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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화. 등잔 밑이 가장 어둡다 (3) (110/197)


110화. 등잔 밑이 가장 어둡다 (3)
2022.06.20.


시카르가 공작저를 비운 사이에 나는 초조해서 한시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길리언이 증거를 모아뒀다가 시카르를 왕궁으로 유인해서 그를 고문한다거나 문초를 가한다거나 하는 짓을 할까 봐 걱정이 되었으니까.

비카가 아니었다면 숨 한 번 쉴 때마다 한숨을 쉬었을지도 모른다.


“마님. 정신 사나우니 조금 앉아 있으면 안 되겠습니까?”

비카의 따뜻한 충고에 자리에 앉긴 했지만 초조한 마음은 역시나 가시지 않았다.


“비카님. 공작님께서는 무사하시겠지요?”

“다른 귀족들을 대동하고 가셨잖아요. 만만하신 놈이 아니시니 별일 없으실 겁니다.”

그거야 그렇긴 하겠지만…….

길리언도 만만치 않은 놈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 마음이 편치 않을 수밖에 없었다.

서연은 친절하게도 내게 따뜻한 차를 한잔 건네주었다.


“따뜻한 차라도 한잔하시면 좀 나을 거예요.”

“제가 손님인 서연 님을 챙겨야 하는데, 민망하군요.”

“공작님께서 무사히 도착하실 테니 그때 챙겨주시면 되죠.”

 

 
마음만큼 미소가 고운 서연의 말은 무엇보다 위로가 되는 말이었다.


“그렇겠죠?”

서연은 전혀 걱정할 게 없다는 듯 나를 향해 윙크까지 해 보였다.


“당연하죠.”

사람들의 말처럼 시카르는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유유히 공작저로 돌아왔다.

나는 그가 너무 반가웠지만, 겉으로는 내색하기가 민망해서 소파에 앉아 그가 내 옆으로 와서 앉는 것을 물끄러미 보며 말했다.


“괜찮아?”

시카르는 뭐가 괜찮은지 묻느냐는 듯 무심한 얼굴로 나를 볼 뿐이었다.


“보다시피 얻어터진 데 없이 멀쩡하다.”

아니, 누가 얻어터졌는지 물었나. 협박을 받았다거나 그런 건 아닌지 물은 거지.

어쨌든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을 보니 마음이 툭 놓였다.

시카르는 안드레아가 내온 물을 한잔 마시고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듀리온. 터커를 불러와라.”

왕궁을 다녀온 뒤로 터커를 찾을 일이라면, 국왕이 그를 불렀다는 뜻일 것이다.


“설마 터커를 넘겨줄 생각은 아니지?”

비카는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마님. 지금은 작은 것 하나도 꼬투리를 잡힐 수 있습니다만? 우리 안전이 먼저예요. 마님의 마음이 불편한 건 알겠지만 더는 실기할 수 없어요. 안 그래? 공작?”

시카르는 조용히 나와 비카를 쳐다보았다.


“어쨌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간이고 그 시간은 벌어둔 셈이긴 하지.”

부정의 대답은 아니었기에 비카는 확인하듯 재차 물었다.


“그래서 국왕의 명령을 어기고 그 상인 놈을 풀어주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우리 쪽에서 풀어주는 건 반역 행위와도 같겠지.”

비카는 불안이 해소된 듯 다시 의자에 등을 기대앉았다.


“이제 좀 말이 통하네.”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인가.


“시카르. 정말 이 방법밖에 없어?”

“비카의 말대로 지금으로서는 꼬투리를 잡힐 일은 피하는 게 좋으니까.”

“하지만 사람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일인데…….”

“녀석의 명이 거기까지밖에 안 되는 거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우리가 그를 위해 희생할 필요는 없겠지만, 뻔히 죽게 될 것을 알면서도 보내야 한다는 것에 대해 무력감이 들었다.

듀리온과 함께 온 터커는 마치 제 죽을 신세를 아는 것처럼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걸어왔다.


“부르셨습니까. 공작님.”

“국왕이 너를 찾는다.”

“그렇다면 가봐야겠죠. 그동안 보살펴주셔서 감사합니다.”

자기 죽는 거 아니냐고 반문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질문 하나 없이 너무나 아무렇지 않은 듯 공손히 인사를 올렸기에 나는 그를 보기가 무안했다.


“왕궁으로 가게 되면, 너는 즉시 지하 감옥에 갇히고 단두대에 올라서게 될 것이다.”

터커는 이번에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침착하게 대꾸했다.


“네. 공작님. 알겠습니다.”

터커의 그런 덤덤한 모습은 내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지만, 시카르는 그 말에 자극을 받은 것 같았다.


“알겠다고?”

“네. 공작님.”

“네 놈이 죽는다는데 살려달라는 말도 없이 알겠다는 말이냐?”

“국왕 전하의 명령을 거역을 할 수는 없으니까요. 저를 지금까지 공작저에 머물게 해주셨으니 그동안 공작님께서도 최선을 다하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거면 됐어요.”

너무 덤덤하게 말해서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그럴수록 시카르는 터커에게 더욱 호기심을 보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최선을 다했으니 괜찮다? 네겐 홀 할머니가 있다고 들었다. 네가 없으면 그 할머니는 굶어 죽을 수도 있는데 괜찮단 말인가?”

“공작님께서는 위험한 줄 알면서도 저를 거두어 주셨습니다. 겨우 고개약 하나의 대가로 제게 마차도 주셨고요. 제가 죽을 때까지도 고개약을 판 사람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면, 공작님께서는 분명히 제 할머니를 거두어 주실 거라 믿습니다.”

그랬구나…… 터커가 그래서 길리언의 성화에도 고개약을 사 간 자가 누구인지 말하지 않은 거야.

고개약을 사간 자가 시카르라고 말을 했어도 국왕이 자신을 죽였을 것이라는 것을 터커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자신은 죽더라고 제 할머니만은 살리기 위해서, 시카르라면 할머니를 거두어 줄 거라 철썩같이 믿고 그동안 입을 다문 것이었다.

터커의 그런 점들을 본 시카르는 그가 범상치 않다고 느끼듯 계속 호기심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네가 나를 믿었다는 것인가?”

“네.”

“내 어딜 보고 날 믿은 거지?”

“공작님은 늘 무표정하시고 말을 무섭게 하시지만, 결정적인 상황에서는 저를 감싸주신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공작님의 말과 미소가 아닌 행동을 보고 신뢰를 얻었습니다.”

시카르는 고민하듯 턱을 괴고 한참을 무언가를 생각하다 말했다.


“조금 아깝군.”

“네?”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기엔 아까운 목숨이라는 말이다.”

방금 전까지 편안한 얼굴로 의자에 등을 기대앉던 비카는 용수철처럼 다시 튕겨 나왔다.


“그게 무슨 말이야?!”

“터커를 순순히 내어주지 못하겠다는 말이다.”

“뭐?”

비카는 한마디로 간단하게 대답했지만, 그 말투에는 제정신이냐는 말도 포함된 것만 같았다.

시카르는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를 하듯 제 턱을 살짝 긁었다.


“도망간 놈을 두고 국왕도 내게 뭐라고 할 수는 없겠지.”

시카르가 다른 사람의 목숨도 생각할 줄 알게 된 것에 대해 나는 내심 감동했지만, 비카는 시카르가 머리를 다치고 온 건 아닌지 의심하고 있었다.


“공작, 제정신이 맞긴 한 거지?”

“까불지 마라. 비카.”

시카르가 그렇게 마음을 먹었다면 설득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는 비카로서는 그 일을 더 따지는 게 쓸모없다고 느꼈는지 더는 묻지 않았다. 그냥 불만스러운 듯 구시렁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던 터커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시카르를 쳐다보았다.


“그럼 저를 살려주시겠다는 말인가요?”

“말은 똑바로 해야지. 내가 살려주는 게 아니라. 네가 도망가서 내가 어쩔 수 없이 국왕에게 널 넘기지 못하는 상황이 된 것일 뿐이다.”

그 말이 그 말이지.

터커는 머리가 바닥에 닿도록 엎드려 절을 하며 눈물을 흘렸다.


“감사합니다. 공작님. 감사합니다. 공작님.”

그의 눈물을 보자, 그동안 강한 척은 하고 있었지만, 그가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었는지 가늠이 되었기에 코끝이 찡해져 왔다.


“나중에 네가 쓰임이 있을 때가 올 것 같아서 살려주는 것이니, 목숨 귀한 줄 알고 잘 살아있거라.”

“네! 네! 공작님이 살려주신 목숨이니 귀한 목숨이고 말고요! 반드시 살아서 공작님께 이 은혜를 갚도록 하겠습니다.”

“은혜는 무슨. 거래일 뿐이다. 언젠간 그 목숨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될지도 모르니 너무 좋아하진 마라.”

“네. 공작님. 명심하겠습니다! 명심하고 말고요!”

시카르는 안드레아를 불러 터커의 짐을 싸게 만들었다.


“하인으로 변장을 시키고 말 한 마리를 내어줘라.”

“네. 공작님.”

시카르의 명령을 받은 안드레아는 그의 짐들을 챙기기 위해 하인들과 함께 터커의 방으로 향했다.


“네 할머니는 레페르 대신전에 모셔 놓았으니 그리로 가면 될 것이다.”

“네? 저희 할머니가 레페르 대신전에 계시다고요?”

“그래. 거기는 국왕도 함부로 어쩌지 못하는 곳이니 안심해도 될 것이다. 할머니를 찾은 후 당분간은 북부에 가 있어라.”

“알겠습니다. 공작님.”

주도면밀한 인간 같으니. 언제 터커의 할머니를 레페르 대신전까지 옮겨 놓았을까. 무심한 척해도 사람들 챙길 건 다 챙기고 있다니까.

나는 일어나 터커에게 손을 내밀었다.


“잘 살아남거라.”

“네. 마님. 그동안 베풀어주신 은혜.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나도 시카르를 닮아가는 것일까. 어딘가 감동을 느낀 탓일까. 말이 길게 나오지 않았다.


“의리를 지켜줘서 고마웠다.”

“의리라니요. 도리였을 뿐입니다. 마님.”

터커가 아쉬운 얼굴로 기다리는 동안 안드레아가 짐을 실은 짐가방을 들고 나왔다.


“제가 들고 가겠습니다. 하녀장님.”

“됐다. 내가 안내해 줄 테니 같이 나가자.”

“아닙니다. 그동안 신세 졌는데 이건 제가 들고 가야 합니다.”

보고 있던 시카르는 안드레아에게 들어가라는 듯 손짓했다.


“도망가는 놈에게 손수 짐가방을 들어준다면 그건 정말 이상한 일이겠지. 들어가지. 안드레아.”

“하지만, 손님이신데.”

“그 손님이 우리 몰래 공작저를 나가고 싶어 하니 안드레아도 들어가서 이만 잠을 청하도록 하지.”

“그럼, 가기 전에 작은 선물이라도 하나 할 수 있게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공작님.”

안드레아가 저렇게 터커를 챙기는 것을 보면 집에 있는 동안 사람들과 꽤 잘 지낸 듯 보였다.


“허락하지.”

시카르의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안드레아는 미소 띤 얼굴로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무슨 선물을 해주려고 저러는 걸까. 그렇다면 나도 터커가 가기 전에 선물을 하나 해줘야겠지.


“터커. 날 따라와.”

“네. 마님?”

“우리 집 하인들과 잘 지내줬으니 나도 선물 하나 주고 싶어서 그래.”

터커는 아쉬움 반, 후련함이 반 묻어나는 얼굴로 나를 따라왔다. 자리에 앉아 있던 시카르도 터커가 날 따라오자 은근슬쩍 자리에서 일어나 날 따라왔다.

그런데, 내 방으로 들어오던 터커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어, 이것은.”

“뭐, 문제라도 있나?”

“아, 아닙니다. 이 문양이 여기 있는 게 신기해서.”

무슨 문양을 말하는 거지?

터커는 별거 아니라는 듯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아, 아닙니다. 여기 문짝에 있는 낙서가 익숙해서 말씀을 드렸을 뿐이었습니다.”

보석함을 살피던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터커에게 물었다.


“잠깐만, 터커!”

“네?”

“여기 문양이라면 이 거미 문양을 말하는 거야?”

“네. 마님.”

“이걸 어디서 봤는데?”

거미 문양을 얘기하자, 복도 끝에 삐딱하게 서 있던 시카르도 방 안으로 들어왔다.


“거미 문양이라니. 파인더가 찾았다는 그 문양을 말하는 건가? 그 문양이 왜 문짝에 그려져 있는 거지?”

“아, 아까 낮에 아이들이 여기 낙서를 했거든.”

시카르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겨우 억누르고 있다는 얼굴로 이를 깨물었다.


“낙서라고?! 아이들이 이 문짝에 대고 낙서를 했다는 말이야?!”

“응. 그렇게 됐어.”

“누가?”

“루시가.”

“왜?!”

“거미가, 집을 지켜준다는 말이 있다고 그렸어. 보고 따라 그릴 거미가 없어서 파인더가 남긴 거미 문양을 보고 따라 그려서 여기 남은 거야. 안 그래도 곧 지울 생각이었어.”

시카르는 화가 나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이, 문짝은 100년을 넘게 이 집을 지키고 있던 것이다…….”

“애들이 그런 걸 알 리가 없잖아.”

나는 말을 돌리기 위해, 터커에서 물었다.


“그런데, 터커. 이 문양을 봤다는 말이야? 아니면 이 거미를 봤다는 말이야?”

“이 문양이요. 똑같이 생긴 걸 본 적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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