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베로니아 (3)
(105/197)
105화. 베로니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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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화. 베로니아 (3)
2022.06.02.
“그동안 제르미 님과의 순례는 무탈하셨나요?”
로엔은 마침 내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화사한 얼굴로 손뼉을 마주치며 대답했다.
“공작부인께서 예전에 저에게 노래하는 치유사라고 하셨잖아요? 이제 사람들이 저를 그렇게 부르고 있어요. 정말 신기하다고 생각했는데 제르미님의 말을 듣고 알았죠. 공작부인께서 미래를 보신다면서요?”
“아. 그건…….”
그건 이곳이 소설 속이라고 할 수가 없어서 둘러댔던 말이어서 이제 와 새삼 더 민망해서 나는 머쓱하게 웃어줄 뿐이었다.
“그럼 혹시 저희의 이번 일도 예측이 가능한가요? 혹시 이번 일에 성패를 미리 보신 건 아닐까 해서 말이죠.”
소설에 나와 있지 않은 미래에 대해서 나는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들을 믿었다. 그리고 내가 힘이 될 방법이 이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긍정적인 대답을 해주고 싶었다.
“물론이죠. 반드시 해내고 말고요.”
내가 두 주먹을 불끈 쥐어서 그런지, 로엔은 안심하듯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휴. 방금 해 주신 말씀 덕분에 진짜 안심이 됐어요. 사실 한편으로는 불안했거든요.”
은근슬쩍 마음 한편으로는 마찬가지로 불안했는지 제르미도 옆에서 같이 거들며 내게 감사를 표했다.
“공작부인께서 보셨다니 저도 더욱 안심이 되는군요.”
그때 로엔은 불현듯 뭔가 생각났는지 나를 보며 물었다.
“저, 공작부인께 궁금한 게 있어요.”
그런데 난, 로엔이 말하지 않아도 그 질문이 뭔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로엔이 내게 정말 궁금해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저 뭔지 알 것 같아요.”
“정말이요?”
“네. 제르미 님과의 미래를 봤는지 묻고 싶으셨던 거죠?”
“어떻게 아셨어요? 설마 제가 이런 질문을 하리란 것도 아신 거예요?”
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그런 게 아니라.”
서연이 말해줘서 알고 있지.
“로엔 님이 제게 궁금할 일이 뭐가 있을까 생각하다 보니 그 질문 같았어요.”
“그럼 말해주세요. 제가 미래에 제르미 님을 만나는 게 보였던 거예요? 제르미 님이 그러는데, 서연 님께서는 제르미 님이 저를 좋아하실 걸 알고 계셨대요.”
제르미는 난데없이 속을 들키자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히면서도 우리의 시선을 외면할 수 없었던지 고개를 비틀며 말했다.
“사실, 그래서 로엔 님을 봤을 때 서연 님이 말씀하신 그 운명의 분은 아닐까 긴가민가했죠.”
로엔은 재미있는지 히죽거리며 제르미를 쳐다보았다.
“지금은 그 사람이 저라고 생각해요?”
“사실 아직도 잘…….”
제르미가 여전히 확신을 못 하겠다는 듯 얼버무리자 로엔은 너무 궁금하다는 듯 나를 보며 물었다.
“공작부인께서 말씀 좀 해주세요. 서연 님이 말씀하신 그 미래의 짝이 정말 제가 맞아요?”
“서연 님은 뭐라고 하시던가요?”
“공작부인께 물어보라고 하셨어요.”
음. 그랬단 말이지.
“무사히 잘 끝내고 오시면 말해 드릴게요.”
내 대답을 기대하던 로엔은 물벼락이라도 맞은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진심은 아니시죠?”
미안하지만, 진심입니다.
나는 로엔을 향해 밝게 미소를 지었다.
“공평한 처사죠?”
제르미는 웃으며 내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현명한 처사 같은데요?”
아무래도 그 대상이 로엔이 아닐까 봐 한편으로는 불안해하는 것 같은데.
답을 듣지 못한 로엔이 조금 아쉬워하는 모습을 보니 미안하긴 했지만.
내가 지금 말을 해주지 않는 까닭은 이들을 다시 만나, 다시 즐거운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였기 때문이었다.
때마침 타이밍 좋게 시카르와 대화를 나누던 레이독스가 의자를 뒤로 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표정을 보아하니 얘기가 잘 된 모양이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너무 오래 머무르면 안 될 것 같군요.”
로엔과 제르미도 밝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에 만나면 그땐 베로니아 공주님과 함께일 거예요.”
꼭 그럴 수 있었으면 한다.
나는 떠나는 로엔과 아쉬운 포옹을 끝내며 말했다.
“다시 만났을 땐 두 분 얘기를 듣고 싶어요.”
그러자 로엔은 내게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말했다.
“저도 듣고 싶어요. 공작님의 허리에서 칼을 내려놓게 한 비결을요.”
“아…….”
내가 당황한 표정을 짓자 로엔은 장난꾸러기처럼 웃으며 자리를 떠났다.
다시 만났을 때도 로엔이 내게 이렇게 장난스럽게 웃는 미소를 보여 주기를 바라며 나는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
그동안 나는 완드를 사용하는 법을 제법 익혔다.
마법을 부리는 것 외에는 신체 능력이 둔감한 마법사들이 사용하는 물건이라서 그런지 마찬가지로 신체 능력이 둔감한 나도 금방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을 만큼 매직 완드의 성능은 매우 좋았다.
“반복적인 훈련을 하다 보면 실력이 오르지 않을 수가 없지.”
그의 말대로 같은 것을 매일 반복하다 보니 지금은 훨씬 더 수월하게 목표물을 맞추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베로니아의 처형식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매일 같이 후작저를 다니던 키안은 그동안 공작저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했지만, 이상할 만큼 이유조차도 묻지 않았다.
내일 거사가 실패할 수도 있겠지만, 성공을 하든 실패를 하든 쌍둥이들은 무조건 공작저로 올 것이다.
베로니아를 찾게 된다면 시카르가 국왕을 바로 칠 것이고, 찾지 못하게 된다면 다시 베로니아를 수색할 것이니 당분간은 안전을 위해서라도 꼼짝없이 공작저에서 지내야 하겠지.
내일 당장 시작될 일들이기에 나는 미리 키안에게 설명을 해야 했다.
“그래. 미리 말하는 게 나을 것 같군. 네가 말하기 뭣하면 내가 하지.”
“아니야. 같이 해.”
“그러지 뭐.”
그나마 키안의 일상중 변함이 없는 것이 있다면, 비카에게서 열심히 정령 수업을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다만, 달라진 게 있다면 이제 정령 수업은 수련의 방에서 받고 있었다.
그만큼 키안이 많이 성장한 까닭이었다.
수업이 끝날쯤,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자 비카와 함께 키안이 땀을 닦으며 들어왔다.
비카는 내게 목례만 하고 지나갔고 키안은 나를 발견하고 반가운 듯 활짝 웃었다.
“어머니!”
걸어 들어오는 모습이 얼마나 늠름하던지 내 눈에는 그 무엇보다 멋있고 사랑스러워 보였다.
“키안! 오늘도 수업 잘 받았어?”
“네. 어머니.”
“힘들진 않았고?”
“블레이크 사람에게 이 정도는 끄떡도 없어요.”
이제 보니 어느새 키안은 자부심으로 똘똥 뭉친, 블레이크 사람이 다 돼 있었다.
비카가 저렇게 가르친 건 아닐 테고. 아무래도 시카르 같은데. 종종 키안와 정령 수업을 함께 하는 것을 봤긴 한데, 그때 이렇게 가르친 걸까.
“그런데, 어머니. 무슨 일로 절 기다리신 거예요?”
“응. 할 얘기가 있어서 기다렸어.”
“그럼 저 씻고 나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응. 천천히 씻어.”
“네. 어머니!”
키안은 활짝 웃으며 계단으로 올라갔다.
내일도 키안이 저렇게 활짝 웃을 수 있는 좋은 소식을 들려줘야 할 텐데.
다이닝 룸으로 가자 시카르는 키안이 좋아하는 닭고기 수프 맛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날 보며 물었다.
“키안은?”
“응. 씻고 나온대.”
“비카와 듀리온에게는 따로 식사를 하라고 일렀으니 셋이서 식사하며 얘기를 나누는 게 좋겠어.”
“시카르. 네가 먼저 얘기해.”
“그러지.”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막막해서 시카르에게 먼저 하라고 시킨 거지만, 그가 너무 덤덤하게 대답하는 바람에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
“아니야. 너 하지 마.”
“그래.”
아무래도 저 돌직구 성격에 ‘내일 베로니아가 죽을지도 모르는데 그녀가 바로 네 어머니다.’라고 할 것 같아서 하지 말라고 했긴 한데, 막상 또 내가 먼저 운을 떼려니 한숨부터 나왔다.
“시카르. 네가 먼저 얘기한다면 뭐라고 할 생각이야?”
“내일 베로니아가 죽을지도 모르는데 그녀가 바로 네 어머…….”
“됐어. 그만해.”
혹시나 몰라서 물어본 건데 역시나 내가 생각한 것과 똑같았다.
저 무미건조한 감성은 이럴 땐 정말 도움이 안 되는구나.
비카에게 물어볼까 싶었지만, 그녀의 대답도 어느 정도 예상이 되는 것 같았다. 물어보나 마나 ‘도련님 친모가 내일 죽을 수도 있으니까 각오 단단히 해.’라고 하겠지.
듀리온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도련님의 친어머니가 내일 죽을 수도 있겠지만 상심 마십시오! 사람은 모두 죽으니까요!’ 이렇게 말할 게 안 봐도 훤했다.
정말 이 공작저에서는 이럴 때 도움을 받을 사람이 한 명도 없구나.
할머니라도 계시면 조언을 구할 수 있겠지만 할머니께 이런 말을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안드레아에게도 할 수도 없는 말이었다.
뭐라고 먼저 말을 꺼내야 할지 한참을 생각하고 있다 보니 어느새 씻고 나온 키안이 새 옷으로 갈아입고 옆으로 와서 앉았다.
키안이 자리에 앉자마자 식사가 곧장 나왔다.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나는 뭐라고 입을 떼야 할지 고민스러워서 한숨이 나왔다.
내 옅은 한숨을 들었는지 키안은 곧장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머니. 무슨 고민 있으세요?”
“아. 그러니까 그게…….”
키안의 맑은 눈과 마주하니 모든 걸 솔직하게 말할 자신이 없었다.
베로니아 얘기는 나중에 해도 좋겠지.
“키안. 내일 유카나다르의 쌍둥이들이 집으로 올 거야.”
쌍둥이들이 집으로 오는 일이 흔해서인지 키안은 별 반응 없이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번엔 좀 오래 머물 거야.”
이번에는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을 줄 알았지만 키안은 이번에도 덤덤하게 대답했다.
“네. 어머니.”
“그게…… 하루 이틀이 아니라 짧으면 몇주, 길게는 몇 달에서 몇 년이 될 수도 있어.”
키안은 이번에도 별 표정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머니.”
키안이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는 게 나는 이상했지만 시카르는 별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키안. 갑자기 쌍둥이들이 몇 달씩 지내게 됐는데 궁금하지 않아?”
“음…… 네.”
나는 당황스러워서 시카르를 쳐다봤지만, 그는 역시나 별 표정이 없었다.
“키안. 어째서 궁금하지 않은지 물어봐도 될까?”
“물론이죠.”
“어째서 궁금하지 않은 거야?”
키안은 내 질문에 손에 든 식기를 내려놓으며 날 보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내일 베로니아 공주님이 처형되는 날이니까요.”
키안도 알고 있었구나. 근데, 그것과 레이독스가 무슨 상관인 줄 알고 궁금해하지 않은 거지?
내가 그 사실을 묻기도 전에 키안이 먼저 내게 말했다.
“제 짐작이 맞다면, 스승님께서 베로니아 공주님을 구하기 위해 내일 루시와 루이드를 공작저에 맡기는 걸 테고요.”
이런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니. 나야말로 키안이 이런 걸 짐작하고 있다는 사실에 크게 놀랐다. 키안이 이런 사실들을 대체 어떻게 짐작할 수 있었는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아니라고도 맞다고도 대답할 수 없었던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물어보듯 시카르를 쳐다보았다.
시카르도 이번엔 조금 놀란 것 같았다. 그는 의외라는 듯 키안을 쳐다보며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베로니아 공주님이 저를 낳아주신 분이라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