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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화. 악마의 손짓 (3) (99/197)


99화. 악마의 손짓 (3)
2022.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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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후작저에 도착해서 키안을 데려올까 하다가, 어차피 내일까지는 공작저를 비워야 하는 데다, 레이독스도 내일은 입궁을 해야 했기에 둘이서만 공작저로 들어왔다.

그리고 들어오자마자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피곤한 몸으로 그대로 침대로 뻗었다.

와중에도 시카르는 씻고 잠옷까지 다 갈아입은 것 같았지만, 나는 그렇게 체력이 좋지 못했다.

다음 날까지도 시체처럼 잠이 들어 있던 나는 커튼을 치는 소리와 함께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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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입궁할 시간이라 더는 자게 못 두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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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맞아. 우리 가야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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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어서 준비해.”

일어나 나갈 준비를 하다 보니 정신이 좀 드는 것 같았다.

오늘은 투기경기를 보는 것이니만큼 머리를 차분하게 뒤로 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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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고마워. 메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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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히 다녀오세요. 마님!”

준비를 모두 끝내고 마차에 오르며 나는 시카르에게 어제 미처 묻지 못한 질문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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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그 터커라는 상인에게서 뭘 봤길래 표정이 그랬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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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온 가족이 다 몰살당하고 나처럼 가족이라곤 할머니 한 명뿐이더군. 그 할머니 때문에 상인 일을 하고 있었다.”

몰살을 당했다니. 그래서 그렇게 겁이 많아진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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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마차도 얻었으니 그 할머니와 잘 살았으면 좋겠군.”

시카르의 입에서 할머니와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말이 나오다니.

아주 더디지만, 조금씩 그가 점점 인간적으로 변하는 것을 보며 나는 묘하게 반가웠다.

내가 웃자 그도 살짝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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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보니 웃을 때가 예쁘군. 날 보고 웃을 때 말이야.”

그러니까, 앞으로는 웃을 때 자기만 보고 웃으라는 거지? 괜히 그렇게 말해놓고 본인 스스로 민망한지 그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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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정수는 언제 먹는 게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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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급 마법사들이 만든 것이라 효과가 짧을 수도 있으니 경기가 시작할 때 먹는 게 좋겠지.”

초대장을 보니, 오늘 많은 인원이 모이는 건 아니라서 나는 굳이 다른 약은 먹지 않았다.

조금씩 극복해가는 것도 나쁘진 않을 테니까.

시카르와 궁에 들어서자 시종은 우리를 보고 곧장 후원으로 안내했다.

후원에는 품격 있어 보이는 왕실 의자가 동그랗게 놓여 있고, 중앙으로는 씨름판처럼 보이는 작은 원형경기장이 보였다.

시종은 우리 이름이 적힌 자리에 우리를 안내했다.

시카르의 자리는 국왕의 바로 옆자리였다.

세상에서 가장 불편한 자리!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건 나뿐일 테지만.

국왕을 전혀 불편해하지 않는 시카르를 보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절로…… 아니지. 시카르 자체도 악마가 울고 갈 놈이긴 하지.

국왕 내외를 기다리는 동안 불안한 걸 보니, 그냥 약을 먹고 올 걸 싶었다.

시카르는 내 그런 모습을 뻔히 보더니 손바닥을 폈다. 그의 손바닥 안에는 알약이 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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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약이었다. 우황청심환처럼 마음을 편안하게 해줘서 내 광장공포증을 없애주는 마법의 알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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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먹어. 술만 안 마시면 정량을 지킨다면 아무 문제 없으니까.”

시카르는 뒤에 서 있는 시종에게 물을 받아 내게 건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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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그래서 나는 그가 챙겨준 약을 받아먹었다.

생각해보면 이런 내 모습을 이해해주는 사람은 시카르가 처음이었다.

가족도 친구도 아무도 내 이런 상태를 이해해주는 사람도, 이해하려 드는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런 내 모습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약을 꼬박꼬박 먹고 살았었다.

여기 와서 약을 먹지 않고도 버틸 수 있었던 건 모두 시카르 덕분이었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내 상태를 알고 먼저 배려해준 덕분에.

내게 약을 챙겨줘서가 아니라 시카르를 다시 보니, 악마도 울고 갈 반전매력의 소유자……. 정신 차리자.

곧 있으니, 레이독스도 후원으로 들어섰다. 우리는 말하지 않고 서로를 향해 고개짓 만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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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 전하. 왕후 전하께서 들어오십니다.”

우리가 한꺼번에 일어서 고개를 살짝 내리고 있자, 국왕 부부는 얼굴을 하나하나 보며 눈짓으로 인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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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 자리에들 앉으세요.”

국왕은 자리에 앉으며 나를 슬쩍 쳐다보았다. 그 기분 나쁜 시선에 나는 더욱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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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왕후와는 자주 보셨다죠? 공작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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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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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인과는 오랜만에 뵙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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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가 부르시면 언제든 찾아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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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군요. 제가 국정을 돌보느라 바빠 공작부인을 부르지 못했군요. 앞으론 자주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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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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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볼만한 경기를 많이 준비했으니 재미있게 보다 가십시오. 공작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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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겠습니다.”

그 기분 나쁜 웃음에 등골이 섬뜩해지는 느낌이었다.

시카르를 저런 사람에게 빗대었다니. 혼자서 괜히 그에게 미안했다.

시종들이 건네주는 음료를 마시고 있으니 경기장으로 손이 뒤로 묶이고 두건을 쓴 사내들이 끌려 들어왔다.

그것만 봐도 나는 이미 벌써 인상이 찌푸려졌다.

사내들은 모두 바지만 입고 상체는 탈의한 상태였다. 그런데, 고문을 당한 건지 사내들의 피부색이 상처로 얼룩져 있었다.

지금 마정수를 먹어야 하나 싶어서 시카르를 쳐다보았지만, 시카르는 아직은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내 귓가에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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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 서술이 많으니까. 경기가 시작하면 그때 먹지.”

시카르의 말대로, 권투에서 선수를 길게 소개하듯 심판이 나와서 이들을 길게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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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오늘 새벽! 국왕 전하의 용맹무쌍한 용사들이! 국왕 전하를 암살하려는 극악무도한 암살자들을 돕는 무리들을 추포해왔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자비로우신 국왕께서 이 극악무도한 반역자에게 성은은 베풀어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구하려는 자는 그 목숨을 살려주신다 하셨으니, 국왕 전하의 지엄하고 높으신 은혜에 덕을 입을 자가 누구인지 함께 확인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냥 죽이기 아쉬우니 갖고 놀겠다는 말을 참 좋게 포장도 잘 하는구나 싶었다.

심판의 말이 끝나자 곧장 사내들의 머리 위를 씌우고 있던 두건이 벗겨졌다.

그리고 그 순간, 나와 시카르는 서로를 동시에 쳐다보았다. 그리고 길리언도 나와 시카르를 보며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두건이 벗겨진 사내중 한 명은 새벽에 함께 있었던 바로 그 젊은 상인 터커였다.

터커는 자신이 이곳에 왜 와 있는지 모르겠다는 듯 부들부들 떨며 글썽글썽해진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충격적인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는 나를 보고도 아는 척을 하지 않고 두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돌렸다.

앞에 있는 사람은 누군지 모르겠지만, 얼굴에 칼자국이 많은 걸로 봐서는 뛰어난 용병이었거나 검투사 같았다.

터커는 이제 죽은 목숨인 듯했다.

시카르는 어서 마정수를 먹으라는 듯 내게 눈짓했다.

이미 경기는 시작되고 있었지만, 나는 그것을 먹을 수가 없었다.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마정수를 꽉 쥐었다.

시카르는 그런 나를 보고 인상을 쓰고는 길리언을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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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 전하. 착오가 있으셨던 것 아닙니까? 저 사람은 상인인 걸로 압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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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나를 암살하려는 자들이 있지요. 그것은 비단, 폐왕의 잔당뿐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알아봤더니 상인들이 고개약을 구해 날 해하려는 암살자들에게 팔고 있더군요. 그러니, 이 암살자들이 과인을 보고 겁을 내지 않고 폭탄을 품고 뛰어드는 것이지요. 저 약을 먹고 환상을 보니까 말입니다. 저기 저, 상인 놈도 암살자들에게 고개약을 판 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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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않을 겁니다. 저 상인은 제가 보증하는데 겁이 많아서 암살자들에게 약을 팔 놈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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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그럼 공작께서 저놈에게 속고 계신 겁니다. 저놈이 어제 상인 길드에서 고개약을 사 갔는데 저놈은 먹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마차를 끌고 다니지 뭡니까? 누가 봐도 암살자 놈에게 판 게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고문을 해도 누가 사 갔는지 불지도 못하는 것이겠지요.”

길리언의 한쪽 입매가 비틀렸다. 그는 우리를 보며 살벌한 눈빛으로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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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분명히 도왔는데 왜 도왔는지 말을 안 하고 있으니 죽여야지요. 안 그렇겠습니까?”

앞에서 터커라는 젊은 상인이 맞는 소리가 ‘퍽퍽’ 거리며 들려왔다.

길리언이 정말 암살자들을 잡기 위해 터커를 잡아 왔든, 아니면 우리를 떠보기 위해 이런 일을 저질렀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길리언 저놈은 폐왕과 다를 바 없이 무자비하고 잔인하고 극악무도한 악마 같은 놈이라는 사실이었다.

저런 놈이 왕좌를 차지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자신의 백성된 자를 저렇게까지 유린하며 갖고 노는 저놈은 왕좌를 차지하고 있을 자격이 없다.

나는 고개약을 먹을 수도 없었지만, 공개할 수도 없었다. 길리언은 이미 이것을 암사자들이 구하는 약이라고 했기 때문에 내가 이 약을 공개한 순간, 사람들로 하여금 의심을 살 수도 있었다.

시카르도 그것을 알기에 떨리는 내 손을 꽉 쥐고 있었다. 내가 그 약을 단지 오늘 경기 관람을 보기 위해 구했다는 것을 그들은 이해하기 힘들 것이고, 이해했다고 해도 암살자들과 엮어서 몰고 갈 것이다.

그러면 지금 당장 공작저를 수색할 수 있는 명분이 생기게 된다.

공작저를 수색하게 된다면 그동안 키안의 근처도 접근할 수 없었던 파시움이, 이제 이 별것 아닌 것 같은 명분으로 키안에 대한 수색을 진행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마법을 벗겨내 문장이라도 찾아낸다면 모든 게 끝장이었다.

인질로 잡힌 베로니아는 그 즉시 죽을 것이다.

길리언이 뭔가를 알아차렸든 아니든 우리에게 의심을 품고 공격을 시작한 건 명백했다.

우리의 얼굴을 보고도 그것이 우리라고 말하지 않는 터커를 저렇게 죽게 내버려 둬야 하다니…….

그 사실은 나를 괴롭게 만들었다.

우리의 낯빛이 어둡다고 느꼈는지 레이독스는 진중하게 우리를 보고 있었다.

길리언은 그저 재미있기만 한 듯 껄껄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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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독한 놈 좀 보시죠. 맞아 죽게 생겼는데도 고개약을 누구한테 넘겼는지 곧 죽어도 말을 안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저놈도 한패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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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놈을 제게 주시죠.”

껄껄 웃던 길리언의 웃음이 싸늘하게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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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께서 저런 놈을 어디 쓰시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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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알아보겠습니다. 저놈이 누구한테 팔았는지. 반드시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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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못 찾으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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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리 없습니다.”

길리언은 고개를 비틀어 나를 한번 쳐다보고는 살기등등한 시선으로 시카르를 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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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부인의 목숨을 걸고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내 쪽에서 보이진 않았지만, 시카르의 시선이 꽤 살벌했는지 길리언의 눈꼬리가 움찔거렸다.

그는 한 손을 휘저으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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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농담입니다.”

그러곤 다시 고개를 들어 살벌한 눈으로 시카르를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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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일 처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더이상 농담은 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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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저도 농담을 좋아하진 않습니다.”

그것은, 그딴 농담은 하지 말라는 경고와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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