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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화. 등잔 밑이 가장 어둡다 (5) (112/197)


112화. 등잔 밑이 가장 어둡다 (5)
2022.06.27.



 
사람 몇 명이 지나다닐 수 있는 어둡고 좁은 수로에서는 고약하고 퀴퀴한 냄새가 진동했다.

미로 같은 수로는 갈래길이 많아 길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터커가 기가 막히게도 냄새로 잘 찾아가고 있었다.


“제가 코가 개코거든요.”

당시에 상인들이 감옥을 탈출했지만, 폐왕이 처형되며 관련자들 모두가 처형당했기 때문에 왕궁은 한동안 어수선했고, 자신들의 실책이 탄로나기를 두려워했던 교도관들은 이를 상부에 보고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상인들이 감옥을 탈출한 사건은 비밀리에 부쳐졌다.

미로 같은 수로를 지나 시카르 일행은 겨우 배관과 가까운 통로까지 들어올 수 있었다.

어느 정도 들어서고 나자, 터커는 더는 전진을 멈추었다.


“여기서부터는 공작님 혼자서 가는데도 무리가 없을 거예요. 막다른 길이 나오면 그때 통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세요. 그럼 지하 감옥이 나올 거예요.”

“그렇군. 그럼 넌 이제 나가봐라. 여기서부턴 나 혼자 갈 테니까.”

“그런데 이곳에 문제가 좀 있어요.”

“문제?”

“제가 탈출할 때는 빗장을 걸어서 작동하지 않았지만, 이곳 수로는 원래 침입자나 탈출을 막기 위해서 2분에 한 번씩 수로를 통해 물살이 내려오게 설비했습니다. 그래서 물살이 내려오면 배관 통로 위로 올라가서 물살이 다시 빠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지하 감옥으로 연결된 통로까지 전진해야 해요. 일반적인 파도 따위와는 차원이 달라서 장정 두 명도 쓸어 버린다고 해요.”

“그래?”

“네. 그런데, 2분이 되기 전에 통로가 있는 구간까지 뛰어야 하는데, 아무리 재빨리 뛰어도 통로까지 가는 데는 3분이 넘게 걸려요.”

“그럼 물살에 다시 떠내려 갈 수밖에 없다는 말이야?”

“네. 그렇죠.”

“물살에 떠내려가면 어떻게 되는 거지?”

“수로를 따라 레카도르 외곽의 강까지 떠내려가게 됩니다. 그때쯤이면 호흡부전으로 인해 이미 산송장이 되겠지요.”

터커가 범상치 않은 놈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수로까지 들어와서 이런 소리를 하는 녀석에게 화를 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놈이 여기까지 자신을 끌고 왔다면 분명히 방법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럼, 어떤 방법을 써야 이 수로를 지나갈 수 있다는 거지?”

“매우 간단해요. 공작님께서는 시타르 족이시죠? 시타르 족은 힘이 세잖아요. 일반인들이라면 물살에 떠내려가겠지만 공작님이라면 버티실 수 있을 거예요. 물살이 내려오는 소리가 들리면 그땐 전진을 멈추고 벽을 짚고 버티세요.”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럼…….”

“네. 저는 곧, 물살에 떠밀려 떠내려갈 거예요.”

그 말은, 터커는 이미 이곳으로 올 때부터 자신이 물살에 떠내려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말과도 같았다.

자신이 죽을 걸 알고도 여기까지 따라와 안내해준 터커를 보며 인정에 흔들림이 없는 시카르도 이번만은 흔들렸다.


“나가자. 다시 밖으로 데려다주마.”

“아니요. 공작님께서는 이곳을 나가면 다시 여기까지 올 수 없을 거예요.”

“그럼 너…… 정말…….”

그때 통로에서부터 물살이 세찬 소리를 내며 몰아쳐 오는 소리가 들렸다. 시카르는 시선을 돌려 통로 안쪽을 살폈다.


“그럼 나를 꼭 잡고 있어라. 내가 너 정도는 붙들고 있을 수 있으니까!”

시카르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이미 터커는 몸을 뒤로 이동한 상태였다.


“아니요. 저까지 잡고 있다가 공작님까지 떠내려갈 수 있어요. 공작님의 왼쪽 손이 얼어 있는 걸 봤거든요. 오른손 한 손으로 버터야 하는데 저까지 붙들고 있기는 힘들 거예요.”

“죽여버리기 전에 이리 와라.”

“제가 죽어도 마님께서는 제 할머니를 잘 보살펴 주시겠죠. 할머니를 부탁드려요.”

“이 미친놈이!”

“오지 마세요! 발걸음을 떼는 순간 공작님도 급물살에 휩쓸려 가게 될 거예요! 공작님께서 언젠가 제가 쓰임이 있을 때를 대비해서 살려주신다고 하셨죠? 지금이 바로 그때일 뿐이에요. 부디 무사하시기를!”

터커는 마지막 인사를 하듯 고개를 숙였다. 그 순간, 시카르는 발걸음을 떼려고 했지만, 급물살이 코앞까지 내려왔다. 빠른 속도로 내려온 물살은 순식간에 시카르를 덮치고 들어왔다.

벽을 붙잡고 있는 손가락 하나라도 떼어낸다면 순식간에 물살에 휩쓸려 떠내려갈 것 같았다. 눈을 뜨려고 해도 거센 물살 때문에 눈을 뜰 수조차 없었다.

물살은 멈추지 않았고, 폐활량이 부족한 사람이라면 물살에 떠내려가지 않고 그 전에 익사를 할 것처럼 물살은 꽤 오랫동안 떠밀려왔다.

물살이 통로로 채우며 떠밀려 온 만큼 빠지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통로는 언제 그랬냐는 듯 촉촉한 물기만 머금은 채 다시 텅 비어 있었고, 터커는 온데 간데 보이지 않았다.

이 모두가 순식간에 일어난 찰나의 일들이었다.

그의 냉정한 머리는 터커를 애도할 시간 따위를 주지 않았다.

온몸이 흥건히 젖은 시카르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서두르지 않으면, 물살에 떠밀려 내려가 강가를 떠도는 시신으로 발견될지도 모르니까.

시카르는 급물살을 버티며 묵묵히 통로를 전진해 나갔다. 그리고 막다른 길로 들어섰다.

벽이 있어야 할 곳은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저곳이 바로 물살이 흘러나오는 곳이리라.

시카르는 그 안으로 들어가 물탱크를 확인했다. 그리고 빗장을 완전히 박살 내 버려 다시는 이것을 열 수 없게 만들어 버렸다. 이것은 다시 수로를 빠져나갈 때를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물탱크가 있는 곳을 빠져나온 시카르는 다시 사다리가 있는 곳으로 나와 위로 올라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축축 젖은 몸이 더욱 무겁게만 느껴졌다.

연결된 배관 끝으로 올라가자, 음침하고 흉흉한 모습을 한 복도가 드러났다.

시카르의 입장에서는 교도관들의 기억을 보는 것이 베로니아를 찾는데 더 수월했기에 그는 거침없이 낡은 통로를 걸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는 둘. 순찰을 도는 두 명의 교도관들임을 파악할 수 있었다.

교도관들은 불침번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어차피 오늘도 별일이 없을 것이라며 하품을 하고 있었다.

시카르는 작은 돌조각 하나를 던져 보았지만, 지나가는 쥐새끼들일 거라며 미동도 하지 않았다.

소란을 피울 수는 없었던 탓에 교도관들을 유인하려 했지만, 이곳으로 사람이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기에 교도관들은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

어떻게 유인을 해야 할지 생각하던 차에 때마침 교도관들이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이때였다 싶었던 그 틈을 타 잠든 교도관을 습격했다. 한 번에 두 교도관의 목을 눌러 기절시킨 후 이들의 기억을 읽어 베로니아가 있는 방을 단번에 찾아냈다.

베로니아가 있는 곳은 지하 감옥 중에서도 제일 아래, 아무도 없는 끝방이었다.

지하 감옥 제일 아래 방까지는 계단 하나만이 뱅글뱅글 이어져 있었고, 순찰을 도는 이 하나 없었다.

시카르는 발소리를 죽이며 천천히 내려갔다. 공주가 놀라지 않게 할 참이었다.

굳게 잠긴 철창문 너머로 낡은 죄수 침대에 쪼그려 자고 있는 베로니아가 보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누더기를 거치고 있는 모습에서 공주의 품위는 전혀 찾을 수가 없었다.

시카르는 교도관에게 뺏은 열쇠로 문을 따고 천천히 들어갔다.


“모시러 왔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희미한 숨소리조차도 들리지 않았기에 혹시 이미 죽은 건 아닐까 의심도 들었지만 왕족의 몸을 함부로 만져서 확인해 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시간을 지체할 수 없습니다. 서두르셔야 합니다.”

교도관을 통해서 본 베로니아의 얼굴은 넋이 나간 듯한 모습이었다. 어릴 적 봤던 밝고 화사한 모습은 전혀 찾을 수 없을 만큼 초췌한 모습이었다.

설마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것인가.

오래 굶주린 탓에 인지능력까지 떨어졌다면 말귀를 알아듣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무례라 해도 공주를 잡고 데리고 나가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무례를 범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카르가 한 걸음 더 성큼 다가서자, 등을 돌리고 있던 공주가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그 모습을 본 시카르는 조금 더 기다려주리라 마음을 먹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공주는 느릿하게 천천히 몸을 돌렸다. 얼굴을 깊게 덮은 후드 속에 있는 공주의 얼굴은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둡기만 했다.

그 순간, 시카르는 좋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그는 검을 꺼내 들어 검 끝으로 후드를 뒤로 벗겼다.

그러자 드러난 얼굴은 예상한 대로 베로니아가 아니었다. 그는 라페였다.

라페는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며 시카르를 올려다보았다.


“역시 감이 좋아.”

함정이 있었나 생각해봤지만, 그럴 틈은 없었을 것으로 보였다. 그렇다면 알아볼 수밖에 없겠지.


“표정이 볼만하군. 공작. 놀랐나? 내가 어떻게 여기 있는지 궁금하겠지.”

“그거야 알아보면 될 일이다.”

라페는 정령사이기에 마법을 사용하는 파시움에 비해 시카르에게는 약했다. 아무리 시카르의 팔이 저주에 걸려 얼었다 해도 그가 이길 수는 없는 상대라는 걸 라페도 잘 알고 있었다.


“날 건들면 베로니아의 목숨도 끝이다.”

“그것도 내가 확인해보지.”

시카르가 한 걸음 더 성큼 다가서려 하자, 라페가 고함을 질렀다.


“전하!”

길리언도 여기 있는 것인가.

라페의 고함 소리가 끝나고 누군가 다급히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재빨리 뒤를 돌아보니 그곳에는 그토록 찾아 헤매던 베로니아가 서 있었다. 왕후 다이엔느에 칼에 목이 겨누어진 채로.

베로니아는 교도관의 기억으로 본 그 모습 그대로 초췌해진 얼굴이었지만, 공주답게 품위를 잃지 않고 고고한 자세로 서 있었다.

다이엔나는 살기 어린 얼굴로 베로니아의 목을 향해 날카로운 칼날을 더 깊게 겨누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인다면 이 칼날이 공주의 목을 뚫게 될 거야. 공작.”

“공주님의 존체가 상하는 순간 너희 두 남매도 목숨을 부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설마 했는데, 역시 베로니아를 찾고 있었군. 왜 우릴 배신한 거지?”

“말은 똑바로 해야지. 배신은 내가 아니라 네놈들이 한 것이지.”

그때 어둠 속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오며 누군가 묵직한 발소리를 내며 걸어 나왔다. 시카르는 그 발소리만 듣고도 그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역시나 그는 길리언이었다.

길리언은 실망스러운 얼굴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우리가 함께 결의해서 폐왕을 밀어낸 것을 벌써 잊은 것인가. 공작. 왜 나를 배신하고 베로니아를 선택한 것이지.”

“방금 말했을 텐데. 배신은 네놈이 먼저 했다고.”

“적반하장이군. 그동안 네놈이 아무리 제멋대로 굴어도 나는 너를 늘 지지했다. 네가 무슨 짓을 하고 다녀도 내 믿음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니, 레이독스가 반역을 저질렀다는 것을 알았을 때도 네놈을 바로 잡아들이지 않은 것이고! 그런데 너는 그런 내 믿음을 산산조각 내 버렸구나. 공작.”

“그렇게 나를 믿어서 내 저주를 풀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을 제거하려 했나?”

“자신의 주인을 알아보지 못하는 개는 목줄을 풀어주는 순간 주인을 물 수도 있으니까. 나는 만약을 대비했을 뿐이었다.”

그동안 단 한 번도 속을 보이지 않았던 길리언의 민낯이 완전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나는 한 번도 네놈의 개였던 적이 없었다. 길리언.”

스르릉. 날이 선 소리를 내며 시카르의 검이 길리언의 목을 겨누었다.


“운이 좋군. 파시움은 지금 레이독스를 사냥하러 갔거든. 네가 먼저 죽을까, 레이독스가 먼저 죽을까. 우리 내기할까? 베로니아? 누가 먼저 죽나?”

베로니아는 살기 어린 눈으로 길리언을 노려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푸른 눈동자가 서슬 퍼렇게 날이 선 것이 느껴질 만큼의 살기였다.


“너도 살아남지는 못할 것이다. 길리언.”

길리언은 애석하다는 표정으로 베로니아를 쳐다보았다.


“여전히 화가 많이 나 있군. 그러니까 네가 더 화내는 모습을 보고 싶어지잖아. 베로니아.”

베로니아는 곧장 길리언을 향해 침을 뱉었지만, 왕후 다이엔느가 베로니아를 겨누고 있던 칼을 뻗어 길리언을 향해 날아가는 침을 막았다.

이런 짓을 하는 건 실례라고 말을 하려던 순간 베로니아는 재빠르게 몸을 피해 시카르의 옆으로 섰다.

다이엔느와 라페는 당황했지만, 그 모습을 보는 길리언이 참 재미있는 듯 미소지었다.


“베로니아. 굶어서 두뇌 회전이 느려진 줄 알았더니, 몸동작도 여전히 빠르구나. 역시 왕족은 왕족이야. 그렇지?”

베로니아는 시카르의 견장에 달린 줄을 하나 뜯고는 제 머리를 질끈 감싸 묶으며 길리언을 향해 말했다.


“닥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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