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악역 사용법 (1)
(88/197)
88화. 악역 사용법 (1)
(88/197)
88화. 악역 사용법 (1)
2022.04.04.
시카르가 매우 좋지 못한 일이 발생했다고 말할 정도라면, 그건 정말이지 좋지 못한 일이었다.
“뭘 봤길래 그러는 건지 말해줘.”
“왕후가 너에게 건넨 건 독의 꽃은 아니었다.”
“그래? 그럼 그건 정말 그냥 홍차였단 거야?”
“그래. 샤린이 구해온 홍차더군.”
“그렇다면 그건 정말 순수하게 나와 잘 지내보기 위해서 준 선물이었다는 건가.”
내가 갸우뚱거리고 있자 시카르는 그렇게 생각하는 내가 귀엽다는 듯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왕후가 뭐가 아쉬워서 너와 친해지려 하겠나. 길리언이 챙겨주라고 해서 챙긴 것뿐이었지.”
어쩐지 그 고고한 왕후가 정말로 나와 친해지고 싶어 할 리가 없었겠지.
“그런데…….”
시카르는 조금 애석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이마가 아닌 내 이마를 긁적거렸다.
“뭐야. 왜 내 이마를 긁적이는 거야?!”
“네가 애석해할 것 같아서.”
무슨 말이길래 이러는 걸까. 시카르가 평소와 다르게 뜸을 들이는 것을 보면 내가 들어서 안 좋을 얘기는 맞는 것 같았다.
나는 괜찮다는 듯 심호흡을 한번 하고 말했다.
“나 들을 준비 됐으니까. 뜸들이지 말고 말해줘.”
“왕후가 독의 꽃을 헤르시아에게 먹인 것 같다.”
“그걸 어떻게 알아? 네가 본 건 샤린의 기억이잖아.”
“왕후의 명으로 독의 꽃을 구한 것이 샤린이고, 독의 꽃을 홍차처럼 타서 헤르시아에게 건넨 것도 샤린이니까.”
“그럼 샤린이 헤르시아에게 독의 꽃을 먹이고도 저렇게 친하게 지내고 있다는 거야?”
“아무래도 그래서 더 친하게 지내고 있는 것 같군.”
자신이 살해를 시도하는, 아니 살해를 시도 중인 사람과 친하게 지내고 있다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 그게 말이 돼?”
“헤르시아에게 독을 먹인 것은 왕후의 명령이니까. 명령은 그저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니 그들 입장에서는 그냥 일을 했을 뿐인 거지.”
“이해할 수가 없어. 하지만 왕후가 헤르시아는 왜 해치려는 거야?”
“알아봐야겠지만, 알아보지 않아도 짐작 가는 바가 있다.”
“어, 어떻게 짐작이 간다는 거야?”
“헤르시아가 죽고 나면 하멜 집사의 가문에 그 죄를 묻고 가산을 몰수할 생각인 것 같군.”
“뭐? 뭐라고?! 겨우 그것 때문에 사촌 여동생을 죽인단 말이야?”
“정치에서는 겨우 그거라고 말하긴 힘들지.”
“그럼 이제 어떡해. 헤르시아는 어떻게 해!”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나와는 달리 시카르는 꽤 차분해 보였다.
“아직 차를 마신 지 한 달이 지나지 않았으니 해독초를 먹이면 될 것이니 염려 마라. 독의 꽃이 몸 안에서 완전한 독이 되기까지 한 달은 넘게 걸리니 그전에 헤르시아가 죽진 않겠지.”
그제야 막혀 있던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그렇다니 정말 다행한 일이었다.
시카르는 깍지를 끼고 있는 자신의 손등 위로 턱을 괴며 말했다.
“하지만 아직 기뻐할 수 있는 건 없겠지. 또 다른 검은 눈동자의 인간을 아직 찾지 못했으니까.”
제발 이곳에 온다고 해도 길리언에 눈에 띄지 말아야 할 텐데…….
“참. 그 민가에 사람은 보내봤어?”
“그래. 검은 눈동자를 가진 인간이 도착하면 바로 잡아 올 생각이다.”
“아, 아니. 잡아 오지 말고 정중하게 모셔와 줘.”
“그건 생각을 좀 해보도록 하지.”
말을 끝낸 후 시카르는 내 주변을 한 바퀴 돌며 말했다.
“그건 그렇고 넌 너무 허약해.”
“나 그렇게 허약하지 않은데.”
시카르는 갑자기 내게 손을 뻗더니 나를 자신의 무릎 위로 앉혔다.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이런 것도 하나 못 피하잖아.”
“이걸 누가 피해?!”
“너를 제외하곤 모두들 피하겠지.”
시카르는 나를 들어 제 옆으로 앉혔다.
“잘 봐.”
그러곤 마치, 입질을 기다리는 낚시꾼처럼 현관을 주시하고 있었다.
때마침 들어온 듀리온이 지나가다 시카르의 부름을 받고 이쪽으로 걸어왔다.
“네. 공작님.”
시카르는 듀리온이 이쪽으로 걸어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그를 잡아 당기려 했지만 듀리온은 제 손을 잡으려는 시카르의 손을 간단히 피했다.
“뭐 하십니까?”
그러자, 시카르는 듀리온이 아닌 날 보며 말했다.
“봤지? 이 정도 속도는 간단히 피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인간이 생각이 있는 건가 없는 건가. 넌 대체 언제쯤 정상적인 사고를 할 생각인 거니.
“듀리온은 기사잖아. 못 피하는 게 더 이상한 거지.”
“듀리온도 날 때부터 이렇게 재빠르진 않았을 테지. 이곳에 네가 살던 세계의 사람들이 출몰하고 있으니 너도 이젠 안심할 수가 없는 몸이 됐다. 키안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알면 길리언이 결코 가만두지 않을 테니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가 없는 일이지. 내가 항상 네 곁에서 널 지킬 수 있는 상황이 못 될 수도 있으니 너도 뭐든 하나쯤은 익혀야 하겠지.”
“원하는 게 뭐야…….”
“내일부터 수련의 방으로 간다. 그래야 혹시라도 위험한 일이 생기면 조금이라도 네 몸을 지킬 수 있을 테니까.”
시카르의 표정을 보아선 아무래도 내일 꼼짝없이 수련의 방으로 갈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근데, 난 태어나서 손에 칼을 들어본 적이라곤 요리할 때 외에는 없었는데…….”
“걱정 마라. 칼을 쓸 일은 없을 테니까.”
“그럼 맨주먹으로 싸우라는 말이야?”
시카르는 다가와 내 손을 잡아 올렸다.
“당연히 이 주먹으로는 쥐새끼 한 마리도 잡지 못하겠지. 내게 고대의 매직 완드가 하나 있다. 딱히 쓸 일이 없어서 처박아둔 것이었지만 네게는 유용하겠지.”
“완드?”
완드라면, 마법사들이나 마녀들이 쓰는 마법 지팡이 같은 걸 말하는 거잖아?
“마력을 다룰 줄도 모르는 내가 완드를 쓸 수 있을까?”
시카르는 자리에 일어서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가자.”
“어딜?”
“서재로.”
서재로 간 시카르가 자신의 금고에서 꺼낸 것은 종이를 두루마리로 감은 것처럼 생긴 적당한 크기의 완드로 한 손에 들기 딱 좋아 보였다. 마치 요술봉 느낌이랄까.
시카르는 완드를 두 손으로 잡고 폈다 접었다 하며 말했다.
“이렇게 늘리면 늘어나고 이렇게 모으면 줄어들지.”
정말 신기하게도 완드는 용수철처럼 늘었다 줄었다 했다.
“이거 정말 신기한 물건이긴 하네.”
“이것이 다가 아니지. 넌 마력이 없기 때문에 완드를 사용하려면 마정수를 마셔야 한다. 그리고 정신을 집중해서 사용하고 싶은 곳에 이 완드를 휘둘러라.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완드에서 나온 마법이 널 공격할 수도 있으니 명심하고.”
“마정수를 먹어야 한다고? 그거 내가 먹어도 되는 게 맞긴 해?”
“맛은 없겠지만 비싼 거니 한 방울도 남기지 말고 먹어.”
“그걸 먹으면 내가 마법을 쓸 수 있게 되고 그런 건 아니지?”
“당연하게도 마정수를 먹는다고 마법을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다만, 이 완드를 사용할 수 있게 될 뿐이지.”
시카르는 내 손에 마정수가 한가득 들어있는 보따리를 쥐여주었다.
“항상 품에 이것을 지니고 다니고 완드를 사용할 일이 있을 땐 반드시 먹도록 해. 네가 아무 이능도 없는 일반인이라 마정수를 먹는다고 해도 효과는 3시간밖에 지속되지 않으니까. 반드시 명심하고. 알았지?”
그리하야……. 다음날부터 나는 그 무시무시하고 악명 높은 수련의 방으로 던져졌다.
***
미친놈.
내가 왜 욕부터 하냐면. 바로 시카르가 수련을 시키겠다며 내 눈앞에 드래곤을 갖다 놓았기 때문이었다.
드래곤이 너무너무 거대하고 무시무시해서 욕을 하냐고? 그건 아니었다.
드래곤이 너무 귀여워서 욕이 나오는 것이었다. 드래곤은 새끼 드래곤으로 작은 헤츨링이었다.
물론 살아 있는 것은 아니고 시뮬레이션이었지만 보고 있기만 해도 너무 귀여워서 공격을 할 수가 없었다.
시카르는 내게 완드를 쥐여주곤 이 귀여운 헤츨링을 반으로 자르라는 기함할 만한 말을 했다.
이렇게 귀여운 헤츨링을 공격하라니 제정신이 아니지. 아니고말고.
“이, 이건 너무 귀엽잖아!”
“보기엔 귀여운 그놈이 네게 불이라도 뿜게 된다면 생각이 달라질걸. 우물쭈물할 시간 없어. 그 헤츨링의 브레스에 맞으면 화상을 입진 않아도 몸이 매우 뜨겁다고 느끼게 될 테니까.”
“설마……. 이건 시뮬레이션이잖아.”
“시뮬레이션이라도 숙달되지 않으면 기억에 의해 뜨겁다고 느끼게 되거든.”
시카르는 느긋하게 앉아 잘해 보라는 듯 팔짱을 끼고 내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새끼 드래곤이 나를 향해 용트림을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들고 있던 완드를 높게 들어 올렸다.
“나 이런 거 사용해본 적이 없다고!”
와중에도 정신을 집중하라는 말이 귀에 박혀 나는 눈을 감고 완드를 높이 들고 이리저리 휘둘렀다.
한참을 휘두르다 조용한 정적 속에서 눈을 뜨니 시카르와 그 작은 헤츨링이 앉아서 내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뭐, 뭐야……?”
“그렇게 눈을 감고 싸우는 사람이 어딨지? 이게 실전이면 넌 방금 불타 죽었다.”
“네가! 수련을 시켜준다고 해놓고서는 이 완드 하나만 달랑 쥐여줘서 그렇잖아!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준다면서 바다에 빠트리는 것과 뭐가 다르냐고!”
“원래 수영을 가르쳐 주기 전에는 바다에 한 번 빠트려 보는 법이지.”
“그럼, 방금은 워밍업이었다는 거야?”
시카르는 조금은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런 셈이지. 이제 완드를 제대로 휘두르는 법부터 알려주지.”
출정을 다녀오더니 아무래도 말투가 성격이 예전으로 돌아간 게 분명했다.
“줄게라고 말해줘.”
시카르는 아차 하는 얼굴로 나를 보고선 이내 말을 정정했다.
“줄게. 그럼 다시 시작한다.”
“할게라고 말해줘.”
“……할게.”
시카르가 고분고분하게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도 않았다.
말과는 다르게 그 말투는 상당히 냉소적이었으니까.
곧이어 시카르가 핑거스냅을 튕기자 눈앞에 있던 귀여운 헤츨링은 사라져 버렸다.
그래도 귀여웠는데 사라지니 조금 아쉬운데.
시카르는 내 손을 잡아 완드를 다시 꽉 쥐여주며 말했다.
“이 완드에 그 어떤 커다란 마법을 부리게 하는 능력이 있거나 하진 않지만, 이것으로 상대를 감전시킬 수는 있지.”
“일종의 전기충격파 같은 건가?”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좀 더 강하다고 볼 수 있지. 이건 사정거리도 매우 멀고, 정통으로 맞는다면 최소 몇 분은 덜덜 떨게 될 테니까. 위험한 상황에서 네가 도망갈 시간을 벌어주게는 할 수 있다.”
나는 손에 들고 있는 완드를 이리저리 살폈다.
“이 작은 완드에서 그런 마법이 나간다니 놀라워.”
“하지만 잘못 휘두르면 네가 감전되니 조심해야겠지. 그러니 네가 익혀야 할 것은 완드를 안전하게 휘두르는 방법과 마력이 네가 원하는 방향으로 잘 나가게 하는 것이다.”
시카르는 쉽게 말하고 있었지만, 내가 마정수를 먹고 요술봉. 아니, 매직 완드를 들고 있다고 해도 그게 내 마음처럼 쉬운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완드의 쓰임새에 대해 좀 더 정확하게 알려줄 수는 없어?”
“그렇겠군. 내가 말로 하는 것보다 어떤 기능이 있는지 눈으로 직접 보는 게 낫겠지.”
시카르는 완드에 어떤 기능이 있는지 보여줄 테니 잘 보라며 마정수를 한 잔 마시더니, 듀리온을 불러내었다.
“부르셨습니까. 공작님.”
시카르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싱글싱글 웃으며 걸어오는 듀리온을 향해 완드를 휘둘렀다.
파지직!
아무것도 모르고 천진난만한 얼굴로 들어오던 듀리온은 시카르가 휘두른 완드에 그대로 감전되었다.
“으어어어…….”
완드가 발사한 라이트닝에 맞은 듀리온은 말도 못하고 바닥에 누워 경미한 경련을 일으키며 ‘으어어어’만 거리고 있었다.
나는 놀라 뛰쳐나가 듀리온을 불렀다.
“듀리온! 듀리온! 괜찮아요?!”
시카르는 그런 나를 느긋하게 팔짱을 끼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차피 지금 말을 걸어봤자 소용없다. 듀리온은 당분간 ‘으어어어’ 밖엔 못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