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8화. 악마의 손짓 (2) (98/197)


98화. 악마의 손짓 (2)
2022.05.09.


시카르의 말은 도둑들의 말이 아님에도 어둑해진 산길을 잘 달리고 있었다.

나는 완전히 승마에 서툴렀기에 시카르의 앞에 앉아 말고삐를 쥐고 있었지만, 사실상 나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이 말고삐가 아니라 뒤에서 나를 안고 있는 시카르의 손이었다.

말을 타고 어느 정도 달린 후에야 시카르는 말을 멈추었다.

16549794683218.png

“이제 여기서부터는 걸어가야겠다. 상인들이 놀라서 도망갈지도 모르니까.”

말에서 내린 우리는 상인을 찾아 숲길을 걸었다. 여기 와서 처음…… 아니, 한밤중에 산길을 걷는 건 처음이었다.

불빛 하나 없이 오로지 달빛 하나에 의존해서 걸어야 하는 어둑어둑한 산길이 스산하게만 느껴졌다.

상인들이 산길을 건너기 위해 왜 그런 약을 먹는지 이해가 될 만큼이었다.

차라리 눈을 뜨고 걷는 것보다 감고 걷는 게 나을 만큼 컴컴한 산길은 뭐가 갑자기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너무 겁을 먹다 보니 나는 나도 모르게 시카르의 팔에 매미처럼 붙게 되었다.

16549794683218.png

“둘만 있다고 너무 애정표현이 과하군.”

아니, 그게 아니라 무서워서 그러는……. 됐다. 내가 뭐라고 해봤자 어차피 또, 자기 좋을 대로 듣겠지.

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다. 조금 있다가 시카르는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16549794683218.png

“참, 너 어두운 거 무서워하지. 차라리 눈을 감고 가지? 아니면 내가 업히든가. 아니, 업히는 게 낫겠군.”

16549794683233.png

“업히면 등 뒤가 무서워서 안 돼.”

16549794683218.png

“그럼 내가 뒤에서 안고 가는 건 어때?”

16549794683233.png

“그럼 이상하게 걷게 되잖아.”

그러자, 시카르는 마치 나를 아이처럼 대하듯. 내 양팔 아래를 잡더니 자신의 두 발 위에 내 두 발을 올렸다.

16549794683218.png

“이건 어때? 생각보다 안 불편하지?”

이건 진짜…… 정말이지. 기막히게 덜 무섭긴 한데…….

근데 어찌 자세가 민망했다. 누가 보면…… 하긴 볼 사람도 없겠지만. 어쨌든 누가 보면 얼마나 웃길까.

16549794683233.png

“근데 너 발 안 아파?”

16549794683218.png

“내가 시타르 족인 걸 잊었나? 네 그 작은 발 정도 올린다고 해도 아무렇지도 않지. 네 이 작은 몸집은 두말할 것도 없고.”

16549794683233.png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16549794683218.png

“이제는 쉿.”

16549794683233.png

“응?”

16549794683218.png

“상인들은 몬스터의 습격을 피하기 위해 불을 켜고 다니지 않는다. 오직 소리만으로 찾아야 하기 때문에 조용히 걸어야 찾을 수가 있다.”

그렇지. 우리가 조용히 있어야 남의 말소리도 들리는 거니까.

시카르와 그렇게 다정하게 걷고 있다 보니 어디서 미세하게 작은 속삭임이 들려왔다.

시카르는 내 귓가에 대고 입김을 뿜어가며 말했다.

16549794683218.png

“너도 들었지. 이 소리.”

16549794683233.png

“응.”

16549794683218.png

“아무래도 이쪽인 것 같군.”

시카르는 내 허리를 꽉 잡고 조금 더 빨리 걸었지만, 이 민망한 자세를 풀지는 않았다.

16549794683233.png

“저기. 시카르. 사람들이 우리가 이러고 있는 걸 보면 아주 웃길…….”

어떻게 이런 자세로 이렇게 빨리 잘 걸을 수 있는지 의아할 만큼, 시카르는 숙달된 사람처럼 점점 빠르게 걸으면서도 발소리 하나 없이 사뿐사뿐 걸어갔다.

그래서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우리는 상인들과 마주했다.

상인은 눈대중으로 대충 봐도 다섯 명 정도였는데 그들은 처음 우리를 보고 경계한 듯 손에 있는 몽둥이를 움켜쥐었다가 시카르의 발을 밟고 올라서 있는 나를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어쩌면 미친 커플로 오해한 건 아니겠지?

16549794683218.png

“여기 있었군.”

그 와중에 나는 시카르에게 이제 괜찮으니 내 허리를 좀 놓지 않겠냐고 속삭이고 있었지만, 그의 관심은 내가 아닌 상인들에게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다니. 아, 민망해라.

상인들은 시카르의 낮고 무거운 목소리에 놀란 듯 경계하는 자세를 취했다.

16549794711282.jpg

“누구십니까.”

16549794711282.jpg

“우리를 쫓아오신 겁니까?”

16549794683218.png

“여기 고개약을 사간 자가 누구지?”

16549794711282.jpg

“그, 그건 왜 물으시는 거요.”

16549794683218.png

“말을 더듬는 것을 보니, 네 놈인 것 같군.”

말을 더듬었던 사람은 들켜서 깜짝 놀란 듯 침을 꼴깍 삼켰다.

시카르는 참으로 오랜만에 허리에서 칼을 꺼내 남자를 향해 겨누며 말했다.

16549794739676.png

 

16549794683218.png

“그 약을 내게 팔아라.”

이 인간이 또, 칼 꺼내 들고 거래하네.

한 사람을 교육하기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나는 또 한 번 느끼며 내 허리를 꽉 붙잡고 있는 시카르의 손을 치웠다.

그리고 칼을 들고 있는 시카르의 팔 위로 손을 올렸다.

16549794683233.png

“칼 내려.”

16549794683218.png

“내가 해결하겠다.”

16549794683233.png

“칼로 해결할 게 있고 말로 해결해야 할 게 있는 거야. 그러니까 칼 내려.”

미심쩍은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시카르를 보니, 아무래도 고집을 한 번에 꺾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동안 조용히 익힌 시카르 조련법에 시동을 걸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시카르를 보며 애교를 부리듯 활짝 웃으며 시카르의 볼을 손으로 매만지며 말했다.

16549794683233.png

“내가 할게.”

어두워서 시카르의 볼이 붉어졌는지, 아닌지.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시카르의 얼굴이 뜨거워졌다는 것이다.

시카르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곧장 칼을 내렸다.

16549794683218.png

“그래.”

그리고는 상인들을 보며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16549794683218.png

“대답 잘하도록 해라. 알겠나?”

상인들은 대답하진 않았지만, 그들의 자세는 아직도 두려움에 떨고 있는 듯 어정쩡했다.

16549794683233.png

“겁 먹지 말아라. 우리는 고개약이라는 것이 필요해서 너희들을 따라왔으니까.”

16549794711282.jpg

“저희도 그, 고개약이 필요해서 구한 것입니다.”

16549794683233.png

“우리에게 팔면 아주 후한 값을 쳐주겠다.”

유난히 눈에 띄게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는 상인이 옆에 서 있는 상인의 눈치를 보자, 그가 고개를 끄떡이며 내게 당돌한 자세를 취했다.

16549794711282.jpg

“저희도 고개를 건너려면 그것이 꼭 필요합니다. 돈은 또 벌 수 있지만, 부탁한 물건을 제때 전달하지 못하면 앞으로 거래하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밤중에도 이 무서운 산을 넘어가려는 것입니다.”

16549794683233.png

“그 약을 주면 마차를 주겠다.”

16549794711282.jpg

“하지만, 마차로는 산을 넘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마차를 몰 수 있는 마부도 없습니다.”

16549794683233.png

“마차로는 도로를 달리면 되겠지. 물론 마부도 빌려줄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 그 마차를 끌고 다니려면 너희가 직접 마차 모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상인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웅성웅성거리다가 나를 쳐다보았다.

16549794711282.jpg

“마, 마차만 주시는 겁니까? 아니면, 혹시 말도 주시는 것입니까?”

시카르가 팔짱을 끼며 턱을 치켜들었다. 그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씰룩거렸다.

16549794683218.png

“마차도 주고 돈도 주지.”

상인들은 한 사람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16549794711282.jpg

“자네. 운 좋군.”

16549794711282.jpg

“우리가 늘 겁쟁이라고 놀렸는데 이제 보니 복쟁이였군.”

16549794711282.jpg

“이제 마차가 있으면 이런 고개를 안 넘어도 되니까 그 약도 필요 없겠어.”

16549794711282.jpg

“이제 더 돈 많이 벌게.”

상인들은 정말 기쁜 일이라는 듯 고개약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우리를 향해 밀었다.

16549794711282.jpg

“축하하네.”

등을 떠밀려 온 남자는 얼떨떨한 눈으로 우리를 봤다가 고개를 돌리며 그들을 불러 세웠다.

16549794711282.jpg

“잠깐만!”

그러곤 우리를 향해 절박한 눈빛으로 두 손을 모았다.

16549794711282.jpg

“마차에 저 사람들을 같이 태우는 건 안 됩니까?”

16549794683218.png

“사람은 탈 수 있겠지만 짐을 싣는 건 무리다.”

씁쓸하게 떠나려던 상인들은 잠시 기대에 찬 표정을 짓다가 다시 실망한 듯 어깨를 늘어트렸다.

그 실망한 표정들을 보니 나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16549794683233.png

“안 될 거 있나? 짐을 마차 지붕에 실으면 되잖아?”

시카르는 그거 좋은 생각이라는 듯 나를 쳐다보았고, 실망했던 상인들은 다시 웃음을 찾았다.

우리는 걸어서 하산을 시작했다. 어차피 산의 초입을 막 지났던 터라 내려오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산에 들어갈 때는 시카르와 단둘뿐이라 그런지 많이 무서웠지만 내려올 때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해서 그런지 덜 무서웠다.

우리는 왁자하게 수다를 떨며 내려왔다. 내 손을 잡고 앞서 걷던 시카르는 잠시 멈춰서 상인들을 기다려주며 말을 걸기 시작했다.

16549794683218.png

“보따리 상인들이 이 산을 이렇게 걸어서 이동하는 건가?”

16549794711282.jpg

“네. 이곳이 지름길이다 보니까. 그게 빠릅니다.”

16549794683218.png

“그래? 그럼 여기 도로를 뚫으면 마차도 달리고 더 빨리 갈 수 있겠군.”

16549794711282.jpg

“하지만, 마차가 비싸서 어차피 상인들이 이용하기가 힘들 겁니다.”

16549794683218.png

“이곳에 길을 뚫는다면 마차로 이동하는데 소요되는 시간도 적을 테고, 사람을 많이 싣고 달릴 수 있는 마차라면, 지금보다는 더 많이 저렴해지겠지.”

16549794711282.jpg

“그건 그럴 것 같기도 합니다.”

16549794683218.png

“여기 몬스터 출몰이 잦나?”

16549794711282.jpg

“그런 건 아니지만 여기 고개에 뱀파이어가 나타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16549794683218.png

“그건 아마 헛소문일 것이다. 본디 무서운 곳에서는 헛소문이 많이 도는 법이니까.”

16549794711282.jpg

“정말입니까? 그렇다면 그동안 고개약을 괜히 먹었던 모양입니다.”

16549794683218.png

“덕분에 우리가 그 약을 구할 수 있었으니 우리에겐 좋은 일이었지.”

시카르의 말대로 저 상인이 없었다면 나는 내일 그 끔찍한 투기경기를 필터 없이 봐야 했겠지.

권투 경기조차도 못 보는 내 입장에서는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16549794683233.png

“자넨 이름이 뭔가.”

내 물음에 상인은 쑥스러운 듯 제 볼을 긁으며 말했다.

16549794711282.jpg

“이름은 터커. 나이는 23세입니다.”

16549794683233.png

“기억하지. 마정수. 고마웠다.”

16549794711282.jpg

“저야말로 감사드립니다. 저를 죽이고 마정수를 빼앗아 가셨을 수도 있는데 저를 살려주셨지 않습니까.”

그 말에 나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목숨을 빼앗고 물건을 가져간다니. 그건 범죄다.

16549794683233.png

“기사들 중에 그런 기사가 있나?”

16549794711282.jpg

“네?”

16549794683233.png

“기사들 중에 상인들의 목숨을 빼앗고 물건을 갈취해가는 자들 말이다.”

16549794711282.jpg

“네. 당연히 있습니다. 기사님.”

나는 곧장 시카르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시카르는 미간을 찌푸리며 터커의 팔을 붙잡았다.

당황한 터커가 팔을 빼려고 해서 나는 시카르가 붙잡고 있는 팔을 손으로 지그시 눌렀다.

16549794683233.png

“놀라지 마라. 이게 이 분의 친근함의 표시니까.”

그러자 터커는 이제야 이해를 했다는 듯 낮게 탄식했다.

16549794711282.jpg

“아.”

시카르는 뭔가 꺼림칙한 표정을 짓고는 터커의 팔을 놓았다. 나는 그가 본 기억이 궁금했지만, 일단은 꾹 참았다.

우리는 하산을 하고 난 후 마차에 짐을 실었다. 상인들이 마차 지붕에 짐을 싣는 걸 힘들어하자, 시카르가 짐을 잡고 마차 지붕 위로 붕붕 던져 올렸다.

상인들은 턱이 빠질 듯이 입을 쩍쩍 벌리기 시작했다.

16549794711282.jpg

“와아…….”

16549794711282.jpg

“허…….”

16549794711282.jpg

“우와…….”

등등의 탄식이 들려왔다.

16549794711282.jpg

“기사님께서는 정말 힘이 장사시군요.”

16549794711282.jpg

“시타르 족이 힘이 그렇게 세다는데…….”

16549794711282.jpg

“시타르 족은 모두 죽고 블레이크 가문만 살아남았다고 하지 않나. 저 기사님이 블레이크 공작님일 리는 없잖아.”

16549794711282.jpg

“하긴 기사님들은 워낙 힘이 장사들이시니까.”

시카르가 그, 블레이크 가문 사람이라는 것을 알면 어떤 표정을 지으려나.

터커는 떠나기 전 조심스럽게 나를 보며 말했다.

16549794711282.jpg

“저희 할머니께서 한 번도 마차를 타본 적이 없으신데, 기사님이 베풀어주신 은혜 덕분에 저희 할머니가 마차를 타게 생겼어요. 정말 감사해요. 기사님.”

16549794683233.png

“그거 참 잘 되었구나.”

16549794711282.jpg

“저, 죄송하지만 가기 전에 기사님의 존함을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16549794683233.png

“다음에 만나게 되면 그때 가르쳐주겠다. 또 인연이 된다면 또 보겠지.”

우리는 상인들을 돌려보내며 모든 것이 잘 해결되었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 터커를 다시 만나기 전까지는.

16549794909342.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