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등잔 밑이 가장 어둡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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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화. 등잔 밑이 가장 어둡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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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화. 등잔 밑이 가장 어둡다 (1)
2022.06.13.
저녁이 되자 허기진 제르미는 로엔이 오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렸지만, 로엔은 빈손이었다.
“국왕의 근위대가 따라잡아서 오는 길에 식료품을 살 여유가 없었어요.”
“어쩔 수 없죠. 무사한 것만도 다행이에요. 로엔 님.”
“국왕의 근위대가 날이 바짝 서 있더군요. 공작님께서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지나 모르겠어요.”
“그 정도로 삼엄한 상태입니까?”
“네. 지금 도시 곳곳은 빵 하나를 살 수 없을 만큼 병사들이 깔려있어요. 관문마다 지나가는 행인 모두를 검문 중이라 공작님께서도 쉽게 오시진 못할 것 같아요.”
“밖에 사정이 그 정도라니……. 걱정되는 군요.”
“제르미. 나가서 공작님이 어디쯤 오셨는지 보고 올 수 있겠어?”
제르미는 누구보다 자신의 몸 상태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마력이 떨어진 데다 배까지 고픈 탓에 매우 지쳐 있었다.
“지금은 아무것도 못 해.”
“물속에 오래 있었으니 더 지쳤겠지.”
사람도 말도 모두 허기와 추위에 지쳐 있었다.
“그렇다면 할 수 없지. 공작님이 무사히 도착하시리라 믿고 기다려야지 뭐.”
제르미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나무에 기댔다.
“근데, 공작님이 우리 뱃속 사정까지 봐주진 않겠지?”
“공작님이 이곳에 무사히 오는 것도 쉽지 않을 거예요. 지금 공작저도 감시가 삼엄하거든요.”
“로엔 님의 말대로 하지 않았다면 상황이 더 나빴겠군요.”
하지만 여전히 안심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로엔은 마차 안을 눈짓하며 물었다.
“공주님은 몸 상한데 없이 괜찮으신가요?”
레이독스는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조금…… 존체가 상하셨습니다.”
“그렇군요. 공주님께서도 시장하실 텐데 아무것도 사 오지 못해 송구하네요.”
“그것도 그렇지만, 이제 밤이라 쌀쌀해질 텐데 공주님께 덮어드릴 옷도 마땅히 없군요.”
“공작님이 오실 때까지만 기다려요.”
“그 수밖에 없겠습니다.”
시카르를 기다리며 각자 나무 기둥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던 세 사람은 인기척 소리에 모두 신경을 곤두세웠다. 조금 전 지쳐 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바짝 날이 선 이들은 나무 기둥에 숨어 동태를 살폈다.
곧 말발굽 소리가 끊기며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사람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고 가방 두 개가 앞으로 툭 떨어졌다.
세 사람은 서로 눈짓만 주고받을 뿐 아무도 앞으로 나서지 않았다.
상황을 더 눈여겨보는 동안 발자국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고, 이윽고 두건을 쓴 한 사내가 나타났다.
얼굴을 곧장 식별하기에는 두건 때문에 쉽지가 않았지만 곧 이은 말투에 레이독스는 그가 시카르임을 확신할 수가 있었다.
“까불지 말고 나와라. 레이독스.”
레이독스는 제르미와 로엔에게 그가 공작이 맞다는 사인을 보내며 밖으로 나왔다.
“오셨습니까. 공작님.”
“공주님은 무사하신가?”
“네. 마차 안에서 쉬고 계십니다.”
“공주님을 만나봐야겠다. 방금 던진 가방 안에 음식이 있으니 식사부터 하도록 하지.”
일말의 기대도 없었던 제르미는 시카르가 던져준 음식을 보고 절이라도 할 뻔했다가 씨익 웃으며 가방을 열었다. 안에는 빵과 고기 우유 등이 보따리 가득 들어 있었다.
“이제야 힘 좀 쓸 수 있겠는데.”
순례를 돌며 배고플 일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지만, 오늘은 유독 기력을 많이 소모한 탓에 기절하기 직전이었다.
마차 안으로 들어선 시카르는 공주에게 예의를 갖추며 한 쪽 무릎을 꿇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이렇게밖에 모실 수 없었던 점을 양해 부탁드립니다. 공주 저하. 당분간 국왕을 피해 제가 모시고 있을 테니…….”
말을 하다 고개를 들어 올린 시카르는 그제야 베로니아의 얼굴을 볼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 얼굴은 베로니아가 아니었다. 시카르는 그 즉시 베로니아의 옆에 떨어져 있는 두건을 들어 그녀의 얼굴에 씌웠다.
그러곤 즉시 여자의 기억을 읽으며 밖을 향해 고함쳤다.
“레이독스!”
식사보단 물을 먼저 마시고 있던 레이독스는 급히 마차 안으로 들어왔다.
“찾으셨습니까. 공작님.”
“공주가 아니다.”
레이독스는 한 번에 시카르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네?”
“이 여자는 공주가 아니라고!”
“그게 무슨 말입니까? 공주님이 아니라니요?!”
“누구도 공주의 얼굴을 모르니 목 뒤에 왕족의 문장을 새겨넣고 공주인 척 위장시킨 노예다. ”
“노, 노예라고요? 그럼 우리가 구한 게 공주님이 아닌 노예였단 말입니까?”
“함정이었다. 국왕은 이번 기회에 반역자를 모두 색출하려고 한 것 같군. 이 여자의 눈을 통해 이미 너희는 노출되었다.”
“그, 그럼 공작님은 괜찮으십니까?”
그제야 시카르는 눈 아래를 가리고 있던 두건을 벗었다.
“이 여자와 눈이 마주치지 않았으니 괜찮겠지.”
하지만 레이독스는 그것만으로는 안심할 수가 없었다. 파시움이 이 여자의 눈을 통해 사물을 보았다면 목소리도 들었을지도 모르니까.
“그럼, 지금 저희가 나누고 있는 대화는…….”
“듣지 못한다. 이 노예는 보는 것만 전달하는 마법이 걸려 있으니까. 파시움도 내가 기억을 본다는 건 상상도 못 할 테니 이런 마법을 걸었겠지. 내가 베로니아의 얼굴을 알고 있다는 것은 더더욱 모를 테고.”
“하지만 그 여자가 공주님이 아니라는 건 어떻게 확신하시는 겁니까?”
“이 여자가 정말 베로니아 공주였다면 이 여자의 기억을 볼 수 없었을 테니까. 한서연이 그건 말해주지 않은 모양이지?”
“네. 서연 님께서는 공작님에 대한 말씀을 많이 해주시진 않으셨습니다. 그냥 기억을 보는 것만 조심하라고 일러주셨을 뿐이라…….”
“그랬군. 어쨌든 보기만 하고 듣지는 못한다. 사물을 볼 수 있는 마법을 거는 것또한 엄청난 마력이 들어가니, 듣는 것까진 마법을 걸지 않은 것 같군. 다행히 마차 안에서만 있어서 장소는 노출되지 않았을 것이다.”
레이독스는 이제야 사태가 이해되는 것 같았다.
“그럼 그동안 저희는 진짜 베로니아 공주님을 찾아보겠습니다.”
“저 아이는 마법에 걸려 있어서 아무것도 기억 못 할 테니 깨어나기 전에 어디든 보내주어라. 그리고 나와 소통할 때는 전령 새를 보내되 서신은 보내지 말도록 해라.”
“네?”
“사람뿐 아니라, 동물에 대한 기억도 읽으니 전령 새에게 네가 남길 말을 하란 말이다.”
“알겠습니다.”
시카르는 허탈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베로니아를 무사히 구하려고 했던 계획이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군. 어쩐지 너무 일이 쉽게 풀린다고 생각은 했었지만 유쾌하진 않군.”
“공작님. 우리 쌍둥이들은…….”
“장작들 사이에 숨겨서 데리고 올 줄 알았더니 감쪽같이 변장을 시켰더군. 왜 나한테 미리 언질을 주지 않았지?”
“장작을 싣고 가면 그들이 장작에 불을 지를 거라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쌍둥이가 마부로 분장한 것을 공작님께 미리 아셨다면, 장작에 불이 나도 공작님께는 신경 쓰지 않으셨겠죠. 그럼 파시움은 그땐 마부를 의심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놈이 그럴 놈이긴 하지. 대화 능력은 상실했어도 지능은 더 오른 놈이니까.”
“대화 능력을 상실했다는 건…….”
“파시움 그놈이 제 혀와 눈을 제물로 썼다는 말이다.”
“결국 파시움께서는 그리하였군요. 한때는 상당히 총기가 넘치시던 분이셨는데.”
“총기가 아니라 야욕이 큰놈이었던 것이겠지. 어쨌든 그딴 놈 얘기는 그만하고 네 놈이 묵을 곳이나 정하고 나한테 전령 새를 보내도록 해라. 제르미는 화살을 맞을 수도 있으니 오지 마라 이르고.”
“알겠습니다. 공작님.”
“공작저를 오래 비워둘 수 없으니 나는 이만 가봐야겠다.”
***
시카르가 공작저를 나서고 난 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왕의 심복이자 왕후의 오빠인 정령사 라페가 공작저를 찾았다.
이런 일을 예상했던 시카르는 만일을 대비해 공작저에 듀리온과 비카를 두고 혼자 떠난 것이었다.
라페가 도착한다면 문을 열어주라는 시카르의 명령만 아니었다면 듀리온은 문도 열어주지 않았을 것이었다.
“흉악한 놈이 공작저를 찾았군요. 모두 2층에 올라가 있는 것이 좋겠습니다.”
듀리온의 말이 마치 위험을 알리는 경고와도 같이 들렸던 탓에 거실에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던 유라와 서연은 곧장 2층으로 올라섰다. 어차피 라페라는 인물을 바로 앞에서 보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으니까.
거실로 들어선 라페는 의미심장한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이상하군. 이곳에서 정령의 냄새가 나는군.”
키안을 두고 떠보는 말이었지만, 듀리온은 그런 말에 움찔거리지 않았다.
“이곳엔 비카가 있으니까.”
“아. 그렇지. 그 버릇없는 다크 엘프가 여기 있었지.”
그 버릇없는 다크엘프 비카는 2층에서 얘기를 엿듣고 있다가 내려갈까 했지만, 만일을 대비해 유라의 방에서 모두와 함께 있었다. 혹시라도 키안이나 유라를 납치해가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
듀리온은 지겹다는 듯 하품을 하며 말했다.
“오늘 처형식 때문에 바쁘지 않나? 여긴 대체 무슨 일이지?”
“글쎄. 처형식 때문에 바쁜 건 레카도르가 아니라 블레이크인 거 같은데.”
“말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공작님께서 널 가만두지 않으실 테니까.”
“파시움에게 들으니 공작님의 저주가 제법 진행됐다지?”
평소라면 벌써 칼을 꺼내 들고 칼부림을 했을 듀리온이었지만, 시카르가 절대 칼을 먼저 꺼내 들지 말라고 했기에 꾸욱 눌러 참았다. 듀리온은 자꾸만 손이 칼을 잡으려는 것을 꾸욱 눌러 참으며 라페를 향해 웃었다.
“파시움과 경쟁상대라던데, 파시움의 말을 꽤 신뢰하나 봐?”
“경쟁상대지만 거짓말을 하는 상대는 아니니까.”
“그거야 모르지. 들어보니 욕망에 눈이 멀어 혀와 눈을 제물로 바쳤다던데, 그런 자가 뭔들 못하려고.”
“참 이상하단 말이지. 공작은 어째서 너처럼 표정 하나 숨기지 못하는 멍청한 놈을 수하로 들였을까.”
틀린 말이 아니었다. 라페와 대화를 나누며 듀리온의 얼굴은 몇 번이나 붉으락푸르락 거렸으니까.
듀리온은 다시 한번 시카르의 말을 떠올리며 꾹 눌러 참고 말했다.
“여긴 왜 왔냐고.”
“국왕 전하께서 공작님을 부르셨다.”
“그럼 전갈을 보내면 될 것을 왜, 네놈이 직접 온 거냐고.”
“너도 들어서 알겠지. 처형장으로 향하던 베로니아 공주가 납치되었다는 것을 말이야.”
“그래서.”
“그 배후가 누구인지 찾는 과정에서 유카나다르 후작이 그 핵심인물이라는 것은 밝혀졌다.”
“그런데?”
“레이독스가 요즘 블레이크 공작과 막역하게 지냈다는 것도 다들 잘 알고 있을 테고.”
“막역? 무슨 근거로 막역하다고 지껄이는 거지? 공작님과 레이독스의 사이가 나쁜 건 레카도르 시민들이라면 다 아는 이야기일 텐데.”
“그건 옛날얘기지. 요즘은 누구보다도 가깝던데. 서로 자주 저택을 오갈 만큼 말이야.”
“소공자님의 교육을 맡긴 것뿐 다른 일로 엮인 건 없어.”
“반역죄에 휘말리지 않으려면 그 증거를 잘 밝혀내야 할 것이다.”
“왕후 전하 생신연회 때 공작님이 레이독스에게 대하는 걸 본 수많은 사람이 그 증거가 되어주겠지.”
라페는 그야말로 빤히 보이는 거짓말을 비웃듯이 웃었다.
“지금 다들 몸을 사리기 위해 안달인데 과연 증인으로 나서줄까? 행여 블레이크랑 잘못 엮었다 반역자가 될 수도 있는데?”
“역시 공작님 말이 맞았어.”
“무슨 소리지?”
“공작님께서 말씀하시길. 네놈이 혀를 잘 놀리는 놈이라고 하셨거든. 갖고 있는 힘이 약해서 놀릴 줄 아는 건 그 혀밖에 없다고 하셨지. 우리 공작님께서 사람 하나는 정말 기가 막히게 잘 보시는군.”
라페는 이를 바득 갈았지만, 더는 입을 놀리지 않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일 국왕 전하를 뵙고 난 후에도 그렇게 기고만장일 수 있을지 기대하지.”
“기대하지마. 기대하면 실망도 크다니까.”
라페의 약을 바짝 올리긴 했지만, 듀리온의 마음은 여전히 찝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