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악마의 손짓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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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화. 악마의 손짓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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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화. 악마의 손짓 (4)
2022.05.16.
“근데 참, 이상하군요. 왜 난 공작께서 나를 향한 충정이 아니라, 저 상인 놈을 두둔하는 거로 느껴질까요.”
시카르를 바라보는 말투와 눈빛에 적의는 보이지 않았지만, 신의도 느껴지지 않았다.
“저는 다만, 전하께서 죄가 명백히 밝혀지지 않은 상인을 직접 처단하셨다가 상인들의 민심에 영향을 끼치진 않을까 염려될 뿐입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네. 전하.”
가만히 시카르를 노려보던 길리언은 손을 들었다. 싸움은 곧 중단되었고, 전투를 관람하던 귀족들의 시선은 모두 국왕을 향했다.
“하긴, 이들 중 내가 왕좌에 있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어떤 이가 그런 소문을 내서 민심을 조장할 수 있겠군요?”
길리언의 발언을 들은 귀족들은 누가 감히 그럴 수 있겠냐며 입을 모아 그런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 호소했다. 그러자, 길리언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여기 있는 분들은 모두 나를 지지한다고 믿어도 되겠군요.”
귀족들은 하나같이 합을 맞추듯 입을 모았다.
“지당하지 않겠습니까.”
“공작의 생각도 그렇습니까?”
시카르는 자신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는 길리언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블레이크 존속의 이유는 전하의 왕좌를 보필하는 것입니다.”
길리언은 마음에 드는 답을 받은 듯 미소 지었지만, 겉으로 보이는 표정일 뿐이었다.
시카르와 길리언, 그들은 둘 다 서로의 속내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레이독스는 시카르와 달리, 상황을 적절히 모면할 수 있는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만큼 강직했던 그는 길리언과 눈이 마주쳐도 고개만 숙일 뿐이었다.
“좋습니다. 저놈을 내어주죠. 단, 암살자를 잡아 오지 못하면 저놈을 단두대에 세워 본보기로 삼겠습니다.”
길리언은 어디 실체도 없는 암살자를 잘 잡아보라는 듯 비소를 띄었다.
“당연히 제가 일을 제대로 매듭짓지 못한다면 저놈의 목숨은 전하의 처분에 맡기겠습니다. 다만.”
“다만?”
“블레이크에 사병을 더 보충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전하의 목숨을 노리는 암살자들이 활개 하는 만큼 블레이크의 안전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이니까요.”
그 말은, 자신이 공작저를 비우는 사이에 블레이크를 칠 생각은 하지 말라는 뜻과도 같았다.
길리언도 그냥 듣고만 있지는 않았다.
“사병이 부족하면 왕실의 병사를 보내드리겠습니다.”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칼을 갈고 있는 현 상황에서 왕실의 병사를 들인다는 것은 폭탄을 끌어안는 것과 같았다.
“암살자들이 시시때때로 전하의 목숨을 노리는 마당에 왕실의 병사들을 빼 올 수는 없습니다.”
이미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던 길리언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이대로 공작을 믿고 맡겨 보지요. 제 믿음을 저버리지는 않겠지요?”
“전하의 기대에 보답하겠습니다.”
시카르 역시도 차분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지만, 그 말에는 뼈가 있었다.
***
시카르의 말로는 길리언이 상인을 순순히 놓아준 것에는 어떤 흑막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터커는 죄가 없다는 것이 명백히 밝혀지기 전까지는 손에 수갑을 차고 있어야 한다고 한다.
새벽에 봤을 때만 해도 멀쩡하던 터커의 손은 상처로 엉망이 돼 있었다.
그는 근위대의 호송 마차를 타고 우리 마차를 뒤따라 왔다.
터커가 왕의 근위대에 붙잡힌 것은 우리와 헤어진 직후라고 한다.
“그럼 우리를 미행했다는 말이야?”
“우리를 미행했거나, 상인 길드 마스터에게서 정보를 얻고 터커를 미행했거나. 둘 중 하나겠지. 알아보기 위해 상인 길드를 다시 찾아야겠다.”
터커를 태운 호송 마차는 레이독스를 따라가게 하고 우리는 상인 길드를 들렀다.
하지만 상인 길드는 문을 닫아 놓은 상태였다. 시카르는 다짜고짜 길드 앞에 있는 잡화점 주인의 손목을 붙잡았다.
“귀, 귀족께서 왜 이러십니까……!”
시카르는 한참 인상을 쓴 후 잡화점 주인에게 돈을 돌려주고 마차에 올랐다.
시카르의 표정이 좋지 않았기에 나는 무슨 일인지 대번에 묻지 못했다. 다음 우리가 도착한 곳은 어느 연금술사의 집이었다.
시카르는 나를 마차 안에 홀로 두면 위험하다고 느꼈는지 내릴 때마다 반드시 내 손을 잡고 내렸다.
이번에도 시카르는 다짜고짜 연금술사의 손을 잡은 후 그의 기억만 읽고 난 후에 돈을 주고 나왔다.
마차에 다시 오른 시카르는 또 한참을 조용히 있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연금술사에게서 안정제를 샀다는 것을 길리언이 알게 되었군. 검투 경기도 나를 떠보기 위해 연 것 같고…….”
시카르는 나를 보며 조금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뭘 알아낸 건지 정확하진 않지만, 분명한 것은 길리언이 내게 공격을 시작했다.”
이미 눈치를 채고 있었던 일이었기에 나는 덤덤하게 수긍했다.
우리가 터커를 레이독스에게 맡긴 것은 키안을 데려와야 했기 때문이었다.
밤늦게야 후작저에 도착하니 키안은 잠들어 있었고, 터커의 손에 채워져 있던 수갑은 보이지 않았다.
“듣자 하니 이 상인이 어제 공작님을 도와줬다고 해서 수갑을 좀 풀어줬습니다.”
“그랬다가 도망이라도 가면 어쩌려고 그런 짓을 한 거지?”
“이 상인이 그런 놈이었다면 공작님이 구해주지도 않으셨겠죠.”
일리는 있는 말이었다. 터커는 시카르를 향해 머리가 땅에 박을 만큼 조아려 인사를 하고 있었다.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터커는 자신이 표현할 수 있는 가장 큰 인사를 한 것이었지만, 시카르는 귀찮기만 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귀찮아하고 있었다.
“인사할 거 없다. 내 아내에게 사람이 맞아 죽는 꼴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을 뿐이니까.”
시카르가 그렇게 말한 바람에 터커는 이번엔 나를 향해 머리가 땅에 박을 정도로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목숨을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바닥을 향해 내리꽂는 터커의 머리를 붙잡았다.
“그만해. 네 목숨을 구한 건 네가 우리에게 보인 의리 때문이야. 왜 우리를 봤을 때 아는 척을 하지 않았어?”
“할머니께서 은혜를 모르는 놈은 금수만도 못하다고 말씀하셨거든요.”
수줍게 머리를 긁적이며 웃는 얼굴을 보니 조금 전 투기 경기에서 죽을 뻔한 일을 까맣게 잊은 듯 해맑아 보이기만 했다.
겁도 많은 성격에 무서웠을 텐데도 용케 의리를 지킨 게 고맙고 기특했지만, 상황이 좋지만은 않았기에 나는 마냥 웃어줄 수는 없었다.
터커가 다시 마차에 올랐을 때는 다시 손목에 수갑을 차야 했다.
아직 죄인은 아니지만, 죄를 지었을지도 모르는 용의자가 언제 도망을 칠지도 모르는데 수갑을 풀고 다닐 수는 없었으니까.
명목상 보기에는 반드시 수갑을 차야 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레이독스는 시카르의 품에 키안을 건네주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공작저로 출발하실 생각이십니까? 당분간은 이곳에 계신 게 어떻겠습니까.”
“저들에게 우리가 작정하고 작당 중이라는 것을 보여주란 말인가?”
“어차피 국왕이 이미 다 알고 있는 듯하니 상관없지 않겠습니까? 지금 국왕은 공작님께서 자리를 비우는 즉시 블레이크를 칠 요량인 것 같습니다만.”
“있어도 블레이크 있을 것이다.”
레이독스는 미처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그렇군요.”
시카르는 잠든 키안이 불편한 듯 움직이자, 노련하게 키안의 등을 토닥여주며 다시 잠을 재웠다.
오가는 살벌한 얘기들과는 다르게 키안을 다시 재우는 시카르의 모습은 영락없이 아빠 같았다.
“넌 당장 제르미나 불러들여라. 길리언이 후작저를 공격할지도 모르니 당장 유카나다르로 돌아오라는 긴급서신을 보내.”
“알겠습니다. 제가 더 해야 할 일은 없겠습니까?”
“시간이 없다. 조속히 베로니아를 찾아야 하니 삼 일 후에는 예정대로 북부로 떠날 것이다. 그동안 넌 반드시 블레이크와 유카나다르를 지키도록 해라.”
“국왕이 사람을 보낼지도 모르니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쓸데없는 걱정. 난, 네 딴 놈이 걱정할 만큼 약해빠지지 않았다.”
시카르는 조금도 약한 모습을 보이려 하지 않았지만, 레이독스가 하는 걱정이 무엇인지 난 알 수 있었다.
저주.
요즘 들어 더욱 자주 나타나는 저주의 징후 때문이었을 것이다.
***
“또 유카나다르에 갔단 말이지…….”
근위대장의 보고를 받은 길리언의 낯빛이 무거웠다.
레이독스는 귀족들 사이에서 쌍둥이를 잘 훈육하기로 유명했다. 쌍둥이들이 집 안에서는 별나게 굴어도 대외적인 자리에서는 그보다 성숙하고 점잖을 수가 없었다.
처음 시카르가 레이독스에게 아이를 맡겼을 땐, 그런 이유 때문도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시카르가 자신의 왕위를 지켜준 이유가 단지 폐왕에 대한 복수심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애초에 블레이크의 충성은 기대하지 않았다.
시카르 또한, 블레이크를 탄압하지 않는다면 왕실을 수호하겠노라 약속했다.
레이독스는 자신을 지지하지 않고 있는다는 확신이 든 순간부터 길리언은 하루도 빠짐없이 후작저를 감시하라 일렀다.
그랬기에, 처음엔 자신을 왕으로 탐탁지 않게 여기는 레이독스와 친분을 가져도 큰 의심을 두지 않았다.
금발의 푸른 눈을 가진 아이를 양자로 받을 때도 설마하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그들에게 각각 검은 눈을 가진 여인이 있는 것을 알게 된 길리언은 이제 더는 블레이크를 신뢰할 수만은 없었다.
시카르의 몸 일부가 저주로 인해 동결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길리언으로서는 그와 관련된 어떤 내막이 있을 것이라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길리언은 시카르가 양자로 들인 아이가 다시 의심스러웠다.
왕후는 마시고 있던 붉은 와인잔을 내려놓으며 차갑게 웃었다.
“공작의 양아들 몸을 수색해 보는 건 어때? 왕족의 문장이 있는지 확인해 보면 되지 않아?”
“이미 확인해봤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
“왕족의 문장을 감추는 일쯤이야. 마법사만 있으면 언제든 할 수 있는 일이잖아? 그리고 찾아내는 것도 마법사가 할 수 있는 일이고. 파시움에게 수색하라고 해봐.”
“그걸 몰라서 못 한 게 아니야. 파시움이 블레이크 소공자의 몸수색을 하는 일도 명분 없이는 힘들어. 만약, 블레이크 공작이 아무런 적의가 없는데 내가 그를 의심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면 없던 적의도 생길 테니 더 곤란해. 블레이크 공작이 미쳐 날뛰면 막기 버거워.”
왕후는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미친개를 잘못 건드렸다가 물리면 곤란하지.”
“공작의 저주가 많이 진행된 경우라면 건드려볼 만하겠지. 얼마 전에 왕후가 공작과 춤을 췄다고 들었는데. 어때 보였어?”
“멀쩡해 보였지. 그 공작, 겉보기엔 아주 멀쩡해 보이잖아? 그렇다고 저대로 계속 지켜보기만 할 건 아니지? 지금 거동이 너무 수상하잖아.”
길리언은 답답하다는 듯 혼자서 와인을 한 잔 더 따르고 있는 왕후의 손을 붙잡은 후 직접 와인을 따라주었다.
“물론. 아니지. 그래서 이번에 볼 생각이야.”
“어떻게?”
“베로니아를 처형한다면 어떤 반응이든 보이겠지.”
“베로니아를 처형하겠다는 말이야?”
“그래.”
왕후는 나쁘지 않다는 듯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그거 괜찮은 계획이네. 대어를 낚으려면 그에 맞는 미끼를 풀어야지.”
왕후는 웃으며 길리언과 잔을 부딪혔지만, 밖에서 이야기를 엿듣고 있던 헤르시아는 웃을 수가 없었다.
‘베로니아 공주를 처형한다고?! 어서 이 사실을 알려야 해!’
그 순간 근위대장의 군화 소리가 복도를 울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