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악녀가 체질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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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화. 악녀가 체질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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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화. 악녀가 체질 (3)
2022.04.25.
“이런, 발을 헛디뎠군요. 고마워요. 공작님.”
“별말씀을요. 전하께서 다치지 않아 다행입니다.”
이제 볼일이 끝났으니 왕후의 손을 놓겠지 싶었는데 시카르는 왕후에게 춤 신청을 하고 있었다.
“전하. 저와 춤추시겠습니까.”
그리고 왕후는 거절하지 않았다.
“블레이크 공작에게 춤 신청을 받다니. 영광이군요. 그럼 한 곡 출까요?”
왕후의 기억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해 춤 신청을 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왠지 속이 불편했다.
그래서 나는 아침에 들었던 말을 까먹고 말았다.
‘이 약의 부작용이 같아. 그러니 샴페인과 와인 따위는 먹지 말 것.’
하지만 나는 이 말을 까먹고 지나가는 하인이 들고 가던 와인을 낚아채 벌컥벌컥 들이켰다.
몇 잔을 더 마시고 있으니 비카가 다가와 와인 잔을 낚아챘다.
“그만 드시는 게 좋겠어요. 마님.”
“아, 비카 님…… 전 그냥 목이 타서…….”
비카는 내게서 낚아챈 와인을 벌컥벌컥 들이키고 나서 말했다.
“공작이 왕후와 춤을 추고 있는데 목이 타겠죠. 저도 썩 기분이 좋진 않거든요.”
“비카 님께서는 왜……?”
비카도 설마 질투를 하는 건가?
내 표정을 보고 내 심증을 알아차린 비카는 그건 아니라는 듯 정색했다.
“무슨 상상을 하는 거죠? 나는, 공작이 저런 여우 같은 왕후와 춤을 추고 있는 게 못마땅하다는 말이었다고요. 왕후는 우리의 적이니까요,”
“아. 그 말씀이셨군요.”
“공작은 저한테 은인이자 원수일 뿐이라고요. 이 맹약이 깨지고 나면 공작부터 죽여버릴 거거든요. 그러니 괜한 오해는 하지 마시죠?”
내 앞에서 공작을 죽이겠다는 말을 어떻게 저렇게 거침없이 하는지.
평소의 나라면 그저 웃었겠지만, 지금의 나는 와인을 마신 바람에 제대로 약발을 받은 상태였다.
“비카 님.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에요? 맹약은 공작이 목숨은 살려준 대가로 한 건데, 너무 공작 탓만 하는 거 아니냐고요.”
“……네에?”
“어차피 시카르가 아니었으면 죽을 목숨 구해줬는데 너무 심한 거 아니냐 이 말이에요.”
나는 언성을 높이진 않았지만, 또박또박 할 말을 다 하고 있었다. 그것도 눈을 부리부리 뜨고 노려보면서.
보통 사람들이면 기막혀했을 수도 있겠지만, 비카는 그저 나를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지금 술주정하시는 겁니까? 겨우 와인 몇 잔에?”
“제 말이 틀린 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비카 님?”
“틀리지 않지.”
뒷말은 시카르였다. 시카르는 무표정한 얼굴로 걸어와 내 옆으로 섰다.
“술을 마시면 안 된다고 이른 것 같은데?”
“목이 말라서 마셨어.”
비카는 우리를 보고 서 있다가 툴툴거리며 말했다.
“좋겠군. 공작. 마님이 이젠 네 편을 다 들어주니 말이야.”
그러곤 곧장 재수 없다는 얼굴로 자리를 떠났다. 시카르는 기분이 좋았던지 히죽거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비카가 내 욕하는 게 그렇게 싫었나?”
“아니? 난 그냥 내가 생각해서 맞다고 생각한 말을 했을 뿐이야.”
“술을 마신 건 잘못했지만, 자기 남편 욕하는 걸 못 들어주는 그 행동은 아주 칭찬 받을 만하군.”
“너한테 칭찬받으려고 한 말 아니야.”
“많이 화났나 보군.”
“내가 화낼 이유가 뭐가 있어. 난 전혀 화 안 났어.”
시카르는 내 손을 잡고 무대가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뭐 하는 거야.”
“우리도 춤춰야지.”
“난 별로 춤추고 싶지 않은데.”
“헤르시아도 우릴 부르고 있는데?”
무대 쪽을 보자, 아론과 함께 춤을 추고 있는 헤르시아가 보였다. 헤르시아는 나를 보며 어서 오라는 듯 손을 흔들고 있었다.
“친구가 오라고 손짓하는데 외면하는 건 네가 말하는 예의가 아니니 어서 가볼까.”
내가 뭐라고 대답도 하기 전에, 시카르는 곧장 내 허리를 붙잡으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와 춤추는 게 익숙했던지 오랜만에 함께 춤을 추는데도 전혀 어색하지가 않았다.
춤을 추며 가장 중요한 것은 두 눈을 계속 마주 보는 것이었다. 처음엔 시카르와 시선을 계속 주고받는 것이 무서웠고, 그다음엔 민망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약발을 받은 탓에 전혀 아무렇지 않았고, 나는 그렇게 느꼈는데 시카르가 보기에 나는 그것보다 살짝 맛이 간 듯 보이는 모양이었다.
“제대로 약에 취한 것 같군. 눈동자의 초점이 풀렸어.”
“졸린 모양이지, 뭐.”
“졸린 것치고는 팔 힘도 좋고 다리 힘도 좋군.”
“네 힘이 좋은 거야.”
시카르는 피식 웃으며 내 허리를 더 세게 잡아당겼다.
“아무래도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군.”
“졸려서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야.”
“그래? 내가 왕후와 춤을 춰서 그런 게 아니라면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건가?”
“그래. 안 써도 돼. 나는 아-무렇지 않으니까.”
“아무렇지 않다고 해서 하는 말인데, 편지 말이야. 쓰고 싶었는데 정말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갑자기 편지 얘기를 하는 바람에 나는 조금 당황했다.
“갑자기 편지 얘기는 왜 하는 거야?”
“네가 내 편지를 많이 기다렸던 것 같아서.”
“편지를 기다린 게 아니라…….”
“그럼, 날 기다린 건가?”
“그것도 아니고…….”
“어차피 내가 살아 돌아올 건 뻔히 알고 있었을 테니 내 생사가 궁금했던 건 아닐 테고, 내 소식이 많이 궁금했던 모양이군. 앞으론 어딜 가든 연락 잘하도록 하지.”
나는 대답하지 않고 시선을 돌렸다. 알아서 하라는 뜻과도 같았다.
시카르는 그거론 내가 만족하지 못한다고 느꼈는지 한 번 더 말했다.
“아주 지겹도록 연락하도록 하지.”
한 번 내뱉은 말은 지키는 성격이니 정말로 지겹도록 연락하고도 남을 위인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
“그건 사양할게.”
“네 허락은 필요 없다. 내가 한다면 하는 거니까.”
대놓고 집착할 거라고 통보하는 것처럼 들렸지만, 아닐 수도 있었다.
평소에 나라면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겠지만, 지금의 나는 약발을 제대로 받은 상태였다.
그래서 나는 맨정신이라면 하지 못할 얘기를 했다.
“집착하면 죽-어.”
술에 취했어도 아마 절대 하지 않았을 말일 것 같았다.
나는 지극히 맨정신에 시카르를 똑바로 쳐다보며 이런 말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 당돌한 협박에 시카르는 한쪽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역시 넌, 사악한 악녀 체질이라니까.”
“네가 뭘 모르는 것 같은데, 악녀는 이렇게 말로 안 해.”
“말로 안 하면?”
나는 씨익 웃으며 시카르의 발을 발로 밟았다. 그것도 있는 힘을 다해서 힘껏!
그래놓고 매우 천진난만하게 실수인 척 미안한 기색을 보였다.
“어이쿠, 이런 실수를!”
발을 밟힌 시카르는 조금 인상을 찌푸리긴 했지만, 꽤 아파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실수가 아닌 것 같은데?”
“내 말 끝까지 들어. 악녀는 이렇게 실수인 척 발을 밟아 줄 거라는 거야.”
시카르는 발이 안 아픈 건지, 아니면 뭐가 재미있는 건지 피식거리며 웃었다.
“너도 뭘 모르는 것 같은데, 보통은 이렇게 쉽게 발을 밟혀주지 않겠지.”
“일부러 밟혀줬다는 얘기야? 왜?”
“네가 악녀가 되는 걸 지지한다는 표현이라고 해두지. 다음엔 하멜 백작의 발을 이렇게 밟아 주도록.”
“설마 다음에 하멜 백작을 볼 일이 있을까?”
“물론 있을 것이다. 겨우 네 협박 하나로 이 결혼이 무산되진 않을 테니까.”
춤을 꽤 오래 춰서인지, 시카르의 발을 밟아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동안 나는 약발이 어느 정도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약발이 떨어지고 나니, 시카르가 왕후에게서 무엇을 봤는지 궁금해서 입이 근질거렸다.
춤이 끝나고 헤르시아는 차를 한 잔 더 하자고 했지만, 나는 아쉬워하는 헤르시아에게 다음을 기약하며 작별을 고했다.
***
마차에 오르자마자 시카르는 내가 무엇을 궁금해할지 알고 있었다.
“왕후에게서 무엇을 봤는지 어지간히 궁금한가 보군.”
“별 게 없었다면, 네가 왕후와 춤까지 추진 않았을 테니까. 무슨 일이야?”
시카르는 잠시 생각하더니 내키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다행히 다이엔느 왕후가 정치에 상당히 관심이 많더군. 길리언의 얘기를 엿듣기 좋아하고 라페에게 보고 받길 좋아해서 알아낼 수 있는 게 많았지.”
라페는 길리언의 정령사로 왕후 다이엔느의 오빠였다.
레이독스가 현 국왕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국왕이 감시자를 붙였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전 수상한 장면을 목격했는데, 그것이 바로 한서연이었다.
레이독스의 후작저를 감시하던 감시병들은, 그 집에서 나오는 서연을 보고 왕후에게 그 사실을 보고했다.
요즘 왕후는 국왕이 자신의 오빠가 아닌 파시움을 더 신뢰하는 것을 보고 검은 눈의 인간을 찾아낸 공을 온전히 제 오빠인 라페에게 돌리고자 했다.
그래서 감시병들을 고문한 뒤 죽인 것이었다. 비카가 발견한 사내가 바로 그 감시병 중 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 뒤로 검은 눈의 사람들을 찾고 있다는 얘기야?”
시카르는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더 곤란한 건 그게 아닌 것 같다.”
“그럼?”
“베로니아 공주가 북부가 있다.”
“북부? 북부 어디를 말하는 거야?”
“북부를 몽땅 뒤져봐야 알겠지. 다이엔느 왕후도 아는 거라곤 그게 전부인 것 같으니까.”
국왕이 한서연의 존재도 알고 베로니아도 숨긴 탓에 일이 복잡하게 돼 버렸다.
아니, 베로니아가 위험하거나 한서연이 위험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레이독스가 현 국왕에게 적대감을 표출하고 있는 상황이니까.
“혹시 레이독스가 국왕과 잘 지내게 되고 내가 한서연과 자매 사이라고 하면 일이 무마될 수 있을까?”
시카르는 더 큰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되면, 나와 레이독스의 관계가 깊다는 의미가 될 테고 국왕은 다시 키안을 의심하게 될지도 모르지. 일단, 내일은 후작저에 가봐야겠다.”
레이독스에게 주의를 주기 위해 가는 것인 듯했다.
그때 괜히 공작저로 부르지 않았다면 서연의 존재가 노출되지 않았을까.
“그럼 이제 키안도 후작저로 보내면 안 되겠어.”
“아니. 우리는 하던 대로 할 것이다.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척 다시 평범한 일상을 보내야겠지. 그리고 난 북부에 좀 다녀오겠다.”
“베로니아 공주님을 직접 찾으러 갈 생각이야?”
“베로니아가 북부에 있고 동양인들이 나타난다는 걸 아는 이상, 듀리온에게만 맡길 수가 없다. 사람들의 기억을 보고 찾는 게 훨씬 빠를 테니까.”
또 떠난다니 조금 서운했지만, 사안이 사안인지라 나는 시카르에게 결코 서운한 티를 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매우 편한 얼굴로 말했다.
“고생해.”
“아직 안 간다.”
“미리 잘 다녀오라고 하는 인사야.”
“그럼 미리 재회의 인사 같은 건 없나?”
“미리 재회의 인사?”
“내가 다녀왔을 때 할 인사를 지금 미리 할 수는 없냐고.”
이 미친놈이 또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다.
“그 인사를 왜 지금 해.”
“너도 작별인사를 지금 했으니까.”
“그거야 곧, 떠나니까 한 거지.”
“나도 곧 다시 올 것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궤변을 하면서.
“재회의 인사라면 어떤 걸 원하는 거야?”
“이런 거.”
시카르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내게 입을 맞추었다.
내가 와인을 마셔서일까, 그도 와인을 마신 것일까. 달콤한 포도주 향이 은은하게 풍겨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