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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화. 등잔 밑이 가장 어둡다 (7) (114/197)


114화. 등잔 밑이 가장 어둡다 (7)
2022.07.04.


곧이어 왕의 근위대들이 들이닥칠 것도 불 보듯 훤했기에 좁은 지하 감옥은 시카르에게 전적으로 불리했다.

그래서 시카르는 베로니아의 손을 붙잡고 수로를 향해 뛰었다.

시카르를 따라 수로를 뛰던 라페는 물탱크 입구 앞에서 멈추었다. 다이엔느가 뒤를 쫓으려 할 때도 그는 왕후를 말렸다.


“붙잡으러 가실 필요 없습니다. 전하.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으로 나간다면 물살에 휩쓸려 떠내려갈 테니까요.”

물탱크에서 쏟아지는 물살에 휩쓸려 떠내려갈 것이라고 했지만 물탱크는 열리지 않았다.

그제야 라페는 공작이 물탱크가 열리지 않게 잠금 빗장을 부쉈다는 것을 확인했다.


“공작이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물탱크 빗장을 다시 열 수 없게 박살 내었습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수로 안은 미로와도 같아서 쉽게 빠져나가지는 못할 겁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빠져나오겠지. 저 수로로 내려가면 어디가 나오지?”

“레카도르의 하천이 나옵니다.”

“래카도르 하천이 연못인 줄 알아?! 하천 중에서도 어디로 나오느냔 말이야!”

“그것은 교도관에게 물어보면 알 것입니다.”

다이엔느는 다시 감옥으로 올라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먼저 하천에 근위병부터 배치한 후 정확한 위치가 나오면 그곳으로 집결시키도록 해.”

“알겠습니다. 전하.”

“일단은 생포해둬. 국왕께서 진정 원하시는 건 그 소공자 놈. 아니, 왕손일 테니까.”

 

 

***

급한 마음과는 달리 가는 길이 순탄하지가 않았다. 물탱크 빗장을 박살 내서 물이 내려오는 걸 막긴 했어도 수로는 미로 같이 돼 있어서 막다른 길목에 들어서길 반복하고 있었다.

시카르는 이미 들어갔던 모퉁이를 나올 때는 벽에 칼을 그어 엑스 표시를 남겨두었다.


“송구합니다. 하지만, 체크하며 가고 있으니 곧 빠져나갈 것입니다. 혹시 걷기가 힘드시면 제 손을 잡고 가시는 게 어떠십니까.”

“이 정도는 나도 갈 수 있다.”

“알겠습니다.”

“블레이크가 공작인가?”

“그렇습니다.”

“공작이 소공자 시절에 본 적이 있다. 어린아이의 눈매가 살벌해서 기억에 남았지.”

“그렇군요.”

“블레이크 공작은 길리언의 사람이 됐다고 들었는데, 왜 나를 구하러 온 것이지?”

“지금은 이곳을 빠져나가는 게 우선입니다. 나가면 그때 설명드릴 테니 궁금한 게 있어도 좀 참으십시오.”

“알겠다.”

그때, 바로 앞에서 누군가가 이곳을 향해 첨벙거리며 오는 소리가 들렸다. 베로니아는 기를 바짝 세우며 시카르의 허리에 있던 작은 단검 하나를 손에 잡아 들었다.

단검을 손에 잡아든 베로니아는 앞을 향해 공격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


“나도 내 몸 지킬 무기는 하나 있어야겠지.”

베로니아를 직접 접해보니 공주가 선왕의 반대도 무릅쓰고 발리제와 결혼을 할 수 있었던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공주는 시카르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용맹하고 강단 있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다행이었다.

시카르는 지금 오고 있는 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기에 베로니아가 치켜든 검을 손으로 내렸다.


“제 수하 놈이니 안심하십시오.”

수로의 어둠 끝에서 비카가 못마땅한 얼굴로 모습을 드러냈다.


“수하라니. 누가 네 수하란 말이야. 공작.”

“공작저를 지키지 않고 여기까진 왜 온 것이지?”

“내가 여길 왜 왔겠어! 너 죽을까 봐 왔지!”

“헛걸음이었다. 내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의 상황이라면 네가 와도 별수는 없을 테니까.”

비카는 시카르의 말은 신경 쓰지도 않았다. 그녀는 베로니아 공주를 슬쩍 쳐다보았다.


“옆에 있는 사람은 우리가 찾던 그분이신가?”

“그래. 이분이 공주 저하이시다.”

공주 때문에 그 고생을 했는데, 이번엔 용케도 잘 찾아낸 게 다행이었다.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찾았군.”

폐왕을 처단하는데 다크 엘프가 개입했다는 소식은 베로니아도 들었다.

다크 엘프는 인간의 일에 잘 개입하지 않았기에 무슨 연유인지 알 수가 없었지만, 지금 보니 인간과 친구였기에 가능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놀라운 일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데 호기심을 느낄 상황은 아니었다.


“서둘러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

“어서 가시죠.”

“날 따라와. 여기 길이 미로 같아서 오는 동안 정령을 세워뒀거든. 오래는 못 버티니까 서둘러.”

비카는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고, 시카르와 베로니아는 그 뒤를 따랐다.

***

하천의 3번째 수로 입구에는 왕궁에서 나온 수십 명의 병사가 보초를 서고 있었다.

아무리 둘러봐도 공작과 집사는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아이들은 멀리 나무 뒤에 숨어서 고개만 빼꼼 내밀고 있다가 다시 숨었다.

자신의 턱을 잡고 생각에 빠져 있던 루이드는 도통 모르겠다는 얼굴로 물었다.


“왕궁의 병사들이 여기서 다들 뭐 하는 거지?”

쌍둥이들에겐 차마 말하지 못했지만, 키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얼마 전, 베로니아 공주의 처형이 무산되었고, 그날부터 스승님이 쌍둥이들을 공작저에 맡겼다.

그리고 공작님은 스승님께 이곳으로 오라는 서신을 보내었다.

이곳에 왕궁의 병사들이 포진해 있다면, 이곳에서 베로니아 공주님을 만나기로 했을 것이다.

분명 어떤 이유에서 그런 정보가 새어나갔기에 왕궁의 병사들이 이곳을 지키고 있는 것이리라.

아직 공작님이 보이지 않았기에 키안은 나설 수가 없었다. 만약 병사들에게 먼저 잡히기라도 한다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테니까.

키안은 아이들을 향해 검지를 입술 위로 올리며 말했다.


“일단은 들키면 안 되니까. 조용히 있어.”

쌍둥이들은 키안을 따라 입술 위로 검지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쉿!”

아이들은 나무 뒤에 숨어 차분히 앉아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가 슬슬 지루해졌고 배도 고파왔다.


“먹을 거라도 좀 가지고 올걸.”

“그냥 공작저로 돌아갈까?”

“키안. 넌 안가?”

하지만 키안은 그런 것 따위 전혀 느낄 수 없다는 듯 매서운 눈빛으로 근위대들만 주시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 루이드는 왠지 멋지다고 생각했고 키안을 따라 근위병들을 주시했다.


“뭐 보는 거야?”

그때, 키안은 시선을 돌려 다른 먼 곳을 쳐다보았다.


“쉿! 말발굽 소리 들리지?! 누가 오고 있어! 몸을 더 바짝 낮춰!”

아이들은 동시에 키안을 따라 몸을 아래로 납작 엎드렸다,

***

하천에 도착한 레이독스 일행은 우글거리는 근위대를 보며 말을 멈추었다.


“이게 다 뭐야! 병사들이 너무 많잖아! 함정 아니야?!”

레이독스는 그 말에 동의를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분명, 공작님의 인장이 박혀 있었다.”

“네가 속은 거 아니냐고!”

그때, 누군가 축축한 몸으로 비척거리며 뛰어왔다.


“저, 저기! 저어……기!”

제르미는 인상을 찌푸리며 쫓아오는 남자를 지켜보았다.


“뭐야, 저 구울같이 걸어오는 놈은”

가까이 다가온 그 모습은 일전에 공작이 살려주었던 그 상인이었다.


“너는? 그때, 그 상인이 아닌가?”

“네! 네! 터커라고 합니다! 후작님!”

머리부터 발끝까지 축축하게 젖어있는 터커에게서는 썩 좋은 냄새가 나진 않았다. 레이독스는 조금은 인상을 찌푸렸다.


“네가 여긴 왜 있는 거지?”

“저기 수로에 공작님이 계십니다. 곧, 나올 시간이 다 됐는데 병사들이 저렇게 입구에서부터 창을 겨누고 몰려 있어서 나오는 순간 온몸이 창살에…….”

터커는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고는 다시 말했다.


“후작님께서는 공작님과 친하시죠? 그래서 공작님을 구해주기 위해 이곳으로 오신 게 아니에요?”

제르미는 미심쩍은 얼굴로 터커를 검열하듯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넌 누구냐?”

대답은 터커가 아닌, 레이독스가 대신했다.


“일전에 공작님께 의리를 지켜서 공작님께서 목숨을 구해준 상인이다.”

“근데 상인이 여기 왜 있어?”

“글쎄.”

“저는 공작님을 도우러 여기에…… 송구하지만, 후작님. 지금은 그런 걸 설명할 때가 아닙니다. 공작님을 구하러 오신 거면 공작님이 무사히 수로에서 나올 수 있게 도와주셔야 해요…….”

제르미는 코를 긁적이며 레이독스를 쳐다보았다.


“믿을 수 있는 말이야?”

“공작님께서 이 상인을 살려주었고, 공작저에서 보호도 해 주셨지. 이 상인이 그럴 가치가 없었다면 공작님께서 구태여 그런 온정을 베풀지는 않았을 테지.”

자길 배신할 사람은 결코 곁에 두지 않는 공작이었다. 그 사실은 레이독스 뿐 아니라, 제르미 역시도 알고 있었다.


“뭐, 네 말에 일리는 있네.”

제르미가 수긍을 하고 나자, 터커는 그제야 살았다는 듯 옆구리를 잡고 있던 손에서 힘이 풀렸다. 그는 그대로 기절하듯 쓰러졌다.


“이봐 괜찮아?”

제르미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지만 터커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로엔은 곧장 말에서 내려 터커를 살피고는 이내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 출혈이 있잖아?”

“출혈?”

“옆구리에 큰 출혈이 있어. 대못 같은 것에 긁힌 것 같아. 이 사람. 우리에게 공작님의 신변을 요청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달려온 거야!”

제르미는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혀를 끌끌거렸다.


“기사도 아니고, 평범한 상인이 공작님께 충심을 품었다는 말인가?”

“그러니 공작님이 이 상인을 살려줬겠지. 공작님의 통찰력은 정말 무섭군.”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로엔은 조용히 터커의 옆에 앉아 그의 옆구리를 치료했다.


“급한 불을 껐긴 하지만, 이대로 두면 저체온이나 감염으로 죽겠어요.”

“제가 손을 써보겠습니다. 로엔 님.”

레이독스는 말에서 내려 터커를 안장에 엎어지듯 올려놓았다. 그런 후 말에게 키안의 손수건 냄새를 맡게 해주었다.


“왕손 저하의 냄새를 맡았으니 이놈은 알아서 공작저까지 갈 것입니다.”

레이독스는 말의 엉덩이를 툭 때렸다.

레이독스의 말은 이힝 소리를 내며 곧장 내 달리기 시작했다.

그사이 제르미도 말에서 내려 몸을 풀기 시작했다.


“쪽수가 많긴 하지만, 정리를 해 볼까. 공작님이 올 때까지 잘 버티면 문제없겠지?!”

앞장서 걸어가려던 제르미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근데 여기 신관께서 계신데 병사들을 죽여도 됩니까?”

로엔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는 듯 놀란 토끼 눈을 뜨고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어머! 제르미 님!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요!”

“아, 여, 역시 그렇죠?”

“어우, 정말.”

“죄, 죄송합니다. 로엔 님.”

“당연히 죄송해야죠. 지금 이 상황은 전시 상황과 같다고요! 우리가 지금 하는 건! 한 나라의 국왕을 바꾸는 일이라고요! 그런데 죽여도 되냐뇨! 당연히 모두 쓸어 버려야죠! 항복하지 않는 자에게 자비는 없는 거예요! 알겠어요?”

제르미가 그런 질문을 한 게 무색할 만큼 로엔의 태도는 너무나 단호했다. 제르미는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다시 사과를 해야 했다.


“맞는 말씀이십니다. 죄송합니다.”

로엔은 제르미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윙크를 해 보였다.


“그럼 이제 가볼까요.”

제르미는 곧장 로엔의 뒤를 따랐다.

그 모습을 보는 레이독스는 역시 서연이 예언한 제르미의 운명의 짝은 로엔이 분명할 것이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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