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베로니아 (5)
(107/197)
107화. 베로니아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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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화. 베로니아 (5)
2022.06.09.
“지금 공작님이 우는 건가?”
“웃는 거 아닌가?”
“우는 것 같은데?”
루시와 루이드는 시카르가 우는 건지 웃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웃으며 우는 것 같기도 하고 헷갈렸다.
“우리가 죽는 줄 알고 놀란 건가?”
루이드가 긴가민가하다는 듯 묻자 루시는 절대 그럴 리가 없다는 듯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설마. 공작님이? 우릴 싫어하시잖아. 절대 그럴 리 없어.”
“하긴. 그건 그래.”
“그치? 그래서 나도 공작님을 좋아해 주지 않을 거야.”
유라는 그동안, 루시와 루이드가 시카르에게 버릇없게 굴어도 남의 아이기 때문에 뭐라고 하지 않으려했다.
애들이 아직 어린데다 시카르가 어른이니까 시카르가 조금 더 이해해주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보니 유라는 자신이 크게 잘못 생각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루시. 공작님께 그게 무슨 말버릇이지?”
유라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반가움에 활짝 웃던 루시는 처음 보는 유라의 매서운 표정에 주눅이 들었다.
“네?”
“일전에 공작님께 사탄이라고 말한 것도 도가 지나쳤어. 알고 있지?”
물론 루시는 알고 있었다. 알고 했던 행동이니까.
“하지만 공작님께서는 네 그런 무례한 행동도 나무라지 않고 넘어가주셨어. 너도 그걸 모르는 건 아니겠지?”
“네…….”
“공작님께서 너희를 미워 하고 싫어하신다면 그냥 그렇게 넘어가 주실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니?”
루시와 루이드는 그제야 자신들이 얼마나 잘못했는지 깨달았다. 루시는 잔뜩 기가 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아니요.”
“방금도 공작님께서는 너희가 잘못된 줄 알고 불길 속으로 뛰어들려고 하셨어.”
미간을 찌푸리진 않았지만 유라는 그 어느 때보다 무서웠다.
쌍둥이들은 공작을 자신들을 위해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는 말을 믿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유라도 아이들이 믿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내 말이 믿어지지 않는다면 당장 나가서 공작의 모습을 보도록 해. 공작님은 지금 얼굴부터 손까지 모두 그을리셨으니까. 그리고 내 말이 맞다면 반드시 공작님께 사과해.”
쌍둥이들이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고 서 있자 유라의 목소리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어서!”
유라의 일갈에 쌍둥이들은 곧장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서 있던 서연이 깊은 한숨을 내쉬는 유라의 곁으로 다가 왔다.
“그동안 아이들이 어리다는 이유로 너무 봐줬긴 하죠. 잘하셨어요. 공작부인.”
하필 이런 날 쌍둥이들에게 뭐라고 하고 싶진 않았기에 유라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오는 건 한숨뿐이었다.
서연은 누구보다 그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유라의 손을 조심스레 다독여 주었다.
***
쌍둥이들은 서로 먼저 가라고 떠밀면서도 조심조심 시카르의 앞으로 다가섰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시카르는 쌍둥이들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지?”
루시는 눈치를 살피듯 시선을 몇 번 돌리다 미안한 마음에 고개를 슬쩍 숙이며 말했다.
“저, 공작님…… 전에 버릇없게 굴어서 죄송해요.”
“저…… 저도 동생이 버릇없게 구는데 말리지 않아서 죄송해요.”
아이들이 미안한 마음에 어쩔줄 몰라 하며 서 있자 시카르는 벌떡 일어서 쌍둥이를 향해 다가갔다.
시카르의 표정이 워낙 어두웠기에 쌍둥이들은 겁을 먹고 서로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뒤로 물러서서 도망가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데, 시카르가 다가와 쌍둥이들의 머머리 위로 각각 손을 올렸다.
저주 때문에 매우 차가운 손길이었다. 하지만, 공작저 안이 불길로 인해 뜨거웠으므로 쌍둥이들에게는 무엇보다 시원한 손길이었다.
“무사해서 다행이다. 이 말을 못 해줬군.”
시카르는 그렇게 쌍둥이들의 어깨를 몇 번 더 다독여주고 난 후 유유히 자리를 떠났다.
이상했다. 분명히 차가운 손길이었는데, 따뜻하게만 느껴졌다.
쌍둥이들은 각각 시카르가 어루만저주고 간 자신의 머리를 한 번씩 더 만져 보았다.
분명히 감각은 차가운데, 따뜻했다.
그제야 쌍둥이들이 자신들이 따뜻하게 느끼는 것이 시카르의 손이 지나간 머리가 아니라 마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
처형장으로 향하는 죄인을 태우는 호송마차가 지나가는 길목 중에는 강줄기를 지나는 다리가 있었다.
레이독스 일행은 다리에 호송마차가 지나가는 시간을 대비해 미리 부비트랩을 설치해둔 상태였다. 다리가 무너지는 즉시 떠내려가는 마차와 미리 준비해둔 마차를 바꿀 요량이었다.
새로 변한 제르미가 다리 위를 선회하며 마차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말을 탄 근위대를 필두로 수십 명의 왕의 근위대가 호송 마차와 함께 다리를 향해 걸어왔다.
부비트랩을 설치할 때, 길게 이어지는 반응에 작동하도록 설치를 했기 때문에 사람과 말이 지나갈 때는 반응하지 않던 부비트랩이 호송마차의 바퀴가 굴러가는 것에는 반응했다.
콰르르쾅쾅!
부비트랩이 작동하며 한순간에 다리가 무너져 내렸다.
“자리를 지켜라!”
“죄인을 태운 호송마차를 수호하라!”
호송을 책임 맡던 지휘관이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한순간에 다리가 무너지는 바람에 지나치던 근위대들은 속수무책이었다.
앞서가던 근위병들도 갑자기 일어난 폭발에 모두 납작 엎드렸고 뒤따르던 근위병들은 자욱한 연기에 시야가 가려져 눈 뜬 장님이 되었다.
“무슨 일입니까!”
“어떻게 된 겁니까!”
“다리가 폭발했다!”
“호송마차가 강에 떠내려갔다!”
누가 외치는 말인지도 모르게 자욱한 먼지 사이로 목소리만이 여기저기서 들리는 형국이었다.
다리를 지나가다 강에 함께 빠진 근위병들 중에는 마차는 뒤로하고 혼비백산해서 육지를 향해 수영을 하는 근위병이 있는가 하면, 강줄기를 떠나려 가는 마차를 잡기 위해 수영하는 근위병도 있었다.
마차를 따라가는 근위병을 볼 때마다 제르미는 파도를 일으켜 그들의 시야를 가렸다.
“호송마차를 끌고 가는 말이 하류를 따라 이동할 테니 강줄기를 따라 아래로 이동하라!”
근위대들은 지휘관의 말에 따라 마차가 떠내려올 지점을 향해 내달렸다.
근위대들이 더는 강가에 있는 마차를 따라가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제르미도 자리를 따났다.
강줄기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던 레이독스는 떠내려오는 마차를 끌고 가던 말의 고삐를 붙잡았다.
말이 하류를 향해 내려갈 때마다 하류를 따라 함께 내려가려는 말의 고삐를 잡고 방향을 바꾸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물줄기의 흐름이 아래를 내려가다 보니 숨이라도 내쉴라하면 입안으로 물이 한가득 들어왔다.
하지만 죽을 힘을 다해 말머리를 돌려야 했다. 다행히 늦지 않게 제르미가 나타났다.
제르미는 먼저 마차 안에 있던 베로니아의 생사를 확인했다. 두 손이 뒤로 묶여 있고 두건을 쓰고 있었지만 몸이 떨리고 있는 것을 보니 살아 있는 건 분명했다.
제르미는 물속으로 뛰어들어와 말 고삐 하나를 잡았다. 두 남자는 각각 고삐를 하나씩 잡고 상류로 거슬러 올랐다.
로엔은 바꿔치기할 마차를 강줄기가 흐르는 길목 중 물이 맞닿는 곳에 미리 대기 시켜놓았다.
시간이 지나자 근위대들이 저 멀리서 호송 마차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마차 안에 사람이 없다는 것까지 확인했을 땐 이미 레이독스 일행이 강주변을 완전히 떠난 뒤였다.
***
레이독스는 호송마차를 이끌고 설산으로 향하는 산맥까지 내달렸다.
만약 근위대가 끝까지 따라붙거나 동료 중 누군가 발각되면 시카르가 말했던 설산으로 대피할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레이독스는 산맥 중앙까지 오고 나서야 마차를 멈춰 세웠다. 두 남자는 로엔과 공작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마차에서 내렸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제르미는 공주의 머리에 씌워진 두건을 아직 벗기지 않은 것이 떠올랐다.
“참. 공주님의 두건을 벗겨 드려야 할 것 같은데.”
“그럼, 공주님이 아직 두건을 쓰고 계셔?”
“응.”
레이독스는 참으로 답답하다는 듯 제르미를 노려보았다.
“제르미. 그런 건 진작 벗겨 드렸어야지.”
“아깐 너도 알다시피 그럴 정신이 없었잖아.”
“이제라도 벗겨 드려야겠지.”
“그래. 어서 가서 벗겨 드려.”
“그래. 가서 벗겨 드려라.”
보통이라면 자신이 하겠다고 할 레이독스가 공주님의 두건을 벗기는 일을 자신에게 미루는 이유를 제르미는 알고 있었다.
베로니아 공주님의 두건을 벗기는 일이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제르미도 그건 어렵기 매한가지였다.
하지만 매번 제르미의 강짜에는 속수무책이었던 레이독스는 또 자신이 졌다는 듯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어두운 마차 안에 누더기 같은 옷을 입고 주저 앉아 있는 공주를 보니 레이독스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놀라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저하. 실례지만 두건부터 벗겨 드리겠습니다.”
레이독스는 조심스럽게 공주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두건을 벗겼다.
두건을 거두자 밝은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여인이 나타났다. 레이독스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송구하다는 듯 금세 눈을 내리깔았다.
“죄송합니다. 공주님. 무례했습니다.”
하지만 공주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주 잠시지만 마주한 눈빛이 너무나 허망해 보였기에 레이독스도 더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곧 공주님을 무사히 모실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레이독스가 마차에서 나오자 제르미는 얼른 그에게 가서 궁금한 것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공주님은 어때 보여? 어디 다친데는 없으셨어? 놀라진 않으셨어?”
레이독스는 귀찮은 듯 들러붙는 제르미를 살짝 밀어냈다.
“그렇게 궁금하면 네가 마차 안으로 들어갔어야지.”
“그러려고 했지만 네가 있는데 뭣하러?”
그렇게 뻔뻔하게 나올 줄 이미 알고 있었다. 레이독스는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제르미가 궁금해했던 것들을 모두 대답해 주었다.
“다행히 공주님은 무사하시고 다친데도 없으시고 다친 데가 있다 하더라도 왕족이시라 공주님 스스로 치유가 가능하시고 놀라 보이지도 않으셨다.”
“그렇군. 역시 이런 상황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으셨군.”
“한 가지 걸리는 게 있다면, 전혀 아무 말씀도 없으시다는 것뿐이지만.”
“혹시 고문 같은 걸 당하신 게 아닐까?”
“글쎄. 공주님이 말씀을 안 하시니 알아낼 방도가 없군.”
거기서 두 남자의 대화가 끊겼다. 허기로 인해 대화를 나눌 힘도 없다는 듯이.
제르미는 일행이 어디까지 왔는지도 확인할 겸 주변을 경계하기 위해 새로 변신해서 살피다 로엔을 발견하고 다시 돌아왔다.
“로엔이 오는 중이야.”
“생각보다 빨리 오는 군. 다행이다.”
“근데 빈손이야. 이제 공작님만 오면 되겠군.”
제르미는 이제 거의 다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안도의 탄식이 절로 나왔다.
곧이어 나타난 시카르가 상상하지도 못한 말을 하기 전까지는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