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베로니아 (2)
(104/197)
104화. 베로니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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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화. 베로니아 (2)
2022.05.30.
베로니아의 처형식 날짜가 떨어졌다. 반역을 도모했다는 말도 안 되는 죄목으로.
그동안 듀리온도 공작저로 돌아왔고, 제르미도 돌아왔다고 한다.
상황이 그래서인지 오랜만에 보는 듀리온이 유독 반갑게 느껴졌다. 베로니아의 처형 소식을 들은 듀리온은 슬픈 낯으로 말했다.
“우리 도련님 가여워서 어떡해…….”
그러더니 벌떡 일어나서는 가서 키안을 위로해야겠다고 하다가 비카의 제지를 받았다.
“미쳤어? 도련님은 아직 아무것도 몰라. 정신 차려!”
“아, 그, 그렇지.”
“도련님 앞에서 베로니아 얘기는 입도 뻥긋하지 마! 내색하지도 마!”
“알았어. 알았다고.”
듀리온은 귀찮은 듯 대답했지만 금세 비카의 말을 까먹었다.
시카르와 함께 키안이 방에서 내려오자마자 듀리온은 시카르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키안을 부둥켜 안았다.
“도련니이이임! 도련님 괜찮아요. 이 기사 듀리온이 반드시 도련님을 지켜드릴 테니까요오오오.”
듀리온이 키안을 와락 끌어안는 바람에 키안의 작은 몸이 듀리온의 커다란 가슴에 파묻히다시피 했다.
시카르는 듀리온의 뒷덜미를 끌어당기며 키안에게서 그를 떼어냈다.
“그만해라.”
키안은 이제야 편히 숨을 쉴 수 있겠다는 듯 깊게 숨을 내쉬며 시카르의 뒤로 숨었다.
표정을 보니 은근히 시카르에게 고마워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래. 이번엔 듀리온의 애정 표현이 너무 지나쳤지.
다행인 건 그 덕분에 키안이 듀리온의 말은 한 귀로 들은 것 같았다.
강렬한 재회의 인사 뒤에, 식사를 끝내고 듀리온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려다 키안의 눈치를 살피곤 멋쩍은 듯 웃었다.
듀리온이 무언가를 꺼내려다 멈추는 것을 본 비카는 귀신같이 물었다.
“뭘 꺼내려다 말아?”
“아. 선물을 사 왔는데 잃어버린 것 같아서.”
조용히 식사를 하면서도 긴장감이 감도는 분위기를 눈치챈 듯. 키안은 디저트가 나오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공부할 것들이 좀 있어서 먼저 일어날게요. 디저트는 공부하면서 먹어도 되겠죠? 어머니?”
“어? 그럼. 당연하지.”
키안은 정중하게 인사를 끝낸 후 다이닝룸을 빠져나갔다. 공부할 게 있다고 했지만 그것은 핑계고 우리가 제대로 대화를 나누지 못하는 것을 눈치채고 자리를 비켜준 것 같았다.
키안이 자리를 떠나자 듀리온은 분위기를 살피며 주머니에 있는 것을 다시 꺼내 테이블 위로 올렸다.
“이것 좀 보세요.”
듀리온이 테이블 위로 올린 것은 천에 그려진 거미 모양의 문양 같았다. 시카르는 전에 본 적 없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이게 뭐지?”
“파인더를 찾았을 때 그는 죽어 있었습니다.”
파인더는 시카르가 베로니아를 찾아 달라고 의뢰했던 사람이었다.
듀리온은 파인더와 갑자기 연락이 되지 않아 그를 찾던 중 어느 창고에서 그의 시신을 발견했다.
그가 이전에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산트레아의 전당포를 찾으라고 한 말이 떠올라 그곳을 찾았다가 이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게 다야? 이걸 어디서 찾았다거나 그런 말은 없어?”
비카의 질문에 듀리온은 애석한 듯 눈꼬리를 늘어트렸다.
“없어.”
“그렇군.”
시카르는 천을 가져와 천천히 살피기 시작했다.
“도통 뭔지 모르겠군. 이런 문양을 가진 가문은 없는데, 무슨 단체처럼 보이지도 않고.”
파인더가 이것을 지니고 있었던 이유가 분명히 있겠지만, 거미의 그림이 그려진 문양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다들 천에 대해 궁금해하고 있었지만 누구도 해답을 내놓을 수는 없었다.
귀가 밝은 비카는 차를 들이켜며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제르미가 오는군. 저 마법사는 여전히 시끄럽네.”
그때 아주 오랜만에 창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창문에는 새 한 마리가 붙어서 빨리 문을 열라며 부리로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듀리온이 열어준 창문을 통해 들어온 제르미는 시카르의 옆에 서서 변신을 풀며 모두를 향해 밝은 얼굴로 인사했다.
“정말 오랜만입니다. 공작님. 공작부인. 그리고 나머지 분들.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반가워요. 제르미님.”
제르미의 모습은 거의 변함이 없었다. 시간이 다시 3년 전으로 돌아간 것처럼. 그는 해사하고 밝은 모습 그대로였다.
듀리온은 제르미를 보며 으르렁 거리듯 이빨을 드러냈다.
“창문으로 좀 다니면 안 되겠어?”
음. 듀리온이 현관문하고 헷갈린 거 같은데.
제르미는 그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는 듯 물었다.
“창문으로 들어왔잖아. 듀리온?”
듀리온은 아차하는 얼굴로 두 눈을 부릅떴고 비카는 망신이라는 듯 입술을 비죽였다.
“이그. 저 바보.”
“아, 아니 다음에는 현관문으로 다니라고! 왜 멀쩡한 현관을 두고 창문으로 다니냔 말이야!”
“급하면 땅굴로도 다니는 게 마법사지.”
이 얄팍한 신경전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 시카르는 무심히 제르미를 볼 뿐이었다.
“그 급한 일부터 설명하지.”
제르미는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방긋 웃었다.
“역시 공작님께서는 본론부터 물어 보실 줄 알았습니다. 그럼 바로 본론부터 말씀드리죠. 공작님께서 베로니아 공주님의 호송 마차를 바꾸는 계획을 세우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마차를 바꾸는 일은 유카나다르에서 하는 것으로 계획을 바꾸고 싶습니다.”
“뜻은 알겠지만, 베로니아를 빼돌리는 순간 반역자가 되는 일이다. 곧, 유나카다르의 존폐가 위협받을 수 있음이다.”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하겠다는 말인가?”
제르미는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히죽거리며 웃었다.
“그렇습니다. 공작님.”
“왜 너희가 그 일을 하려는 거지?”
히죽거리며 웃던 제르미의 눈빛이 장대하게 반짝거렸다.
“공작님이 베로니아 공주를 빼돌린 것이 발각된다면, 또는 그것이 함정이라면 공작님께서는 반역죄를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바로 전면전이 되겠죠. 그렇게 된다면 국왕은 눈엣가시 같은 레이독스도 분명히 반역죄로 같이 엮어 버릴 것입니다. 아니, 이번 기회에 그동안 벼르고 있던 자들을 모두 엮어서 반역죄로 처리하겠죠.”
제르미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분명히 그렇게 하겠지.
“하지만, 공작님께서 이 일과 무관하다면 국왕은 공작님을 엮기 힘들 것입니다. 순례를 다녀보니, 공작님께서 그동안 구빈원 원장도 처벌하시고 불법 노예 경매장도 적발하신 데다 폐왕의 잔당까지 척결하셔서 민심이 아주 좋더군요.”
제르미의 말이 맞긴 했다. 레이독스가 마차를 바꾸다 발각이 된다고 해도 블레이크와 무관한 일이기에 증거도 없이 블레이크를 밀어붙이진 못할 테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길리언이 블레이크를 가만두지도 않을 텐데. 그래도 레이독스는 그 편이 더 안전하다고 느꼈는지, 자신이 끌어안고 가겠다는 심산이었다.
“레이독스의 목숨뿐 아니라 제 자식들의 목숨까지도 위태로울 텐데, 왜 그렇게 판단한 거지?”
시카르가 그 질문을 날렸을 때 레이독스와 로엔이 공작저로 도착했다.
레이독스는 자신이 대답하겠다는 듯 제르미를 향해 손바닥을 내보이며 들어섰다.
“어차피. 공작님이 잘못되면 다음 타겟은 저일 테니까요.”
오랜만에 만난 로엔도 제르미처럼 여전한 모습이었다. 로엔은 나를 보고 생긋 웃으며 들어왔다.
“어머! 공작부인!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에요. 로엔. 여기 와서 앉아요.”
“반갑습니다. 공작부인.”
로엔은 대화를 더 나누고 싶은 눈치였지만, 현재 나누는 대화들의 무게를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
우리의 인사가 끝내자 시카르와 레이독스는 다시 대화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계속 얘기하지.”
“그래서 전, 공작님께서는 서연 님과 저희 아이들을 돌봐 주셨으면 합니다.”
“공작저에서 돌보기에는 어려운 상황이니, 너희 아이들과 서연은 미리 대피소에 데려다 놓도록 해라.”
“아니오. 공작저에서 돌봐 주십시오.”
“저들이 후작저와 공작저를 지켜보고 있을 텐데. 아이들을 들여보냈다간 공작저 수색을 막을 수 없을 수도 있다.”
“신분을 들키지 않고 공작저로 아이들과 서연 님을 들여보낼 방법이 있습니다.”
“그래?”
“공작저에 장작이 들어올 때 저희집 아이들을 장작더미에 숨겨 들여보내겠습니다. 물론 서연 님도 함께요.”
미심쩍은 얼굴로 레이독스를 쳐다보던 시카르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겠군.”
“베로니아 님의 처형식이 진행되는 날 장작을 실은 마차가 도착할 겁니다. 우리 아이들을 잘 부탁드립니다.”
“좋아. 그렇게 하도록 하지.”
시카르는 덤덤하게 대답했지만, 나는 너무 걱정이 돼서 덤덤하게만 대답할 수가 없었다.
“후작님. 정말 괜찮겠어요?”
“물론입니다. 공작부인. 공작님께서 베로니아 공주님을 구하시다 발각이 된다면, 어차피 저도 반역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눈엣가시 같은 유카나다르를 이때다 싶어서 같이 치겠지요. 그러니 이 방법이 최선책일 것입니다.”
로엔은 시카르에게 확고한 믿음이라도 주듯 레이독스의 말을 덧붙였다.
“저와 제르미 님이 후작님을 도울 거예요. 무슨 일이 있어도 베로니아 공주님을 구할 테지만, 일이 잘못된다 해도 잘 피신해서 공작님께 연락을 취하도록 하겠어요.”
신관이 하는 말은 그 어떤 말보다 확고하고 큰 믿음이 있다고 한다. 로엔이 확신하자 시카르는 그 결정에 확고함을 느낀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결정을 내리기로 했다면 나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겠지.”
원작에서 로엔이 죽음을 맞이한 탓인지 그런 위험한 작전을 수행하려는 로엔을 보는 내 마음은 편하지만은 않았다.
중요한 얘기가 전달이 다 된 것 같아서 나는 로엔에게 넌지시 말을 걸었다.
“로엔 님. 몸조심하세요.”
“물론이죠. 철두철미하게 일을 진행할 테니 공작부인께서 염려 놓으셔도 될 거예요.”
로엔은 익살스럽게 웃더니 시카르와 눈이 마주치자 입을 다물곤 내게 다가와 귓속말을 하듯 소곤거렸다.
“세상에. 어쩜 그렇게 저를 감쪽같이 속였을 수가 있어요. 공작부인이실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나중에 제르미 님께 듣고 깜짝 놀랐지 뭐예요.”
“그땐 신분을 밝히기가 좀 곤란했거든요.”
“그랬군요. 전 너무 놀라서 세상에, 내가 만났던 그 사람이 공작부인이었다니! 라고 했다니까요.”
로엔은 나를 향해 살짝 윙크를 하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기분 좋게 깜짝 놀란 거라서 재미있었어요.”
“기분이 좋았다니 정말 다행인걸요.”
미소를 짓던 로엔은 금세 심드렁한 얼굴로 눈꼬리를 내렸다.
“공작부인을 다시 만나게 돼서 정말 반가워요. 하필 이런 일이라 애석하지만요.”
나는 한숨을 쉬는 로엔의 손을 잡아주었다.
“하지만 일이 잘 마무리 될 테니, 우린 다시 좋은 일로 만나게 될 거예요.”
로엔은 자못 기쁘다는 듯 밝은 미소를 지었다.
“참. 이상해요. 공작부인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까 정말 다 잘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저는 공작님을 믿거든요.”
“공작부인께서 공작님을 참 든든해 하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때도 그랬거든요.”
알고 있었다. 내가 그에게 많이 의지하고 그를 든든해하고 있다는 것을.
시카르를 슬쩍 보자, 그는 레이독스에게 어떤 지시를 내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그가 오늘따라 유달리 든든하고 멋있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