거라.”

16549790845166.png“케일리안 님께서 출산 때문에 당분간 휴직하신다고 들었습니다.”

16549790968192.png“그래. 그렇다고 하더군. 헌데 네가 그 얘기를 묻는 이유가, 설마 왕후의 시녀라도 하고 싶다는 뜻인 것이냐?”

16549790845166.png“네. 국왕 전하. 제가 왕후 전하의 시녀가 되고 싶습니다.”

16549790968192.png“갑자기 어째서 왕후의 시녀가 되고 싶다는 거지?”

16549790845166.png“그간 왕후 전하를 모시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해서 안타까워하던 차에 지금이 기회라 생각했습니다.”

16549790968192.png“정말 그것뿐이냐?”

16549790845166.png“네. 전하.”

16549790968192.png“정말 이유가 그것인지는 보면 알겠지. 일어나라.”

길리언은 갑자기 일어나 헤르시아의 팔을 붙잡고 일으켜 세웠기에 그녀는 당황했다.

16549790845166.png“저, 전하? 왜, 왜 그러시는 것입니까.”

16549790968192.png“조용히 따라오거라.”

길리언에게서는 흉포한 맹수의 기운을 풍기며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따르는 헤르시아는 가시밭길을 걸어가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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