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베로니아 (1)
(103/197)
103화. 베로니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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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화. 베로니아 (1)
2022.05.26.
유라는 어차피 그날 아이를 구했을 때 죽은 목숨과도 같았다.
키안을 구하는 것은 그녀에게 있어서 차에 치일 뻔하는 아이를 구하는 것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렇기에 유라는 키안이 위험해지는 일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난 죽어도 괜찮아. 근데, 아직 어린 키안이 위험해지는 건 아닐까 걱정돼.”
시카르는 유라의 얼굴을 골몰히 보다가 피식 웃었다. 제 몸 하나 지킬 힘도 없는 연약한 유라가 저렇게 용기 있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시카르는 그녀가 꽤 귀엽게 느껴졌다.
“또 겁 없는 소릴 하는군. 죽어도 괜찮긴 뭐가 괜찮아. 넌 안 죽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무슨…… 소리야?”
“마침 레이독스와 그 얘기를 해야 하니. 내려가지.”
시카르는 유라가 이유를 채 묻기도 전에 거실로 내려갔다.
그는 베로니아의 처형식이 있는 날, 그녀를 빼돌릴 계획이었다.
레이독스는 차라리 전면전을 하면 어떻겠냐고 했지만, 공작저의 모든 병력을 동원해도 왕실의 병력에 맞서기엔 역부족이었다.
“제가 병력을 지원하겠습니다.”
“그럼 내 아내와 키안은 누가 지키지?”
레이독스는 시카르의 질문에 대해 속 시원하게 답하지 못했다.
본래는 베로니아를 찾게 되면 국왕을 암살할 계획이었지만, 지금은 암살도 시도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반드시 전면전만은 피해야 했지만, 여러모로 일이 꼬였다.
“그렇다면, 처형식에서 공주님을 어떻게 빼돌릴 수 있겠습니까.”
“수하 중에 아론이라고 있지?”
“네. 이번에 제 사병 기사단으로 들어온 신입기사입니다.”
“그 아이를 써라. 얼굴이 알려지지 않았으니 믿을 만할 것이다.”
레이독스는 짐짓 당황스러웠다. 아론은 자신의 수하가 된 지 얼마 안 된 신출내기였기에 그 능력이나 가치를 완전히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전 아직 그 기사를 신임하지 않습니다.”
“내가 그놈이 어떤 놈인지 알고 있으니 그놈을 써서 베로니아를 빼돌리면 될 것이다. 작전은 내가 세울 테니, 내 지시만 따르면 된다. 그전에 제르미가 도착한다면 그놈의 도움을 좀 받을 수 있을 텐데…….”
“처형식이 내일 당장 진행되는 게 아니라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될 수 있게 그동안 주변을 잘 경계하고 있도록.”
“알겠습니다. 공작님.”
“그리고…….”
시카르는 말을 하다 헛기침을 한번 하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내가 없는 동안 공작저로 곧장 달려온 일은 잊지 않도록 하겠다.”
레이독스는 시카르가 고맙다는 말을 못 해서 저렇게 돌려 말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비록 지위는 낮았지만, 시카르보다는 무려 7살이나 나이가 많은 데다 레이독스는 진짜 어른스러운 데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차분히 미소지었다.
“공작님께 고맙다는 말도 다 들어보는군요.”
잠자코 고개를 돌리던 시카르가 발끈해서 고함을 질렀다.
“누, 누가! 고맙다고 했단 말이야! 그냥 잘했다고 칭찬을 좀 해줬을 뿐이다.”
레이독스는 흐뭇한 얼굴로 웃었다.
“알겠습니다.”
“밤이 늦었으니 오늘은 공작저에서 묵고 가라. 이 시간에 곤히 자고 있는 쌍둥이들을 깨울 수도 없을 테니까.”
“감사합니다. 공작님.”
“할 말들이 많겠지만, 밤이 늦었으니 오늘은 이만 자고 남은 얘기들은 내일 일어나서 하도록.”
시카르가 유라와 방으로 올라간 후 안드레아가 레이독스 일행을 게스트룸으로 안내했다.
공작저를 감싸고 있는 안개가 오늘따라 더욱 검고 짙었다.
***
다음 날 아침 일찍 신관을 부르려 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비카가 걱정되는 마음에 그녀의 방을 찾은 나는, 비카 옆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키안을 발견했다.
키안은 아직 덜 여문 작은 손으로 비카의 몸을 치유 중이었다.
쌍둥이들은 옆에 서서 ‘우와’, ‘이야’ 등의 감탄을 연신 남발하며 그 곁을 지키고 서 있었다.
“시끄러워. 너희들 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 자서 더 병날 거 같으니까 좀 나가줄래? 도련님들?”
“전 도련님이 아니니까 여기 있어도 되죠?”
“좀 나가줄래? 아가씨?”
“걱정돼서 그래요. 많이 아프셨을 것 같아서…….”
비카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정말 더 죽을 것 같다는 얼굴로 고함을 빽빽 질렀다.
“지금까지 하나도 안 아팠는데 도련님들 오고 나서 죽을 맛이니까 이만 나가!”
그러자 키안은 아주 오랜만에 비카의 입에 사탕 하나를 넣어 주며 생긋 웃었다.
“다 끝나가니 조금만 참으세요.”
“도련님. 나 정말 괜찮아.”
“비카 님이 괜찮은 이유는 아마, 제가 방금 치유를 끝내서일 거예요.”
키안은 보란 듯 비켜섰고 비카는 제 몸을 슥 내려보고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다시 정색했다.
“뭐, 좀 늘었네.”
키안은 이제서야 궁금하다는 듯 비카를 보며 물었다.
“근데, 어쩌다 이런 상처들이 생긴 거예요?”
“몰라. 나 배고파. 밥이나 좀 줘. 도련님이 입에 사탕 물려줘서 더 배고파.”
“아. 네! 비카 님. 식사를 가져오라고 말할게요.”
비카는 정말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었기에 나는 들어가서 비카 님 쉬게 두시라며 아이들을 데리고 나왔다.
아이들은 키안의 손을 만지며 신기해했고 키안은 머쓱하게 웃으며 아이들을 잡고 내려갔다.
키안이 정말 많이 자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좀 더 자랄 때까지만 시간이 우릴 기다려준다면 베로니아도 좀 더 쉽게 되찾을 수 있었을 텐데.
아쉬운 마음에 한숨이 나왔지만 나는 이번에도 시카르를 믿기로 했다. 그라면, 반드시 잘 해낼 것이라고.
***
오늘 식사 테이블에는 우리 가족과 레이독스의 가족이 함께였다.
아이가 셋이다 보니 정신이 점점 혼미해지는 기분이었다. 특히 루시와 루이드가 너무 말이 많아서 시카르가 식사 중 몇 번이나 인상을 썼는지 모른다.
장담하건대, 그가 마법사였다면 아이들을 공중에 띄워놓고 밥을 먹였지 않았을까 싶을 만큼이었다.
“루시. 루이드. 수련의 방에 가서 밥 먹고 싶지 않으면 조용히 밥만 먹어라.”
루시는 심드렁한 얼굴로 알겠다고 대답했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
밥이 어디로 들어갔는지 모르는 오전이었지만, 그래도 그런 아이들 덕분에 베로니아에 대한 걱정은 조금 잊을 수가 있었다.
식사를 끝낸 후 서연이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그동안 나는 시카르, 레이독스와 함께 앞으로에 대해 의논했다.
먼저 시카르는 나에게 완드를 완벽히 사용하는 법부터 익히라고 했다.
“응. 알겠어.”
“그리고 제르미한테 말해서 로엔이 도착하는 대로 키안에게 신성력 사용법을 가르치라고 해라.”
“로엔 님께서 허락하신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로엔에게 현 국왕이 폐왕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궁후원에서 검투 경기를 즐긴다는 말을 넌지시 흘려라. 그럼 네 말을 따를 것이다.”
“그 말씀은, 로엔에게 왕손 저하의 신분을 노출하란 말씀이십니까?”
“신분을 노출하지 않는다면 로엔이 키안에게 그런 걸 알려주지 않을 것이다. 또 순례를 하러 떠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로엔 님이 수락하지 않는다면 저도 강제할 수는 없습니다.”
레이독스는 아무래도 로엔이 거절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시카르는 답답하다는 듯 레이독스를 조금 노려보았다. 그건, ‘네놈이 원작을 몰라서 하는 소리다!’라고 말하는 눈빛 같았다.
그 얘기를 끝낸 후 시카르는 본격적으로 베로니아 구출 작전 계획을 말하기 시작했다.
처형식은 보통 광장에서 이루어지며 광장까지 죄인 호송 마차를 타고 간다고 한다.
베로니아를 빼돌리려면, 그 호송 마차를 타기 전에 빼돌려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그 호송 마차를 어떻게 빼돌립니까? 베로니아가 감옥에서 나올 때입니까. 아니면 마차에 탈 때입니까?”
신나게 설명하던 시카르는 답답하다는 듯 테이블을 쾅 내리치려다 내 눈치를 살피곤 그저 주먹을 쥐었다.
“마차를 통째로 훔칠 것이다.”
레이독스의 눈망울이 크게 부풀었고,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통째로요?!”
“그래. 통째로 마차를 바꿔치기 할 생각이다. 똑같은 마차를 준비한 후, 베로니아가 탄 호송 마차가 나타나면, 그 마차를 우리가 그대로 가져갈 것이다.”
“그 마차를 모는 것은 왕의 근위대 중 한 명일 텐데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실행할 수 없는 계획이라면 애초에 계획이라고 말하지도 않았겠지. 그러니 넌,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라.”
시카르가 말한 계획은 생각보다 괜찮은 것 같기도 했지만, 꽤 위험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 외에는 정말 방법이 없을 것 같았다.
잠자코 듣고 있던 레이독스는 입술을 잘근 씹었다.
“만약 이 모든 일이 실패한다면요. 그다음엔 또 계획이 있습니까?”
시카르는 불편한 낯빛으로 말을 이었다.
“그럴 일은 없어야겠지만, 만약 이 모든 일이 실패한다면 그땐 전면전뿐이다. 전면전에 들어가게 된다면 너는 네 아이들과 함께 곧장 유라와 키안을 데리고 설산으로 가라.”
설산은 정말 의외였기에 레이독스뿐 아니라 나는 진심이냐는 듯 시카르를 쳐다보았다.
“설산을 말입니까? 거긴 생활 여건이 좋지 못합니다. 그런데 왜 거기를…….”
“설산에 키안의 친부인 발리제의 시신이 안치돼 있다.”
“그건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내가 지난 3년간 떠나 있는 동안, 설산에서 대대적인 공사를 했지. 그곳에 발리제의 시신을 보존할 곳을 만들면서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대피소도 만들어 두었다.”
“혹시 모를 사태라면…….”
“반정이 실패했을 때를 대비해 두었다는 말이다.”
시카르가 용의주도한 줄은 알고 있었지만, 거기까지 대비하고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는 내가 아는 것보다도 더 주도면밀했다.
“내 말 알아들었나?”
“네. 알아들었습니다.”
“만약 이 모든 일이 잘 해결된다면, 대피소는 우리의 별장이 될 수도 있겠지. 대피소가 별장이 될 수 있게 이번 일을 반드시 성공시켜야 한다. 베로니아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자, 우리의 목숨이 달린 일이니까.”
시카르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말하고 있었지만, 그게 얼마나 중대 사항인지 레이독스도 나도 잘 알고 있었다.
레이독스는 기대된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설산에 꼭 가 보고 싶군요. 대피처가 아닌 휴가지지로요. 공작님께서 어떻게 만들어 놓으셨을지 궁금합니다.”
“나도 아직 안 가봐서 궁금하군. 이번 일이 잘 되면 다음에 놀러 갈 수 있을 테고, 이번 일이 잘 안 되면 평생 갈 수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레이독스가 애써 밝은 분위기로 전환했는데 시카르가 거기에 찬물을 확 끼얹었다.
일순 우리는 초상이라도 난 것처럼 한동안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러다 레이독스는 분위기를 만회하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다음에 반드시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쌍둥이들과 같이 가서 눈싸움도 하시고 설산에서 즐겁게 놀다 오시죠.”
레이독스는 즐겁겠다고 한 말이었지만, 쌍둥이들과 함께 간다는 말은 시카르의 심기를 제대로 긁은 듯했다.
“뭐? 쌍둥이들과 함께? 네 쌍둥이들이 나한테 어떻게 했는지 잊었나? 결코 그 쌍둥이들과 함께 갈 일은 없을 것이다!”
시카르의 과한 반응 때문에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레이독스가 그것을 노린 것인지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우중충했던 분위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밝아졌다.
창문을 통해 우리를 비추며 들어오는 따뜻한 저 햇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