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악마의 손짓 (1)
(97/197)
97화. 악마의 손짓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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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화. 악마의 손짓 (1)
2022.05.05.
레이독스는 후작저 서재에 앉아 급하게 날라온 초대장을 보고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초대장의 내용이 좋지 않았다.
시카르에게 어서 빨리 초대장 내용을 알리기 위해 걸음을 서두르던 레이독스는 다정하게 손을 잡고 걸어오는 공작 부부와 마주쳤다.
“항상 두 분이 손을 꼭 잡고 다니신다고 들었는데, 실제로 마주하니 정말 보기 좋아 보이십니다.”
“까부는군.”
레이독스가 놀린 게 아니라 인간적으로 변화하는 시카르의 모습이 좋아 보이는 것을 그렇게 표현했다는 것을 유라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잡고 있던 시카르의 손을 놓으며 잔잔하게 웃었다.
“후작님, 좋은 말씀 감사드려요.”
“저야말로 감사드립니다. 공작부인.”
시카르는 유라가 놓은 손을 아쉬운 얼굴로 잠시 보고는 서늘한 시선으로 레이독스를 노려보았다.
“넌 대체 여기서 뭐 하는 거지. 내가 오늘 네 쌍둥이들의 무례를 몇 번이나 봐주었는지 알고 있나?”
“죄송합니다. 단단히 주의를 주도록 하겠…….”
“됐다. 네 쌍둥이들이 네 말을 얼마나 안 듣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니, 애초에 그런 지키지도 못할 약속은 하지 않는 게 좋겠지.”
툴툴거리며 말을 하긴 했지만, 정말 싫어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레이독스도 그 모습을 간파하고 조용히 피식거리며 웃었다.
“참, 제게 초대장이 하나 도착했는데, 왕실에서 온 것이었습니다.”
초대장이 왔다는 말에는 심드렁하던 시카르였지만 그 출저가 왕실이라는 것을 듣자 날카롭게 두 눈을 번뜩였다.
“왕실?”
“네. 그렇습니다.”
“네 표정을 보니 좋은 내용은 아닌 것 같군.”
“내일 왕실 후원에서 열리는 검투 경기를 보러 오라고 하시더군요. 초대장에 의하면 참여 귀족 중에 공작님 내외분도 계십니다.”
“공작저에 도착하면 내게도 초대장이 도착해 있을 거라는 말이군.”
“그럴 것 같습니다.”
레이독스의 말대로 불편한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왕이 기거하는 태양궁 후원에는 작은 투기장이 있었다. 그것은 폐왕이 집권할 당시 만든 것으로 처음엔 투견으로 시작해서 종국에는 귀족들을 투기 붙이는 짓까지 서슴없이 하던 곳이었다.
“듣기로는 요즘 거기서 죄수들을 투기시키고 있다던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레이독스는 말을 하면서도 유라의 눈치를 슬그머니 살폈다. 그 말은 공작부인이 그런 것을 보게 될 텐데 괜찮겠냐고 묻는 것과 같았다.
유라는 레이독스가 자신의 눈치를 보자 주변을 둘러보곤 벤치에 앉아 있을 테니 얘기를 나누라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레이독스는 그런 유라를 보며 고맙다는 듯 묵례를 했다.
“공작부인께서는 참 배려가 깊으십니다.”
“겉으론 순해 보여도 매우 눈치가 빠른 사람이지.”
“공작님께서 복이 많으신 분입니다.”
시카르는 하마터면 레이독스를 보고 웃어줄 뻔했다가 다시 표정을 굳혔다.
“초대장에 무슨 투기인지는 안 적혀 있었나?”
“적혀 있지는 않았지만, 요즘 국왕께서 죄수들의 투기경기를 즐겨 보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자리에 나와 내 아내를 초청했다는 말이지.”
“제가 보기에 공작부인께서는 사내들의 투기경기를 좋아하시지 않을 것 같은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죄수들의 투기경기라면 죽을 때까지 서로 싸우는 것을 감상하는 것을 말할 것이다.
죄수들을 싸움 붙여놓고 이기는 상대는 석방을 시키거나 감옥에서 조금 더 편히 지낼 수 있게 요구 조건을 들어준다.
그러다 보니 죄수들은 한쪽이 죽을 때까지 싸우거나, 죽을힘을 다해 싸운다.
그러니 경기의 현장이 참혹하고 잔인했다. 시카르는 레이독스가 그것을 걱정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본인 자신도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왕이 부른 자리에서 인상을 찌푸리고 있을 수도 없고, 눈을 가리고 있을 수도 없으니 여러모로 입장이 곤란했다.
두 남자는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시카르는 자신과 함께 동시에 한숨을 내쉬는 레이독스을 노려보았다.
“내가 한숨 쉴 때 따라서 한숨 쉬지 마라. 난 너와 친해 보이기 싫으니까.”
제가 알던 공작이라면, 친해 보여서가 아니라, 버릇이 없다는 이유로 한숨을 따라 쉬지 말라고 했을 사람이었다.
친해 보인다고 말한 것은 이미 친해 보인다는 것을 인정하는 말과 같아서 레이독스는 잔잔한 웃음이 나왔다.
“알겠습니다.”
그 순간, 시카르는 불현듯 어떤 정보 하나가 떠올랐다.
일명 고개약이라 불리는 일루전 마정수.
보따리 상인들은 밤에 산을 넘어가야 하는 일이 많은데, 그럴 땐 같은 고개를 넘어가야 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단체로 이동한다.
하지만, 이때 상인들 중 겁이 많은 사람은 작은 불빛만 봐도 비명을 지르거나 해서 되레 몬스터에게 위치를 노출 시키는 사고를 치는 등의 일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하곤 했다.
이때 일루전 마정수를 먹게 되면 밤도 덜 어둡게 보이고, 괴물도 조금은 덜 징그러워 보이기 때문에 겁을 덜 먹어서 쓸데없이 비명을 지르거나 해서 다른 몬스터를 끌어들이는 어리석은 짓을 덜 하게 된다.
그래서 밤 중에 산을 넘기 위해 먹는 약이라고 해서 사람들은 일루전 마정수를 고개약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일루전이라는 마법이란 원래, 마법사들이 전투를 할 때 상대방을 방심하게 만들기 위해 쓰거나 겁을 주기 위해 쓰는 것이었다.
헌데, 전장에서 생김새가 무서운 몬스터 때문에 싸우기도 전에 겁을 먹고 이탈하는 병사들이 한둘이 아니자, 이들의 사기를 돋우고 용기를 주기 위해 만든 것이 일루전 마정수였다.
그리고 이것은 여러 방면에서 꽤 유용하게 쓰였다.
하지만 제대로 된 일루전 마정수는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나마 제일 구하기 쉬운 방법은 상인들을 통해서였는데, 상인들 사이에 떠도는 마정수는 암거래를 통해 제작되는 게 많았다.
자격이 안 되는 초급 마법사들도 돈을 벌겠다고 너도나도 만들어서 암거래로 파는 바람에 부작용이 많거나 효과가 엉망인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가령 괴물이 과하게 귀여워 보인다던가, 손에 들고 있는 칼도 국자로 보인다던가 피가 예쁜 별처럼 반짝이게 보이게 한다던가 등등이었다.
어쩌면 지금 유라에게 필요한 것이야말로 그, 짝퉁 일루전 마정수일지도 몰랐다.
“좋은 생각이 났다. 고개약을 구해야겠군.”
“고개약이요……?”
“그래. 왕이 부른 자리니 참석하지 않을 수도 없고, 아내가 투기경기를 보면 기절을 할 것 같으니 그 약이 필요할 것 같다. 혹시 어디서 구하는지 알고 있나?”
“상인 길드를 통해서라면 구할 수 있겠지만, 내일 당장 써야 하는 약을 지금 구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 문제는 확답을 드릴 수가 없군요.”
“그렇군.”
“파시움 님이라면 쉽게 구하실 듯합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녀석은 국왕의 사람이라 접근이 용이하지가 않다. 거기다 내가 그 약을 구하는 것을 알면 길리언에게 조르르 가서 이르겠지. 죽일 놈.”
레이독스는 다시 머리를 조아렸고 시카르도 다시 고민에 잠겼다.
벤치에 앉아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유라는 두 사람이 꽤 친해졌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의 모습은 마치 같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는 것처럼 사이좋아 보였으니까.
“상인 길드를 찾아가 봐야겠다.”
일이 제대로 안 풀리면 집에 못 올 수도 있었다. 집에 듀리온도 없고 비카도 없기 때문에 시카르는 유라를 집에 혼자 둘 수가 없었다.
후작저에서 신세를 질 수도 있겠지만 유라가 악몽을 꾸는 것도 걱정이었다.
아무래도 제 곁에 있어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시카르는 오늘 하루만 키안을 레이독스에게 맡긴 후 유라와 함께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물론 유라는 내켜 하지 않았지만.
“내가 같이 가야 한다고?”
“그래.”
레이독스는 둘의 사이가 다정한 친구 사이 같다고 느꼈다.
간혹 공작 부부가 격식 없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먼발치에서만 보다가 이렇게 가까이서 뵈니 더 보기가 좋았다.
“레이독스.”
“네. 공작님.”
“기사 제복 좀 구해올 수 있겠나?”
“기사 제복이라면…… 아내가 생전에 입던 옷들이 있습니다.”
레이독스의 아내는 기사 가문 출신으로 검과 활을 모두 다 잘 다루는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였다.
지금은 그 능력을 쌍둥이가 하나씩 나눠 가진 상태였다.
“그거라도 괜찮다면 제공하겠습니다.”
유라는 그것은 큰 실례라고 생각해서 거절하려고 했지만 레이독스는 흐뭇한 얼굴로 반겼다.
“아내가 입던 수백 가지 옷 중 하나일 뿐이니 부담 갖지 않으셔도 됩니다. 체형도 비슷하니 옷도 꼭 맞을 것 같습니다.”
레이독스는 말을 끝내며 하녀들을 향해 눈을 찡긋거렸다.
“어서. 갈아입으시지요.”
하녀들은 어리둥절해하는 유라의 팔을 양쪽에서 끌어 잡으며 방 안으로 끌고 들어가 옷을 갈아입혔다.
팔짱을 끼고 서 있던 시카르는 마음에 든다는 듯 흐뭇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이때 레이독스는 손뼉을 마주치자는 듯 손바닥을 내밀었다가 다시 시카르의 눈총을 받았다.
잠시 후. 기사 제복으로 갈아입고 나온 유라의 모습은 꽤 멋있었다.
포니테일로 질끈 묶은 머리를 찰랑거리며 걸어오는 유라의 모습은 누가 봐도 용맹한 기사 같았다.
“아주 잘 어울리는군.”
“우리가 없는 동안 키안을 잘 돌보도록.”
“알겠습니다. 공작님.”
***
나는 내 손을 꽉 움켜쥐고 있는 시카르의 손을, 그러니까 그의 손과 내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말은 지금 사안이 위험하니 내 손을 꽉 잡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내 보기엔 이보다 평온할 수가 없을 것 같은데.
시카르를 따라온 상인 길드에서는 시카르를 알아보자마자 귀빈룸으로 우리를 안내하며 극진히 모셨다.
이런 극진한 대접을 받으면서도 시카르는 위험하니 손을 꼭 잡고 있으라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내가 보기엔 이 상황이 위험하기보단 그의 심리 상태가 나를 잘 보호하고 있어야 한다는 강박을 느끼는 것 같았다.
오히려 위험한 건 우리 앞에 서 있는 저 상인 길드 마스터 같았다.
그는 한참 물품을 뒤지고 오더니 난처한 얼굴로 걸어왔다.
“죄송해서 어떡하죠. 손님. 남아 있는 물품이 모두 소진된 것 같습니다.”
“그럼 가서 구해 와.”
시카르가 단호한 만큼 상인 길드 마스터는 어쩔 줄 모르겠다는 초조한 기색이었다.
“지금 시간이 그렇게 뚝딱 물품을 구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니라서…… 그게 구하기 쉬운 물건도 아니다 보니까…….”
“그 물건을 산 놈들은 다시 잡아 와라. 걸어 다니는 상인놈 하나 못 잡아 오진 않겠지.”
“손님의 말씀처럼 상인들이 걸어 다니다 보니 더 잡기가 힘듭니다…….”
“나와 지금 말장난하자는 건가?”
“저희도 상인이니까요.”
“상인은 상인의 편이라 이거군.”
“그런 게 아니라…… 보따리 상인들은 비싼 마차를 이용할 수가 없으니 걸어 다닙니다. 그렇다 보니 빨리 지나갈 수 있는 산길을 다니지요. 아시다시피 산으로는 마차가 달릴 수는 없습니다.”
“말을 타고 갔다 오면 되겠군.”
“상인들의 말은 도둑들의 말과는 달리 낮을 달리기 때문에, 밤길을 달릴 말이 없습니다. 손님.
시카르가 아무리 겁박을 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이제 그만하라는 듯 시카르의 손을 꽉 움켜잡고 상인을 향해 물었다.
“그럼, 상인들이 넘어간 산길은 어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