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3화. 등잔 밑이 가장 어둡다 (6) (113/197)


113화. 등잔 밑이 가장 어둡다 (6)
2022.06.30.



“마님! 잠시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비카가 급히 서둘러 뛰쳐나가는 모습을 보며 유라는 시카르에게 위험이 닥쳤을 것을 직감했다.

그랬기에 유라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대신에 고개를 돌려 듀리온을 쳐다보았다.


“비카 님이 저렇게 급하게 뛰어나가셨다면 지금 공작님의 목숨이 위태로울 만한 일이 벌어졌다는 거 아닌가요? 듀리온 님도 가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저까지 공작저를 비우게 된다면, 마님과 도련님들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레이독스에게 서신을 보냈으니 그가 곧 지원을 올 것입니다. 너무 심려하지 마시옵소서.”

유라는 듀리온을 향해 손에 꽉 쥐고 있는 완드를 보여주었다.


“이거요. 저한테는 이게 있으니까 듀리온 님도 가셔서 어서 비카 님을 도와주세요.”

“그럴 수 없습니다. 공작님께서 제게 부탁한 것은 마님과 도련님의 안전입니다. 설사…… 공작님이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고 해도 마님과 도련님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 먼저입니다.”

“하지만, 듀리온 님도 아시잖아요. 저주가 발현되면 공작님의 몸이 매우 둔해진다는 것을요! 만약 전투에서 저주가 발현된다면 공작님이 정말 잘못될지도 몰라요!”

유라는 간절했지만, 듀리온은 냉정했다.


“죄송합니다. 마님.”

듀리온의 모습은 평소의 그가 아니었다. 순해 보이기만 하던 눈빛부터가 살벌하게 변해 있었다.

유라는 일순 이 사람이 내가 알던 그 기사 듀리온이 맞는 걸까 하는 얼굴로 쳐다봤다가, 기사에게 사명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떠올렸다.

맹세를 한 기사는 자신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다른 것은 무시한다.

지금 유라가 아무리 듀리온을 회유하려 한다고 해도, 결코 듣지 않을 것을 그녀는 깨달았다.

허탈한 마음에 유라는 넋이 나간 얼굴로 소파에 주저앉았다.

왕후까지 포함하면 라페와 더불어 정령사가 둘. 자신의 신체 일부를 바친 더욱 막강해진 파시움과 그들을 얼마든 치유할 수 있는 거대한 신성력을 가진 국왕 길리언이 뒤에서 버티고 서 있다.

그런, 그들을 시카르와 비카가 이길 수 있을까.

로엔이 도착한다고 해도, 그녀의 신성력은 왕족에 비할 수가 없었다.

레이독스의 칼날이 아무리 매섭다고 해도, 정령을 자유롭게 다루는 다이엔느와 라페를 감당하긴 벅찰 것이다. 베로니아는 인질로 잡혀 있는 데다 시카르의 몸은 툭하면 저주에 걸리니 상황이 매우 불리했다.


“작별인사도 못 했는데…….”

곁에 있던 서연이 유라의 팔을 쓰다듬어주었다.


“공작부인. 저도 작별 인사를 못 했어요. 반드시 살아 돌아올 거라 믿었기에 하지 않았어요. 반드시 살아 돌아올 거예요. 반드시.”

유라는 애써 씁쓸하게 웃었다.


“서연 님도 힘들 텐데 제가 너무 주책이었어요.”

“아니에요. 저도 실은 너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는걸요.”

유라는 누구보다 서연의 심정을 알 것 같았다. 그래서 유라는 서연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두 사람은 깊게 의지하듯 서로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아직 최후의 보루는 남아 있었다. 유라는 그 티끌 같은 희망을 떠올리며 시카르가 무사하기를 빌었다.

2층에서 아이들이 비카를 따라 나가는지도 모른 체.

***

유라가 하는 얘기를 들은 키안은 이대로 있을 수가 없었다.

저주가 발현된다고 해도 자신이 풀어준다면 공작이 죽지 않을 것이다.

재빨리 옷을 갈아입은 키안은 2층 창문에서 뛰어내리려 했다.

루이드가 자신의 발 한쪽을 잡지 않았다면 뛰어내렸을 것이다.

루이드는 잠이 덜 깬 얼굴로 하품을 하며 말했다.


“뭐야? 루시가 아니잖아?”

루시가 어릴 때 툭하면 가출을 하는 바람에 루이드는 습관적으로 루시가 잠에서 깨면 따라 깨는 버릇이 생겨버렸다.

그러다 보니 이번에도 루시가 오랜만에 가출을 하기 위해 나가려는 줄 알고 잠결에 일어나서 키안의 발을 잡은 것이었다.


“이, 이거 놔! 루이드! 지금 이럴 시간 없어!”

“왜? 무슨 일인데?!”

그 소란에 루시마저 깨어났고 루시 또한 키안의 발 한쪽을 꽉 붙들었다.


“뭐야? 너 가출하는 거야?”

“아니야! 지금 공작님을 구하러 가야 해!”

잠이 덜 깬 쌍둥이들은 잠이 확 달아났다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공작님을 구해야 한다고?!”

“그래. 그래서 가 봐야 해! 그러니까 이거 놔!”

루시가 키안의 한쪽 다리를 붙잡고 있는 사이에 루이드가 급하게 옷을 갈아입으며 말했다.


“그럼 나도 같이 가!”

그러자, 루시도 키안의 발을 붙잡고 늘어졌다.


“나도 같이 가! 나도 공작님을 구할래.”

바톤 터치를 하듯, 루이드는 루시에게 어서 옷을 갈아입으라는 듯 키안의 다리를 꽉 움켜쥐었다.


“그래. 같이 구해! 우리도 공작님에게 받은 게 있으니까 은혜를 갚아야 해!”

루시는 재빨리 바지를 껴입으며 소리쳤다.


“맞아! 나도 공작님을 구할 거야!”

항상 티격태격하던 쌍둥이들의 의견이 웬일로 일치했다. 키안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 대신에 들키지 않게 조용히 숨어 있어야 해.”

“좋아!”

키안과 쌍둥이들은 2층에서 뛰어내리려다, 그 높이를 체감하고는 벽을 타고 기어 내려왔다.

그러고는 냅다 달려 세 아이가 모두 조랑말 위로 올랐다.


“근데 우리 어디로 가?”

루이드의 질문에 키안이 박차를 가했다.


“레카도르 하천의 3번째 계단! 거기가 수로 입구래!”

듀리온이 서신을 보낼 때 옆에서 봤던 내용이기에 키안은 위치를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아이들은 겁도 없이 조랑말을 타고 밤바람을 가르며 레카도르를 향해 달렸다.


 

***



“저 미친 마법사가 왜 자꾸 우릴 쫓아오는 거야!”

“죽이려고요.”

로엔의 급박한 외침에 너무나 편안하게 대답하는 레이독스의 말투에 제르미는 이를 박박 갈 듯 말했다.


“레이독스! 그런 말을 대수롭지 않다는 듯 하지 말아줄래? 우린 지금 목숨의 위협을 받고 있다고!”

“그래서 도망치고 있잖아!”

정확하게는 공작 일행과 합류하기 위해 말을 타고 달리는 중이었다.

레이독스 일행은 공주를 찾았다는 시카르의 서신을 받고 긴급히 레카도르를 향해 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산맥을 달리던 중에 파시움으로부터 공격을 받기 시작했다.

이미 시카르가 보낸 서신에는 오는 길에 공격을 받아도 중간에서 싸우지 말고 무조건 레카도르 하천으로 오라는 지시가 있었다.

그래서 앞만 보고 가는 와중인데도 뒤에서 끊임없이 파시움의 파이어 볼이 날라왔다.

그렇게 날라온 파이어 볼이 휘날리는 로엔의 머리카락을 태우고, 제르미의 귓가를 스쳐 지나자, 그는 이제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냥 내려서 싸우면 안 돼?!”

“안 돼! 공작님께서 절대 싸우면 안 된다고 했어!”

“왜?!”

“파시움이 눈과 혀가 없대!”

“무슨 말이야! 파시움의 눈과 혀가 없는 것과 못 싸우는 것과 무슨 상관인데?! 비겁하게 눈과 혀가 없는 사람을 공격하지 말라는 거야?!”

참을성이 강한 레이독스도 말귀를 못 알아먹는 제르미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가끔 인내심의 한계에 다다를 때가 있었고, 그때가 바로 지금이었다.


“왜긴 왜야! 눈과 혀를 제물로 바쳐서 그런 거지!”

“아. 진작 그렇게 말해야지! 이 바보 멍충이 레이독스야!”

“그걸 설명해야 알아들어? 너 마법사 맞아?!”

이 와중에도 뒤에서 파시움의 파이어 볼이 계속해서 날아들었다.

날아든 불꽃이 말의 엉덩이를 때릴 때마다 로엔은 욕지거리를 하며 말들의 엉덩이를 치료했다.

신관이 저렇게 험한 말을 입에 담았다고 신이 노하진 않을지 걱정이 될 정도로 로엔의 입에서는 험한 말들이 거침없이 튀어나왔다.


“로엔 님, 신관이 그런 욕을 해도 돼요? 제발……. 파시움의 파이어 볼에 맞아 죽기 전에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질까 봐 무섭다고요!”

“레페르 신께서는 신을 섬기는 모든 자에게 관대하시니 걱정 마세요!”

“신의 관대함이 그 인내를 넘어서면 어떻게 되는 거죠?”

“어? 그 질문, 전에도 받아본 거 같은데?”

“네. 로엔 님은 자주 신의 인내를 시험하는데 도전하시는 분이시니까요.”

이런 와중에도 농담을 주고받는 로엔과 제르미를 보며 레이독스는 두 사람이 천생연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서연 님이 말한 제르미의 짝이 로엔 님이 틀림없군.


“근데, 마법사가 저렇게까지 마력을 낭비하면 나중에 마력이 떨어져서 우리에게 더 승산이 있지 않아요?”

“자신의 신체를 제물로 삼는 것은 무모하고 어리석지만, 그만큼 엄청난 희생입니다. 그렇기에 파시움은 이미 그런 경지는 넘어섰습니다.”

“따돌릴 방법은 없어요?! 이대로 가다간 도착하기 전에 신성력을 다 소모하겠어요!”

“파시움이 로엔 님과 제르미만을 노리고 있는 것을 보면 그것이 목적인 것 같긴 합니다! 그러니 더 빨리 달려야겠지요!”

로엔은 다시 욕지거리를 하기 시작했고, 제르미도 이번에는 같이 욕을 하기 시작했다.

레이독스는 로엔에게 어쩔 수 없다고 대답하긴 했지만 파시움을 꽁무니에 달고 수도까지 무사히 갈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파시움은 자신의 신체까지 바치고 온전히 싸움만을 위해 사는 것 같은 인간병기가 돼 있었으니까.

원래 파시움은 시카르처럼 폐왕에 의해 믿고 따르던 스승이 죽음을 맞자, 길리언에게 충성을 바치게 된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파시움은 늘 우울한 낯이긴 해도 때때로 수줍은 미소를 짓던 청년이었다. 길리언의 수하로서 자신의 신념에 무섭게 집착하긴 했지만, 이렇게 맹목적으로 힘에 집착하진 않았었다.

레이독스는 그가 그렇게 된 것이 결국 그의 지나친 과욕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과욕은 보기 좋게 그를 강하게 만들기도 한 상태였다.


“레이독스! 로엔 님이 더는 버티기 힘들다는데 뭐 좋은 방법 없어? 그래도 네놈이 머리는 제일 잘 굴리잖아!”

“지금 여기서 무슨 방법이 있어?! 없어! 그냥 달려!”

“잘 생각해봐! 우리 도착하기 전에 파시움한테 불타 죽게 생겼다고!”

레이독스도 답답할 노릇이었다. 방법이 있었다면 진작 그 방법을 썼을 것이다.

그는 아이들이 태어난 이후로 아이들과 한시도 떨어져 지낸 적이 없었다. 지금은 많이 컸다고 해도 이렇게 오래 떨어져 있어 본 적이 없었다.

아직도 레이독스에게는 어리광이 심한 아이들었다. 지금쯤 아빠를 찾으며 울고 있을지도 몰랐기에 그도 빨리 아이들에게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순수한 자신의 쌍둥이들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먼길을 떠나는 그에게 해맑은 미소로 잘 다녀오라며 출장 중에 심심하면, 구슬 놀이나 하라고 할 정도로 잠시 다녀오는 거라고 생각했다.

잠깐.

레이독스는 그제야 자신이 떠날 때 루시가 가죽 가방에 가득 담아주던 구슬이 떠올랐다. 어쩌면 이걸로 따라오는 파시움을 잠시 동안은 따돌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제르미, 이거 받아!”

레이독스는 곧장 루시에게 받은 가죽 가방을 제르미를 향해 던졌다. 얼떨결에 가죽 가방을 받은 제르미는 안에 내용물을 확인하고 곧장 레이독스의 의중을 눈치챘다.

파시움이 제르미의 뒤를 바짝 쫓아가고 있으니 제르미가 적격이었다. 제르미는 레이독스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파시움을 향해 몸을 돌렸다.


“파시움! 우리 구슬 놀이나 할까?!”

제르미는 활짝 웃으며 가방을 뒤집어 아래로 털어 내렸다. 가죽 가방에서 수백 개의 구슬이 쏟아져 내렸다. 미친 속도로 뒤를 따라오던 파시움의 흑마는 구슬을 밟고 그대로 나뒹굴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제르미는 순식간에 넘어지는 파시움을 보며 깔깔거리며 웃었다.


“하하! 구슬은 너 가져라!”

파시움은 넘어지는 와중에도 악착같이 제르미를 향해 파이어 볼을 날렸다. 그 통쾌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