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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화. 등잔 밑이 가장 어둡다 (2) (109/197)


109화. 등잔 밑이 가장 어둡다 (2)
2022.06.16.


창가에 서 있던 유라는 라페가 공작저를 나가는 것을 확인하며 키안을 안아주었다.


‘이제 공주님이 오고 나면 모두 끝나겠지?’

유라는 키안과 포옹을 나누며 시무룩한 얼굴로 앉아 있는 쌍둥이들도 안아주었다.


“후작님께서도 곧 오실 테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련.”

“정말요?”

“물론이지.”

사람들의 우려와는 달리 쌍둥이들은 싸우지도 않고 무척이나 얌전히 있었다. 밥을 먹을 때마다 의자 하나를 두고 서로 먼저 앉겠다고 다투던 것도 멈추었다.

후작이 마차에서 불이 난다고 해도 당황하지 말고 저택으로 재빨리 피신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쌍둥이들은 심각하게 듣지 않았었다. 장작을 실은 마차에서 불이 나는 사고는 종종 있었으니까.

아버지가 당분간 출장을 가느라 공작저에 잠시 머무는 것이라고 했지만, 이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쌍둥이들은 그것이 다가 아님을 직감할 수가 있었다.

근위대를 이끈 국왕의 심복이 다녀가는 것을 보고 나서는 제 아버지의 소식을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쉽게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런 차에 신뢰 가는 공작부인이 먼저 소식을 전해주었던 것이다.

그제야 쌍둥이들은 조금 안심할 수가 있었다.

유라와 서연도 아이들이 눈치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평소처럼 공부를 시키고 일찍 재웠다.

아이들이 잠든 후 공작저에 남아 있는 유라와 서연, 듀리온과 비카는 거실에 모여 따뜻한 차를 마시고 고단함을 풀고 있었다.


“모두 고생 많으셨어요.”

그 말은 곧, 더 힘내라는 말과도 같았고 비카는 이미 그렇게 들렸는지 거실 의자에 거의 드러눕다시피 앉아 있었다. 편한 자세로 앉아 있긴 했지만, 그녀의 신경은 저택 밖을 향해 곤두서 있었다.


“공작이 오는군.”

비카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다들 용수철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지만 비카의 다음 말 때문에 밖으로 나가진 않았다.


“아직 저택까진 안 왔으니 앉아들 계세요.”

비카의 귀가 밝아 이미 저 멀리서 오는 소리부터 듣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미 일어난 사람들은 다시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초조한 마음으로 시카르를 기다렸다.

서연은 레이독스의 소식이 궁금했고, 유라는 공주님을 어디에 모셔두었는지가 궁금했다.

듀리온은 전투태세를 유지하며 칼을 닦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카르가 하인들의 시중을 받으며 저택으로 들어섰다.

유라는 시카르가 무사히 도착했다는 것에 안도했고, 다음으로는 드디어 키안이 공주를 만날 수 있을 것이란 희망에 설렜다.

하지만 들어선 시카르의 첫마디는 유라뿐 아니라, 거실에 모여 있는 모두를 실망하게 만들었다.


“공주님이 아니라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어?”

유라는 당황한 나머지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는 예의를 갖추기로 한 것까지 까먹을 정도였다.


“길리언이 이용가치가 있는 공주를 순순히 처형할 리가 없는데 우리가 순진하게 곧이곧대로 믿은 것이지.”

“그렇다면, 함정이라는 말이야?”

유라의 예리한 물음에 시카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똑똑하군. 어떻게 된 일인지 궁금할 테지. 설명해줄 테니 모두 앉도록.”

시카르는 레이독스 일행이 모두 무사하고, 베로니아 공주를 찾지는 못했지만 공주가 무사하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긴장하고 있던 유라는 한시름을 놓았다.

레이독스가 무사하다는 말에 서연도 안도한 듯 긴 탄식을 내쉬었다.


“그럼 이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더 복잡해졌겠어.”

유라의 씁쓸한 질문에 모두가 시카르의 대답을 주목했다.


“상황이 더 힘들어지긴 했지만, 공주가 아직 살아 있으니 희망은 있다.”

‘그래. 무엇보다 중요한 건 공주님이 살아 있다는 것이겠지.’

그래도 완전히 좌절할 정도는 아니라고 유라는 생각했다.


“키안에겐 내가 잘 말할게.”

“아니 내가 말하지. 다음번엔 반드시 찾아주겠다고 말이야.”

유라는 내색하진 않았지만, 마음 한편이 따뜻해졌다. 지금 유라에겐 그보다 든든하고 고마운 말은 없었으니까.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자 듀리온은 기다렸다는 듯 라페가 다녀간 얘기를 꺼내려고 했지만, 유라의 기억을 읽고 난 시카르가 먼저 얘기를 꺼냈다.


“국왕이 나를 찾았군?”

아직 시카르가 기억을 보는 것을 모르는 듀리온은 자신이 이미 말했는지 생각해보았지만, 그런 기억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마님이 먼저 얘기를 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공작님을 함정에 몰기 위해 유인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잠자코 있던 비카도 그 말에는 동의했다.


“내일 왕궁으로 가는 즉시 감옥에 수감될 지도 모르지.”

“차라리 아프다는 핑계라도 대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런 건 시카르의 방식이 아니었다.


“다른 귀족들도 모두 불러서 함께 갈 것이다.”

“다른 귀족들과 함께요?”

“처형장으로 가던 베로니아 공주가 납치되는 바람에 귀족들은 자신들이 반역죄에 휩쓸릴까 봐 모두 몸을 사리고 있지.”

“그러니, 귀족들과 함께 간다면 더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그들은 모두 폐왕을 지지하던 세력이었지. 하지만, 내가 길리언을 왕좌에 앉히자마자 마음을 바꾼 자들이다. 그런 자들이 볼 때, 공신인 내가 반역죄로 몰린다면, 자신들도 안전하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생기겠지. 그러니 그들도 자신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 내 편을 들 것이다.”

비카도 그 말에는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진짜 반역자가 누구든 간에 그들에게 중요한 건 불똥이 자신들에게 튀지 않는 거니까.”

시카르는 귀족들의 습성을 잘 알고 있었다. 제 재산을 지키고 제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표리부동할 수 있는 자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시카르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도 살벌했다.


“나를 건드렸다가 다른 귀족들에게도 반감을 사게 된다면, 이번에 몸을 사리게 되는 사람은 길리언 그놈일 것이다.”

 

 

***

[반역자들이 죄인을 가로채 처형식이 거행되지 못하였다. 아직 반역자를 색출하지 못하였으니 누구도 반역의 의심에서 벗어날 수 없을 터. 충성 맹세를 번복한 적이 있는 자들은 더더욱 의심을 피하기 힘들 것이다. 허니, 각 귀족들은 모두 입궁하여 스스로의 결백을 입증해 의심에서 벗어나라.]

시카르가 새벽 일찍부터 이 같은 서신을 귀족들에게 보내었던 탓에 모두 저 살겠다고 엉덩이에 불이라도 붙은 듯 서둘러 입궁하였다.

어전 앞은 아침부터 모여든 귀족들 때문에 계획에도 없던 어전 회의가 진행되었다.

길리언은 이 모두가 시카르의 계략임을 눈치챘기에 매우 심기가 불편했다. 평소 겉으로 표정을 잘 드러내지 않은 길리언도 오늘만은 예외였다.


“무슨 일로 이른 아침부터 찾아오셨습니까.”

길리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시카르가 보란 듯 말했다.


“이럴 때일수록 귀족들이 충성의 맹세로 전하를 더 보필함이 옳기에 모이게 되었습니다.”

시카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길리언이 왕좌에 앉자마자 폐왕을 배신한 자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전하. 감히 여기 모인 10인의 귀족들은 모두 전하께 충성을 바쳤습니다. 우리가 평안히 살 수 있는 것은 모두 전하의 덕임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요.”

“우리가 전하의 손과 발이 되어 반역자 유카나다르 후작을 돕고 있는 조력자를 찾아내도록 하겠습니다.”

한 사람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다른 귀족들도 속속들이 말을 거들기 시작했다.


“조력자를 색출해 우리 중 그 누구도 전하를 배신할 자가 없음을 스스로 입증해 보이겠습니다.”

이들은 모두 누구 하나라도 엮이면 같이 반역자로 몰릴까 봐 서로의 결백을 밝혀주고 있는 형국이었다.

시카르가 원하는 그림 그대로였다. 돌아가는 상황이 마음에 쏙 드는 듯 시카르는 귀족들을 대표해서 말했다.


“유카나다르 후작은 전하께서 왕좌에 앉을 때부터 불만을 가진 간악한 놈입니다. 누가 그 간악한 자와 손을 잡았는지 낱낱이 밝혀내 전하께 그 목을 바치겠습니다.”

마치 그 이전에 합이라도 맞춘 듯 곁에 있던 귀족들도 모두 그에 동조했다.


“그리하겠습니다.”

길리언은 시카르의 아들 소공자를 다시 확인해보기 전에는 온전히 그를 신뢰할 수가 없었기에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않았다.

오늘 블레이크를 수색하기 위해 시카르를 불렀던 것이기에 의혹은 더욱 커질 뿐이었다.

검은 눈의 여인이 아니었다면 이런 의혹도 품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귀족들이 저들 살겠다고 모여서 단합을 하고 있었기에 이 자리에서는 조용히 넘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길리언은 독대를 통해 그들을 회유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이대로 시카르를 보낼 수는 없었다. 그에게는 경고가 필요하니까.


“그렇다면 블레이크 공작께서 귀족들을 대표해 유카나다르 후작을 비롯한 조력자들을 색출해 주시겠습니까?”

“반드시 색출해내겠습니다. 반역자를 숨겨주는 자들까지도 말입니다.”

시카르의 미묘한 웃음은 길리언의 심기를 건드렸다.


“블레이크 공작께서 힘을 주시니 든든하군요. 오늘 모인 그대들의 충정을 더는 의심치 않을 테니 다들 물러가도록 하시오.”

“전하. 조력이 필요한 일이 있으시면 언제든 불러주십시오. 항상 전하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블레이크 공작께는 할 말이 있으니 남아 있도록 하시오.”

시카르는 어차피 예상했다는 듯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터였다.

귀족들이 모두 자리에서 물러나자 길리언은 호의적인 미소를 거두고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암살자를 색출해서 진상하겠다는 약속은 아직 지키지 못하셨습니다. 그런데, 반역자는 색출하겠다?”

“송구합니다.”

“암살자는 색출하지 못했지만 반역자는 반드시 잡아주겠지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이번엔 전하를 실망 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과연, 기대를 해도 좋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아주 재미있을 것입니다.”

“공작께 또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길리언이 무슨 질문을 할지 시카르는 알고 있었기에 표정에서 여유가 사라지지 않았다.


“말씀하십시오.”

“유카나다르 후작과 제법 친밀한 사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공작께서는 후작이 반역을 꾀하고 있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하셨습니까?”

“믿을 만한 교사에게 아들을 맡긴 것뿐이었습니다.”

“정말 그것이 답니까?”

“그것이 다가 아니라면, 제가 그 건방진 후작 놈과 친분을 맺을 일이 있겠습니까.”

시카르의 말은 대부분 거짓말이었지만 레이독스를 건방지다고 표현한 것만은 진심이었다.

길리언은 여전히 온전히 신뢰할 수 없다는 듯 비릿한 미소로 물었다.


“그래요? 그런데 일전에 후작가에서 공작가에 병사를 지원한 것은 어떻게 설명하실 겁니까?”

“블레이크에서 유카나다르에 정령 트랩을 지원해주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앞뒤 아귀가 딱딱 들어맞긴 했다. 교묘하게 잘 빠져나가는 건지 진실인지 길리언은 완전히 갈피를 잡기 힘들었지만, 한 번 시작된 의심은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 법이었다.


“그렇군요. 어쨌든 약속을 지키지 못하셨으니 그 상인 놈은 이제 제게 보내야겠습니다. 베로니아를 납치당했으니 이제 그 상인 놈이라도 본보기로 단두대에 매달아야겠으니 말입니다.”

제 뜻대로 되지 않으니 심술이라도 부리겠다는 심산은 여전하군.

시카르는 군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시카르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길리언은 그가 마음 편히 떠나게 내버려 두지만은 않았다.


“이번엔 레이독스 후작을 반드시 잡아 올 거라 믿어도 되겠습니까?”

그렇겠지. 순순할 리가 없겠지.

시카르는 고개를 돌리고 웃으며 길리언을 더 자극하는 말을 남겼다.


“기대보다 더 놀라게 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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