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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화. 등잔 밑이 가장 어둡다 (4) (111/197)


111화. 등잔 밑이 가장 어둡다 (4)
2022.06.23.


똑같은 거라니.

시카르는 곧장 터커의 손을 잡으려다 그에게 물었다. 어차피 내게 다시 설명을 해야 하니 차라리 터커의 입을 통해 듣게 하는 것 같았다.


“설명해봐. 이 문양을 어떻게 알고 있다는 거지?”

“왕궁 지하 감옥에 갇혔을 때 똑같은 걸 본 적이 있어요.”

“왕궁 지하 감옥?”

“네.”

“거긴 왜 들어갔는데?”

“그때 상인들이 밀린 물품 대금을 빨리 지급하라고 항의했다가 모조리 갇힌 적이 있었거든요.”

“폐왕의 집권 시절을 말하는 것이군.”

“네. 맞아요. 그때 감옥에서 이것을 봤어요.”

“그 방이 몇 번 방인지 알고 있나?”

“물론이죠. 저희가 바로 그 감옥을 탈출했거든요. 그리고 감옥을 탈출한 그날 폐왕의 처형식이 이루어졌어요.”

터커는 거기까지 말하고 시카르에게 존경을 눈빛을 보내며 두 손을 모았다.


“바로 공작님께서 폐왕의 목을 치신 그날이요. 그때 폐왕이 단죄를 받지 않았다면 저희를 다시 잡아 가두었겠지만 왕권이 바뀐 덕분에 저희는 무사할 수가 있었지요.”

베로니아 공주를 찾던 파인더가 저 문양을 찾았고, 터커가 갇혀 있던 곳에는 저 문양과 똑같은 것이 있었다.

그렇다면, 공주가 갇힌 곳이 왕궁의 지하 감옥이라는 건가?

시카르는 나와 같은 생각을 한 것인지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등잔 밑이 어두웠군. 왕궁의 지하 감옥이라니 생각도 못 했군.”

“저희가 갇혀 있던 그 방은 지하 끝방에 있는 독방이었습니다.”

“물품 대금을 항의한 게 죽을죄는 아닌데, 너희를 왜 지하 독방에 가둔 것이지?”

터커는 이제 와서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는 얼굴이었다.


“폐왕이 왕궁의 지하 감옥에 죄 없는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가두었는지, 다른 방은 자리가 다 차서 없다고 하더군요. 다음 날 윗방에 갇힌 누군가의 사형이 집행된다고 했는데, 그게 끝나면 저희를 옮겨준다고 했습니다.”

“그래. 폐왕은 그런 놈이니 그랬겠지.”

“그럼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야?”

내 물음에 시카르는 잠시 생각을 하다 터커를 노려보았다.


“터커.”

터커는 그 맹렬한 눈빛에 맞설 재간이 없다는 듯 주눅든 얼굴로 눈꼬리를 내렸다.


“네? 네. 공작님…….”

“네가 그곳을 탈출했다고?”

“네. 지하 감옥을 탈출했었습니다. 제가 주도한 건 아니고, 전 사람들을 따라 움직였을 뿐이지만요.”

“나오는 방법도 안다면 다시 들어가는 방법도 알고 있겠군?”

터커는 난처한 표정이었지만 곰곰이 생각하다 말했다.


“시도는 안 해봤지만 도전한다면 성공은 할 수 있을 것 같긴 합니다만…… 그건 왜……?”

“그럼 시도해 보도록 하지.”

“네?”

“가서 확인해봐야 할 사람이 있으니 가서 잠깐 확인만 하려고 한다.”

“그러시다면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아마 죽을지도 모르겠지만요.”

터커는 용감하다고 해야 할지 무모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런 말을 하면서도 미소 짓고 있었다.

조금 전만 해도 죽을 뻔한 사람이 또 죽음을 각오해야 할 그런 위험한 일에 동참하려 하다니, 한편으로는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한편으로는 바보라고 해야 할지.

판단하기란 쉽지는 않았지만 시카르가 목숨을 살려줄 만큼 범상치 않은 사람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았다.


“제가 공작님을 모시겠습니다.”

“거기가 네놈의 묘가 되면 어쩌려고 그렇게 웃는 거지?”

“상관없으니까요.”

“뭐?”

“신세를 졌고 신세를 갚는다면, 전 제 할 일을 다 한 것일 테니까요.”

터커는 바보같이 웃었고 시카르는 바보같이 웃는 터커를 보며 심드렁한 듯 눈을 반쯤 떴다.


“범상치 않는 놈인 줄 알았더니 그냥 바보였군.”

뭐, 착하다는 말이겠지.


“그럼 우린 서재로 가서 얘기 좀 나누어 볼까?”

“저야 영광입니다.”

시카르는 나가기 전 보석함을 쥐고 있는 나를 쳐다보았다.


“참, 터커에게 뭘 주려고 한 것 같은데.”

나는 터커를 향해 보석함을 내밀었고, 시카르는 또 한 번 입에 거품을 물듯 나를 쳐다보았다.


“부인? 이건 제가 드린 선물 같습니다만.”

“이것을 모두 준다는 건 아니고 이 중 마음에 드는 거 하나만 고르란 거였어요.”

“하지만 이건 제 선물입니다만?”

시카르는 어떻게 자기가 준 선물을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냐는 얼굴이었지만, 터커에게는 무엇보다 돈이 필요할 것이고 내게 돈 될 만한 것이라곤 이것뿐이었기에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제겐 많으니까 하나만 줄게요.”

하지만 터커는 내가 내민 보석함을 보고 눈이 부신다는 표정을 지을 뿐 탐을 내진 않았다.


“이렇게 많은 보석은 처음 봐요.”

“그렇지? 나도 처음이야. 하나만 골라. 터커.”

“아, 아니에요. 마님. 저는 공작님 눈 밖에 나는 것도 싫고.”

역시 그게 무서운 거군.


“아무튼, 제게는 너무 과분한 물건인 것 같아요.”

시카르는 터커가 기특하다는 듯 그의 목덜미를 다시 한번 더 지그시 눌렀다. 이제 보니 시카르가 터커의 목을 눌러서 터커가 이 보석들을 거절한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내가 브로치 하나를 꺼내서 터커에게 주려고 하자, 그는 손사래를 치며 방을 빠져 나갔다.

역시 시카르가 무력으로 겁을 준 게 틀림없는 것 같은데.

시카르는 내가 들고 있는 보석함의 뚜껑을 닫아버렸다.


“내가 준 선물을 다른 사람에게 아주 막 쓰는군.”

“막 쓰는 거 아닌데, 고맙잖아. 너를 믿어주고 우리를 믿어주는 그 마음이 예쁜데 이 정도 성의는 보여도 된다고 생각했어.”

“그 마음에 대한 보상은 내가 할 테니 내가 준 선물은 잘 보관해주시죠. 부인.”

시카르가 보상을 하겠다고 했으니 확실히 해주겠지.


“근데 터커는 어떻게 되는 거야? 보내는 거야? 아니면, 공작저에 있게 둘 생각이야?”

“국왕이 터커를 내놓으라고 하는 상황이니 이제 터커를 더는 여기에 둘 수 없겠지. 국왕이 그 핑계로 공작저를 수색하게 둘 수도 없을 테니까.”

“그럼 이제 터커는 어떡해?”

“터커는 오늘 밤중으로 계획을 세운 후 공작저에서 내보낼 것이다.”

“터커를 어디로 보낼 작정이야?”

“그건, 일이 끝나면 얘기해주지.”

결국, 말 안 하겠다는 거네.

시카르는 내게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방을 나갔다.


 


“보석 잘 간직해. 그건 내 선물이니까.”

 

***



“후작이 보낸 전령 새가 도착했습니다.”

새벽 동이 트기 전부터 공작저로 전령 새가 도착했다. 하지만, 서신은 없었다.

시카르는 전령 새의 기억을 통해 레이독스의 위치를 살폈다.


“오늘 밤, 나는 베로니아 공주를 찾기 위해 왕궁의 지하감옥으로 들어갈 계획이다.”

위험을 감지한 듀리온은 왠지 공작을 혼자 보내면 안 될 것 같았다.


“오늘 당장 출발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실기하면 베로니아를 빼돌릴지도 모르니 지금이 적기겠지.”

요즘 들어 부쩍 시카르의 손이 자주 동상에 걸려 있었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그의 팔 한쪽이 또 동상에 걸려 있었다.

그런 공작을 적의 소굴로 들어가게 내버려 두려니 듀리온의 마음이 편치 않았다.


“공작님. 그 일은 제가 하면 안 되겠습니까?”

기억을 보고 찾아야 하는 일이었기에, 누구도 대신 보낼 수가 없었다.


“너는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게 무슨 일입니까?”

“전령새를 이용해 당장 레이독스에게 서신을 보내고 내가 공작저에 도착할 때까지 마님을 지켜라. 베로니아를 찾게 된다면 오늘 밤이 숙청의 밤이 될 테니까.”

“그런 일이라면, 공작저는 비카만 지켜도 되지 않겠습니까.”

“국왕이 키안을 노릴테니 비카만으로는 안 된다.”

“국왕이 왕손 저하의 신분을 확인하려고 한다 생각하십니까?”

“그러니 네가 비카를 도와 공작저를 잘 지켜야 한다. 무슨일이 있어도 반드시 마님을 지켜라.”

공작은 지금 예전의 그 위세 높던 공작이 아니었기에 듀리온은 선뜻 알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공작님의 손은 정말 괜찮겠습니까.”

“오늘 밤이 돼 보면 알겠지.”

“이제 공작님도 처자식이 딸린 몸이지 않습니까. 조심하십시오.”

시카르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 처자식이 딸린 몸이니 조심해야지.”

듀리온은 자신이 모시는 주인이 사지로 걸어 들어가는 것을 보는 것 같았다. 그렇기에 마음이 편치 못했다.


“나중에 나가실 때 배웅하겠습니다.”

“까부는구나. 이깟 저주가 좀 더 발현됐다고 해서 네까짓 게 걱정할 정도로 약해빠지진 않았다.”

자존심이 강한 주인이었다. 나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가장 큰 수치로 여기는 주인이었다. 주인이 걱정되는 만큼 그 마음도 헤아려야 했다.

듀리온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깨달았다. 그것은 주인이 맡긴 임무를 가장 잘 수행하는 것이리라.

***

레카도르를 비추던 해가 떨어지고, 땅거미가 꺼졌다.

코끝의 감각을 잃을 만큼 왕궁으로 통하는 하천에서는 물이 썩어가는 냄새가 진동했다.


‘하필 만나도 이런 곳이라니.’

시카르는 하천 부근 풀숲에 앉아 터커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터커는 시카르가 말한 제시간에 나타나 멍청하게도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보고 서 있었다.


‘당장 숨을 것이지.’

시카르는 답답한 듯 한숨을 내쉬며 풀숲 사이로 슬금슬금 다가가 터커의 팔을 잡고 내렸다.


“으아압…….”

놀란 터커가 비명을 지르려 하자, 시카르가 낼름 그의 입을 막았다.


“침입자가 여기 있다고 알려줄 게 아니면 조용해.”

“고, 공작님……?”

“그래. 나다. 이놈아.”

“왜 이런데 숨어 계십니까.”

“그럼 내가 여기 있으니 잡아가 달라고 광고라도 하란 말이냐?”

“아…….”

아. 이런 멍청한 놈과 무얼 한다는 건지. 이 자식을 버려두고 올 것을 괜히 같이 왔나?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터커의 기억만 보고 오기에는 지하 감옥의 생김새는 미로와도 같았다.

터커의 말에 따르면, 길을 찾아가려면 길목마다 있는 냄새를 맡아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터커와 같이 올 수밖에 없었다. 냄새에 대한 기억을 맡을 수는 없으니까.


“그런데 찾으시는 분이 누구이신 거예요?”

“네가 알 바 아니다.”

“죄송합니다. 공작님.”

“길이나 잘 안내해라. 만약 내가 찾던 그 사람이라면 네가 평생 쓰고도 남을 보상을 내릴 테니까.”

터커가 제아무리 상인이라 해도, 아픈 할머니를 잘 부양하기 위해서 먹고 살기 위해서 돈을 번 것이었지. 돈에 큰 욕심이 많아서는 아니었다.

터커는 됐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웃을 뿐이었다.


“괜찮습니다. 제가 바라는 건 보상이 아니니까요. 반드시 공작님이 찾아야 하는 그분이시면 되니까요.”

“걱정 마라. 내가 찾던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네게 잘못을 묻지는 않을 테니까.”

“공작님이 찾으시는 분이니 당연한 중요한 분이시겠죠?”

“이 왕국의 역사를 바꾸게 해주실 뿐이지.”

터커는 더욱 밝은 표정을 지으며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제야 확신이 들었어요. 제가 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요. 저만 믿으십시오. 공작님! 반드시 공작님이 찾는 그분일 테니까요!”

터커는 그 누구보다도 씩씩한 기상으로 시카르를 수로로 안내했다.

어슴푸레한 달이 비추는 컴컴한 수로를 향해 두 남자가 낮은 포복으로 걸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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