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악녀가 체질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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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화. 악녀가 체질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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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화. 악녀가 체질 (1)
2022.04.18.
“유라는 네가 그렇게 함부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다크엘프 중에서도 인간에 대한 예우를 갖추는 엘프가 있는가 하면, 그러지 않는 엘프도 있었다.
비카가 바로 후자에 해당하는 다크 엘프였다.
“내게 너희 인간들의 예우를 강요하지마. 내가 마님이라고 불러주는 것만도 원래의 나라면 가당치도 않은 일이니까.”
비카의 당연한 반응에 시카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생각하겠지. 하지만, 유라가 단순히 그냥 인간이 아니라면?”
“다른 차원에서 왔고 미래를 보는 특별한 인간이라는 건 나도 알고 있지만, 그래봤자, 그게 다일 뿐이지.”
“아니. 유라는 네 목숨을 구해준 인간이지.”
지금까지 제 목숨이 위태로웠던 적이라곤 시카르에게 목숨을 빚진 일밖에 없었다.
그런데, 목숨을 구해줬다니. 비카는 그 말에 선뜻 동의할 수가 없었다.
“난 널 만난 이후로 목숨의 위협을 느낄 일이 없었는데?”
“네 목숨이 위태롭기도 전에 유라가 네 목숨을 구했으니까.”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유라가 내다본 미래가 틀린 적이 없다는 걸 너도 알고 있겠지.”
비카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거렸다.
“그럼 설마…….”
“유라가 네 죽을 운명을 바꾸었지.”
“그게…… 정말이야?”
“그런 걸로 내가 거짓말할 이유가 있나?”
“하지만 공작은 필요할 때 거짓말도 서슴없이 하는데 그걸 나더러 믿으라고?”
“내가 내 가족을 두고 거짓말하는 걸 본 적 없을 텐데.”
비카는 시카르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말을 믿는다고 말하기에도 왠지 자존심이 상하는 기분이었다.
비카는 괜히 툴툴거리며 말했다.
“아내가 그렇게 대단한 존재인가? 거짓말도 하기 싫을 만큼?”
“무슨 말인지 모르겠으면 너도 결혼이라는 것을 해봐라. 네 신랑 되는 작자가 네게 어떻게 하는지.”
잠자코 듣고 있던 비카는 더는 못 들어주겠다는 듯 목에 핏대를 세웠다.
“미쳤어?! 신랑, 뭐? 징그러운 소리 하지 마!”
“네가 내 특수한 상황을 이해 못 하는 것 같길래.”
“결혼하니까 그렇게 좋아? 아주 마님 마님. 노래를 부르는군.”
“꼭 유라 때문만은 아니다. 키안…….”
“뭐?”
“키안은 친부를 잃었지만, 아직 제 친모를 찾을 희망은 있다. 키안에게서 그 희망을 지켜주고 싶다. 이 세상 어딘가에 그 아이를 낳아준 피붙이가 있다는 것을. 그 사실을 잊지 않고 살 수 있다는 것만도 큰 힘이 되겠지.”
“공작도 이젠 시시해졌군. 말랑말랑해서 재미없어졌어. 뭐, 도련님의 심신이 건강해지면 좋긴 하겠지. 공작의 저주를 풀만큼 더 강해질 테니 우리의 맹약도 더 빨리 끝을 볼 수 있겠지. 하지만, 이번만이야. 다른 사람을 위해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그런 일에 난 동참하지 못해! 마님께서 내 목숨을 한 번 구해줬다고 하니까. 나도 이번 한 번만 봐주는 거야. 명심해. 알았어?”
“기억하지.”
“반드시 그래야 할 거야. 아님 맹약이고 뭐고 널 죽여버릴 테니까.”
비카의 운명을 같이하는 맹약이었기에 시카르가 죽게 된다면 비카도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비카의 말은 시카르도 죽이고 저도 죽겠다는 말과 같았다.
“날 죽이는 일이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전에 듀리온이 어서 베로니아를 찾아내길 바라는 게 낫겠지.”
“그 둔한 곰 같은 놈이 언제 찾을 줄 알고.”
“성격이 동글동글해서 둔해 보이지만, 사람을 찾는 일은 파인더들만큼이나 빠른 놈이지.”
“파인더들이 들으면 억울할 소리네.”
비카는 피곤하다는 듯 하품을 하며 말했다.
“나 당분간은 새벽에 들어올 것 같으니까. 그렇게 알아. 마님이 악몽을 꿔도 난 모르겠으니까 네가 지켜주든지 말든지.”
시카르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고단할 테니 이만 올라가지.”
***
허리를 감싸오는 부드러운 손길과…….
목덜미에 닿는 뜨거운 숨결…….
뭔가 이것은…… 누군가 나를 뒤에서 끌어안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
그러고 보니 어제도 시카르가 여기서 잠이 들었다는 것이 떠올랐다.
번쩍 눈을 떠보니 아니나, 다를까. 사카르가 나를 등 뒤에서 곤히 안고 있었다.
요즘 비카가 밤에 집을 비우는 일이 빈번해졌다는 이유로 매일 같이 내 방에서 잠을 청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다 이런 일이 일어난 건가.
“너, 너. 손만 잡고 자라고 했지!”
등 뒤로부터 나른하고도 심드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다 보면 손도 잡고 발도 잡고 하는 거지.”
“내 허리가 발은 아닐 테니까 이 손 좀 치워줄래?”
시카르는 고분고분 내 허리 위에 올려두었던 손을 치웠다.
나를 따라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선 시카르의 헝클어진 머리카락 때문인지 셔츠 사이로 보이는 그의 우락부락한 가슴 근육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깨어난 그는 매우 섹시해 보였다.
“이상하게 너와 있으면 늦잠을 자는 것 같단 말이지. 티파티에 늦지 않으려면 서둘러야겠어.”
내 악몽을 보겠다고 제대로 잠을 못 자니까 늦잠을 자는 거겠지.
시카르의 말대로 오늘은 티파티가 있는 날이었기에 서둘러 채비를 해야 했다.
***
시카르가 준 약이 효험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되지 않아서 나는 파티장에 들어갈 때까지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약효가 좋은 건지 파티장에 생각보다 사람이 많지 않아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다행으로 나는 나도 놀랄 만큼 꽤 멀쩡했다.
시카르도 만족스러웠던 모양인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약발이 잘 받는 것 같기도 한데 좀 더 확인해볼까?”
“확인?”
“내 손을 잡고 사람들 앞으로 나서보면 알겠지.”
“사람들 앞이라면…….”
시카르가 보고 있는 곳에는 온갖 귀족들이 모여 차를 즐기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역시 약을 먹었다고 해도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건 무리가 있었다.
“난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건 질색이야.”
“그래. 그런 건 천천히 해도 되니까. 그것보다…… 하멜 백작의 기억을 좀 봤더니, 다행히 구린 구석이 많더군. 여인들에게 추근거리는 게 예사인 놈이니 헤르시아에게 내가 말한 대로 처신하도록 일러라.”
“추근거리는 게 예사라니, 저질이잖아?”
“순진한 헤르시아를 말 몇 마디로 울리고도 남을 놈이지. 그러니 각오 단단히 하라고 일러라.”
“하멜 백작이 대체 어떤 놈이길래 그래?”
“그놈은…….”
하멜 백작은 운송업을 하며, 마약 및 각종 법으로 금지한 물건은 모두 밀매하고 있는 데다, 어린 소녀들 및 여자들도 사고팔고 했다.
겉으로는 품위 있는 백작처럼 보이지만 그 속은 능구렁이 같은 놈이니 헤르시아를 손안에 쥐고 갖고 놀 놈이었다.
나는 시카르가 다른 귀족들과 얘기를 나누는 동안, 왕후에게 먼저 인사를 드리고 난 후 헤르시아를 만나 하멜 백작에 대해 처신해야 할 바를 얘기해주었다.
내 말을 들은 헤르시아는 그야말로 소름 끼친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하멜 백작이 그런 사람이에요?”
“네. 공작님께서 알아본 바로는 하멜 백작은 천하의 둘도 없는 저질 같은 놈이라고 해요. 헤르시아 님께 이상한 말을 할지도 모른다고 하니 반드시 처세를 잘하도록 하세요. 절대 기죽지 말고요.”
헤르시아는 심각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이 여려서 남에게 싫은 소리 한 번 못하는 데다 누가 뭐라고 하면 놀라서 말까지 더듬는 성격이니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난감하겠지.
그래서 나는 그녀가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조금 더 힘을 실어주었다.
“영애께서 하멜 백작을 좀 더 강하게 밀어붙인다면, 이 결혼이 생각보다 더 쉽게 무산될 수도 있어요.”
“정말 그게 가능할까요?”
“그럼요. 당연하죠. 하멜 백작이 스스로 찔려서 이 결혼을 엎을 수도 있겠죠.”
헤르시아는 굳게 결심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제가 강하게 하멜 백작을 궁지로 몰아볼게요!”
제법 단단하게 마음을 먹은 것 같은데. 제발 저 의지를 끝까지 잘 지켜가야 할 텐데.
“건승을 빌어요. 헤르시아. ”
***
헤르시아는 왕후에게 하멜 백작을 소개받는 동안 공작부인의 말을 떠올렸다.
‘하멜 백작을 잘 몰아붙인다면 이 결혼을 더 쉽게 무산시킬 수도 있을 거예요.’
쉽지만은 않을 테지만, 그동안 자신을 도와준 블레이크가에 조금 덜 민폐를 끼칠 수 있는 방법이 그것이라면 더 용기를 내야만 했다.
그 대상 뒤에 아무리 국왕이 버티고 있더라도.
“오랜만이군요. 하멜 백작.”
사람을 아래로 내려보는 듯한 왕후 다이엔느의 미소는 서늘했다.
“안녕하십니까. 왕후 전하. 전하께서는 마치 어제 뵌 것처럼 여전히 아름다우십니다.”
왕후는 하멜의 듣기 좋은 아부에도 좋아하지 않았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에 기분이 좋기는커녕 추행이라도 당한 듯 찝찝한 기분만 들었다.
헤르시아와의 혼인만 아니라면 당장이라도 한마디 했을 테지만, 지금은 그를 우호적으로 대했다. 그를 벌 주게 될 날은 머지않아 곧 다가오게 될 테니까.
왕후는 이미 헤르시아를 힐끔거리며 보고 있는 하멜 백작에게 그녀를 소개했다.
“인사하죠. 여긴 헤르시아 모비아트 영애입니다. 전하의 사촌 여동생이시죠.”
이미 이 자리에서 헤르시아를 만날 것을 알고 있었던 하멜 백작은 마치 생각도 못 했다는 듯 놀란 표정이었다.
“말로만 듣던 헤르시아 영애님을 직접 뵙게 돼 덧없는 영광입니다.”
속내를 잘 감추지 못하는 헤르시아는 하멜의 능글맞은 표정에 인상을 찌푸렸다가 왕후의 눈치를 살피곤 표정을 풀었다.
“저도…… 영광입니다. 하멜 백작님.”
“이런, 어떡하죠. 전 자리를 좀 비켜야 할 것 같은데.”
하멜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그리하시죠. 왕후 전하.”
왕후는 헤르시아를 슬쩍 쳐다본 후 하멜 백작을 스쳐 지나가며 말했다.
“그럼, 하멜 백작. 나중에 댄스 타임에 보도록 하죠.
“믿어만 주십시오. 전하.”
왕후가 자리를 떠나자마자 하멜 백작은 곧장 본색을 드러냈다.
“헤르시아 님의 나이가 어린 줄 알았는데 생각보단 많으시더군요?”
노골적으로 능글맞은 미소를 짓는 하멜을 보자, 헤르시아는 뭐라고 대꾸하고 싶어도 머리가 새하얘지는 것 같았다.
“결혼 시장에서는 드문드문 팔리는 나이니, 헐값에 팔려가지 않으려면 하루라도 빨리 성을 옮기는 게 좋겠죠.”
성을 옮긴다는 것은 하루라도 빨리 결혼을 하는 게 좋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헤르시아는 당장이라도 자리를 뜨고 싶은 것을 억누르며 찻잔을 들었다.
공작부인에게 들었던 말을 지금 해야 할 때였다.
그런데 공작부인에게 들었던 말들이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자신을 상품처럼 대하는 하멜 백작에게 뭐라고 해야 하는데, 그 말을 하지 못해서 부르르 떨고 있는데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공작부인이 서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하멜 백작.”
반갑지 않은 공작부인의 등장에 하멜 백작은 입안이 쓴 것을 느끼며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공작부인.”
“안녕하기가 힘들 것 같군요. 하멜 백작에게 구린내가 너무 많이 나서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