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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화. 불길한 예감 (2) (87/197)


87화. 불길한 예감 (2)
2022.03.31.


길리언을 따라간 곳은 다름 아닌 왕후궁이었다.

테라스에서 시녀들과 함께 차를 마시던 왕후는 갑작스러운 길리언의 방문에 깜짝 놀라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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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전하. 갑자기 어쩐 일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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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이가 왕후의 시녀가 되고 싶다는군요.”

길리언은 고개를 돌려 어서 네 뜻을 전하라는 듯 헤르시아를 쳐다보았고, 그녀는 막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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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후 전하. 갑작스러운 알현에 놀라게 해드려 송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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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러운 알현보다 갑자기 내 시녀가 되고 싶다는 말이 날 더 당황하게 하는군요? 어떻게 된 일이죠?”

헤르시아는 이 상황이 당황스러운 한편, 모두 공작이 알려준 대로 진행되는 것이 더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그녀는 곧 마음을 잡고 차분히 시카르가 알려준 말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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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일리안이 자리를 비운 동안 왕후를 잠시라도 곁에서 모실 수 있는 영광을 얻고 싶다고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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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말을 믿어주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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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믿을 거야 없지. 기회가 된다면 누구든 왕후를 모시고 싶어하니까.’

그녀는 시카르에게서 들은 말을 집에서도 몇 번이나 되새기며 연기하는 배우가 대본을 외듯 대사를 줄줄 외웠던 참이었다.

헤르시아는 자신이 외웠던 대사를 기억해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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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이전부터 전하께 충정을 보일 기회를 엿보았지만, 제가 들어설 자리가 보이지 않아 체념하던 차에 케일리안 님의 휴직 얘기를 듣고 지원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공작이 미리 알려주지 않았다면, 긴장해서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하고 떨었을 터였지만 헤르시아는 미리 연습을 해두었던 탓에 떨지 않고 또박또박 말할 수가 있었다.

그녀를 유심히 살피던 국왕은 그제야 그 말을 믿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왕후를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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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는군요. 헤르시아가 이토록 왕후께 충정을 보이고 싶어 한다니, 잘 숙고해 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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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습니다. 전하.”

국왕이 자리를 뜨는 동안에도 헤르시아는 허리를 펴지 않고 있었고, 왕후는 천천히 다가와 그녀의 손을 붙잡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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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직으로 임명하죠. 하지만, 케일리안의 출산휴가가 끝날 때까지만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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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공하옵니다. 전하. 충성을 다해 전하를 보필하겠습니다.”

 

***

시녀가 된 헤르시아는 공작이 알려 준 대로 출산 축하 선물과 함께 가장 먼저 케일리안을 찾았다.

그녀는 헤르시아의 방문을 탐탁지 않게 여겼지만, 진심으로 제 자리를 탐하지 않는 것을 보고는 임시직을 축하한다며 격려까지 해주었다.

왕실로 출근을 시작한 날로부터는 결코 앞으로 나서지 않고 뒤에서 조용히 시녀들을 거들며 왕후의 시중을 들었다.

그러자 처음엔 헤르시아를 경계하던 시녀들도 점점 경계를 풀었다.

결정적으로 시녀들이 헤르시아에게 경계를 풀게 된 것은 와인 때문이었다.

실수로 시녀 샤린이 와인을 들고 왕후의 뒤를 따라가다 왕후의 드레스를 적시고 말았다.

그때, 왕후가 뒤를 돌아보기 전에 헤르시아가 재빨리 샤린의 손에 들린 와인잔을 뺏어 제 손에 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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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전하. 제 실수로 전하의 드레스 자락을 망치고 말았으니 엄중한 처벌을 내려주시옵소서.”

다른 시녀였다면 한마디 했을 터였지만, 헤르시아는 국왕의 사촌 여동생인 데다 곧 하멜 백작가에 가게 될 몸이었기에 왕후는 괜찮다며 웃음으로 마무리 짓고 넘어가 주었다.

덕분에 시녀들은 헤르시아의 의리 있는 모습에 감동해서 그녀에게 마음을 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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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시아 님. 제 실수를 대신해주셔서 감사드리고 또, 죄송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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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에요. 저는 임시직이라 곧 그만둘 테지만, 샤린 님과 클레어 님께서는 계속 일을 하셔야 하는 입장이니 실수해서 좋을 게 없잖아요. 그래서 저희 셋 중 누가 혼나야 한다면 제가 혼나는 게 가장 나을 것 같았을 뿐이에요.”

샤린은 감동한 눈으로 헤르시아를 보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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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시아 님께서 의리가 있으신 분이라고 들었지만, 이렇게까지 세세하게 저희를 생각해 주고 계신지는 몰랐어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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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분께서 왕후 전하에 대한 충정이 깊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두 분께서 왕후 전하 곁을 오래오래 지켜 주신다면 전 더 바랄 게 없을 것입니다.”

시녀들은 헤르시아의 진심에 감동하며 급속도로 친해졌다. 무엇보다 국왕의 사촌 동생이니 의심할 여지도 전혀 없었던 탓에 그들은 금세 헤르시아를 정찬회에 초대했다.

물론 블레이크 공작 내외와 함께.

***

헤르시아가 잘 해낼 줄은 알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일찍 정찬회가 찾아왔다.

하녀들의 손길을 싫어하는 시카르는 스스로 자신의 카라깃을 매만지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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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보다 더 일찍 정찬회를 잡은 것을 보니 헤르시아가 생각보단 쓸만하군.”

생각 보다 쓸만하다고 말하고 있지만, 표정은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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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르. 시녀들 앞에서 그런 표정으로 말할 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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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표정이 어때서.”

그래서 나는 시카르의 올라간 눈꼬리를 내려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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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눈꼬리를 내리며 좀 더 순하게 말을 해줘야 네가 원하는 손가락이라도 잡아볼 거 아니야. 그런 험악한 눈빛으로 인사하면 누가 손을 내밀겠어.”

그러자 시카르는 내 눈꼬리를 잡아 위로 올리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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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너무 눈꼬리가 내려가 있으니 넌 좀 올려야겠군.”

그래서 우리는 각자 서로의 눈꼬리를 잡고 한쪽은 올리고 있고, 한쪽은 내리고 있는 형국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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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지지 않기 위해 최대한 서로의 눈을 찢어놓고 있는 와중에, 똑똑 노크소리가 들려 왔기에 우리는 동시에 손을 풀었다.

노크 소리 이후 방으로 들어온 사람은 안드레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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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마차를 준비해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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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았다.”

요즘 나는 할머니의 말씀을 받들어 시카르를 순하게 고쳐보려 하는 중이었고, 시카르는 길들여지지 않으려 하는 맹수처럼 발악을 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마차가 대기 중이지 않았다면 아마도 하루 종일 그렇게 대치상태로 있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왜냐면 우리는 마차에 타서도 서로의 눈꼬리를 지적하다 초대된 샤린의 집에 도착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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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봐. 그렇게 험악한 눈으로 악수를 청하면 누가 좋은 마음으로 받아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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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두려워서 손을 함부로 뺄 수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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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워서 손을 더 빨리 빼려고 하겠지. 그러니까 내 말대로 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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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대신 네 말이 틀리다면 다음에는 이런 바보 같은 눈빛으로 사람을 대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시카르가 눈꼬리를 조금 내린다고 해서 결코 바보 같은 눈빛이 되진 않았다. 아니, 딱히 순한 눈빛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눈꼬리만 내리면 뭐하냐. 시뻘건 눈빛 자체가 날카로운데.

시카르는 마차에서 내리며 나를 향해 팔 한쪽을 내밀었다. 나는 그 팔을 잡고 샤린의 저택으로 들어섰다.

샤린의 집에는 헤르시아와 왕후의 시녀인 클레어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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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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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드려요. 블레이크 공작부인. 블레이크 공작님.”

시카르를 보는 샤린의 눈빛이 꽤 조심스러웠지만, 내가 세상 순하게 웃고 있는 얼굴로 보고 있어서 그런지 금세 안심한 듯 편하게 표정을 풀었다.

시카르는 나와 샤린의 악수가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손을 내밀었다.

샤린은 그 손을 잡을지 말지 잠시 고민하는 듯 보였으나, 미소짓고 있는 시카르의 표정을 한 번 보고는 그 손을 맞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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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한 건 없지만 즐거운 정찬을 즐기고 가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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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샤린은 이제 손을 놓으려는 것처럼 보였으나, 시카르는 계속 악수를 나누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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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백작님께서 카드로 와인을 좋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샤린은 언뜻 카드로 와인 얘기에 기분 좋은 표정을 짓는 듯했으나, 이내 시무룩해져서 힘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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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하지만 지금 카드로는 해충 때문에 와인을 구하기가 힘들다고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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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게 그전에 구해둔 것들이 좀 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선물로 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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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주신다면 저야 너무나 고마운 일이죠! 공작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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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언제쯤 보내드리면 괜찮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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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든지 괜찮고 말고요!”

와중에도 시카르는 손을 붙잡고 계속 흔들었고 샤린은 얼떨결에 그 손을 잡고 계속 악수를 나누고 있었다.

그나저나, 공작저에 카드로 와인이 있었나? 카드로 와인이 하도 유명하다고 해서 나도 와인 창고에서 그것을 찾아본 적이 있었지만, 안드레아의 말로는 그런 와인은 집에 없다고 들은 것 같았다.

그러니까, 아무래도 시카르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한참을 샤린과 악수를 나누고 난 후 돌아온 시카르에게 슬쩍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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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르. 정말 공작저에 카드로 와인이 있어?”

시카르는 뭘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비소를 띄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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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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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 그런 말을 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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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야. 구하면 되니까. 카드로 농장주의 기억을 더듬으면 그깟 것쯤 찾는 건 일도 아니지.”

아. 기억을 보고 찾겠다는 거군. 시카르가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거짓말을 한 바람에 샤린은 그 말을 감쪽같이 믿고 있는 것 같았지만, 시카르의 말대로 구하면 될 일이었다.

헤르시아는 저 멀리서 클레어와 대화를 나누며 잘됐냐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자 헤르시아는 안심했다는 듯 활짝 웃어 보였다. 그래서 나는 헤르시아를 향해 엄지를 척 들어 올려 보였다.

시카르는 곧 클레어와도 인사를 나누었지만, 클레어와는 별달리 길게 대화를 나누진 않았다.

이미 샤린의 기억에서 찾고자 했던 걸 본 것인지. 클레어의 기억에 별다른 게 없었던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는 간단히 인사를 끝내고 정찬을 즐겼다.

식사가 끝난 후 차를 마시는 동안 샤린은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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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처음에 헤르시아가 블레이크 공작님 내외분을 초대하면 어떻겠냐고 먼저 제의를 했을 때 제가 두 분을 잘 몰라서 조금 망설였어요. 그런데 막상 두 분을 모시고 보니 자주 만남을 가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특히 공작님께서 이렇게 좋으신 분인지 몰랐기에 더욱 그런 생각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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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야말로 샤린 님께서 이렇게 좋으신 분이라는 걸 알게 돼서 의미 있는 정찬이었다고 생각해요. 다음에도 또 초대해 주시면 찾아뵙도록 할게요. 오늘 정찬, 정말 맛있었어요.”

우리는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끝까지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이어오다 공작저로 돌아갈 수가 있었다.

공작저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나는 시카르에게 정말 궁금했던 걸 물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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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린의 기억에서 뭘 본 거야? 뭘 봤길래 그렇게 오랫동안 악수를 나누었던 거야?”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리는 시카르의 눈빛은 매우 불길한 일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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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좋지 못한 일이 발생한 건 맞는 것 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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