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악역 사용법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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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화. 악역 사용법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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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화. 악역 사용법 (3)
2022.04.11.
아무리 봐도 병 주고 약 주는 것 같아 보이긴 했지만, 어쨌든 키안은 자신이 태워 먹은 시카르의 머리카락을 다시 원상 복귀 시켜주었다.
그래서인지 시카르는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앞으로는 좀 더 조심하는 게 좋겠군.”
키안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미소지었다.
“다음엔 실수하지 않게 더 주의하죠.”
누가 봐도 실수라고 보이진 않는 상황이었지만 머리카락을 원상 복귀 시켜준 까닭인지 시카르는 코웃음을 한 번 칠뿐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키안이 보란 듯 불정령을 날린 까닭에 시카르의 태도는 매우 친절해졌다.
그러니까, 시카르는 내가 엉뚱한 곳을 맞춰도 대충 칭찬을 하고 있었다.
“칭찬합니다. 부인.”
그렇게 시카르의 아무 의미도 영혼도 없는 칭찬 속에서도 계속 연습하다 보니 조금씩 나아지는 것 같았다.
마정수의 효력이 끝날 시간까지 연습을 하던 중 헤르시아가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고 저택으로 이동했다.
때마침 정오였기에 우리는 식사를 같이한 후 차를 마셨다.
차를 마시기전 시카르는 지금 헤르시아에게 해독제가 든 차를 줄 테니 끝까지 잘 마시는지 지켜보란 말도 했다.
‘조금이라도 남기면 안 되니 꼭 잘 지켜봐.’
나는 시카르의 당부대로 헤르시아에게 차를 다 마실 것을 권유했다. 독의 꽃을 해독하는 해독제는 몸에 독한 것이어서 두 세번 마시는 건 좋지 않기 때문에 한 번에 반드시 정량을 지켜야 한다고 했다.
헤르시아는 차 맛이 쓴지 인상을 조금 쓰며 중간에 내려놓았다.
“음……. 근데, 차가 매우 쓴 것 같아요.”
“몸에 좋은 차가 쓰단 말처럼 피부에 좋은 차도 쓰다고 하더군요. 이 차가 피부에 좋다고 하니 쭉 들이켜세요. 쭉.”
“정말 피부에 좋아요?”
“네. 거뭇한 피부도 희게 만들어서 눈가에 있는 짙은 기미도 옅어지게 하고 주근깨에도 좋다는군요.”
“어머. 그래요?”
그거야 나도 잘 모른다. 그냥 그녀가 끝까지 먹게 하려고 한 말일 뿐. 그래서 나는 코코넛 오일을 조금 챙겨서 같이 건네주었다.
“이것도 매일 밤 얼굴에 발라주면 피부가 좋아진다고 해요.”
헤르시아는 피부에 뭘 하지 않아도 좋을 만큼 고운 피부였지만, 매우 만족해하며 내가 건네준 것들은 받았다.
“공작부인의 피부 비결이 이거였군요?!”
나는 옅은 미소를 지어준 뒤 헤르시아에게 조심히 물었다.
“왕후 전하의 시녀분들과는 사이가 어때요.”
“전하의 시녀분들께서 모두 성품이 좋으셔서 잘 지내고 있어요.”
성품이 좋다라…….
내가 보기에도 겉보기에는 하나같이 성품이 좋아 보이긴 했었다.
샤린이 저에게 독을 먹인 것을 알면 얼마나 놀랄까. 아마 세상에 믿을 사람 없다고 생각하겠지.
“일전에 제가 만나봤을 때도 모두 좋은 분들 같았어요.”
“가끔 다른 시녀분들을 대할 때는 무서워 보이기도 한데, 그래도 저한테는 잘 대해주시는 거 같아요.”
그건 헤르시아가 국왕의 사촌 여동생인 것도 있겠지만, 그녀가 잘해줬던 탓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자신들이 찔려서일 수도 있겠고.
“참, 왕후 전하께서 곧 티파니를 연다고 해요. 근데 그때, 하멜 백작님께서도 오신다는 거 있죠?”
헤르시아는 상당히 불만이라는 얼굴로 말하고 있었다.
그녀도 알고 있겠지. 일부러 그런 자리를 만든 거라는 걸.
“헤르시아 님을 하멜 백작에게 시집보내기 전에 하멜 백작과 얼굴을 먼저 익혀두게 하기 위해서 만드는 자리겠군요.”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대놓고 너를 이 집안에 팔아 버리겠다라고는 할 수 없으니 그날 안면을 익히고 나면, 그다음에 하멜 백작이 어떻더냐고 물어 오겠지.
너무 속이 뻔히 보이는 자리였다.
“헤르시아. 속상하겠지만, 결코 티를 내선 안 돼요. 아셨죠?”
헤르시아는 제 신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듯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속내를 비치는 순간 헤르시아가 다른 마음을 먹지 못하게 결혼을 더 서두를 거예요.”
나는 그런 그녀가 안쓰러워서 그 손을 꼭 잡아 주었다.
“너무 걱정 마세요. 정말 다 잘될 거예요. 공작님이 잘된다고 하시면 다 잘 되는 거예요.”
맥이 빠져 축 늘어져 있던 헤르시아가 고개를 들어 간절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렇겠죠? 공작님께서는 폐왕도 몰아내신 분이시니 제게 분명히 도움을 주시겠죠?”
나도 시카르가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그가 도와주겠다고 했다면 반드시 도와줄 것이다. 그는 확신이 없는 걸 약속하는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나는 그녀를 보고 생긋 웃어주며 말했다.
“다 잘될 거예요.”
헤르시아는 이제야 조금 안심이 된다는 듯 깊이 탄식했다.
“다 잘 될 거라는 공작부인의 말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 줄 몰라요. 아니, 공작부인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면 정말 다 잘 될 것만 같아요.”
“그때까지 왕후 전화와 더불어 시녀분들과도 사이좋게 지내주세요. 그리고 특이 사항이 있다면 반드시 공작님께 알려주시고요.”
“당연하죠. 안 그래도 아론이 그 사실을 알고 국왕 전하께 깊은 반감을 느끼고 있거든요. 그리고 아론이 그러는데요…….”
헤르시아는 엄청난 비밀을 얘기하듯 내게 다가와 속삭였다.
“잠적하신 베로니아 공주님께 아들이 있고, 국왕 전하께서 한때 왕족의 문장이 박힌 아이를 찾아다녔다고 해요.”
그 왕손이 키안이라는 것을 알면 헤르시아가 까무러치겠는데?
하지만, 나는 전혀 금시초문이라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어머. 정말이요?”
“네. 공작부인께서도 놀라셨죠? 저도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어요. 지금 국왕 전하를 지지하지 않는 세력이 많은 데다 적통자인 베로니아 공주님도 엄청난 위협이 될 텐데 왕손 저하까지 계시다면, 전하께서 왕좌를 지키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할 것 같거든요. 제 생각엔 그래서 저를 더 이용하려고 하시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구요.”
원작에서는 왕족의 문장이 새겨진 아이의 시신을 보고 의심을 거두었지만, 이번에는 나 뿐 아니라, 내가 있던 세계의 사람들이 이곳에 오기 시작했으니 무슨 변수가 생겨도 생기지 않을 수가 없겠지.
그나마 시카르를 의심하지 않는 것은 내가 헤르시아와 잘 지내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원작에서 처럼 시카르가 폐왕의 잔당을 물리침으로써 길리언의 가장 큰 골치거리 하나가 사라진 것도 있을 테고.
하지만 온전히 충정을 받치지 않는 시카르를 완전히 신뢰하는 것도 아닐 테지.
어쨌든 우리는 현재 길리언을 지지하는 세력인데다 헤르시아 역시도 표면적으로는 길리언의 사람이었기에 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듯 기겁을 하며 말했다.
“당연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헤르시아는 정말 걱정이라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공작부인의 말씀대로 되겠죠?”
“그럼요.”
“그런데 아론은 현 왕실에 불만이 많은 것 같아요. 그래서 자꾸만 왕손 저하를 찾아야 한다는 말이나 하고…….”
헤르시아는 거기까지 말하고 깜짝 놀란 듯 제 입을 틀어막았다.
“어머. 제가 지금 무슨 소리를…….”
“괜찮아요. 그럴 수 있는 걸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게요.”
“공작부인께서 너무 자상하시다보니 제가 간혹 말을 못 가리는 것 같아요.”
“저를 편하게 생각해줘서 고마워요. 헤르시아. 공작님께서 출정 가 있는 동안 헤르시아가 아니었다면 전 정말 외로웠을 거거든요.”
“저도요. 공작부인께서 안 계셨다면 저도 정말 외로웠을 거예요. 그리고 도움을 청할 곳도 없었을 거예요.”
나는 이때다 싶어서 그녀에게 차를 한 잔 더 권했다.
“그럼 우리 차 한잔 더 할까요?”
헤르시아는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좋죠!”
***
헤르시아가 가고 난 후 나는 또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티파니라니. 이번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올지. 또 내게 광장공포증이 오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으니까.
시카르에게 연회 피타피를 하자 그는 가장 먼저 내 걱정을 알아차렸다.
“광장공포증 때문에 걱정인가 보군.”
“혹시나 거기서 기절할까봐 걱정이 되긴 해.”
“안 그래도 약을 한 번 알아봤다. 이곳에서도 네 세계에서 먹는 약과 비슷한 것이 있긴 하더군. 물론 약에 의지하는 건 좋지 않지만, 필요하다면 쓸 수밖에 없겠지.”
그건 정말 뜻밖의 얘기였기에 나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래? 여기서도 그런 약이 있어?”
“그래. 여기도 있더군. 심지어 부작용까지도 똑같으니 연회 때 되도록 샴폐인이나 와인 같은 건 마시지 말도록 해.”
그런 약이 있다니 정말 다행이었다. 이제 한시름 놓겠는데.
간혹 시카르가 내 기억을 보는 게 부담스럽긴 했지만, 그래도 내가 말하지 않아도 이런 것까지 알아서 미리 다 챙겨주니 너무 든든했다.
이러니 내가 의지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덕분에 마음 놓고 잘 수 있을 것 같아. 쿠마마.”
오랜만에 쿠마마라고 말하자 시카르의 얼굴이 오랜만에 붉어졌다.
“그 엘프어를 또 쓰는군.”
“네가 좋아하는 것 같길래.”
“이건 좋아하는 게 아니라 민망해하는 것이다.”
“아. 그래? 네가 민망해하는 감정도 느끼는 줄 몰랐어.”
시카르는 내가 놀린 게 기분이 나빴는지 내 손을 잡아 끌어당기며 나를 침대에 눕혔다.
그의 코가 내 코에 닿기 직전까지 그는 얼굴을 밀고 들어왔다.
“넌 이런 것만 민망한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이 미친놈이 또 이러네.
나는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그, 그런 게 아니라. 일단 비켜.”
“내가 민망해하는 걸 네가 즐기는 것 같아서 나도 네가 민망해하는 걸 한번 즐겨보려고.”
“즐긴 게 아니고 고마워서 한 말이었어. 네가 쿠마마라는 말을 좋아하는 것 같아서.”
“그 말의 뜻이 뭔지는 알고 있겠지? 내 영혼을 가져라.”
시카르는 ‘내 영혼을 가져라’라고 자기가 말해놓고도 얼굴이 붉게 변했다. 아무래도 영혼을 가지란 말이 그에게는 무척 야하게 들리는 건 아니었을까.
“알고 있어. 알고 있는데 왜…….”
“그럼 차라리 네 영혼을 내게 주든가. 너도 봤겠지? 내가 비카와 어떻게 맹약을 했는지. 네가 원한다면 맹약어를 걸어주지. 네가 내게 영혼을 주는 조건으로.”
“그럴 일은 없을 거야. 그러니까 이제 저리 비켜. 나 자야 하니까 이제 그만 네 방 가서 자.”
하지만, 시카르는 요지부동으로 조금도 비켜서 주지 않고 말했다.
“오늘은 이 방에서 잘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