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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화. 밤은 기운다 (1) (116/197)


116화. 밤은 기운다 (1)
2022.07.11.



“공작님 아니야? 뒤에 집사님도 계신 것 같은데,”

물끄러미 앞을 보고 있는 루시를 따라보던 루이드는 비카의 뒤로 걸어 나오는 베로니아를 보고 입을 쩍 벌렸다.


“어, 저 아줌마는 누구지? 못 보던 얼굴인데, 그러고 보니까 저 아줌마 키안과 닮았어!”

키안의 눈에도 비카의 뒤를 따라 나오는 한 여인이 보였다. 이 밤을 둘러싼 어둠도 가릴 수 없을 것 같은 환한 금발과 푸른 눈의 여인.

키안은 그녀가 바로 자신을 낳아준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를 낳아주신 어머니…….

어딘가에 유폐돼 있다고 생각했기에 약하고 힘없는 분이라 생각했던 건 모두 착각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베로니아의 모습은 용맹하며 뛰어난 전사처럼 보였다.


“어, 그런데 저분은?”

루시와 루이드는 좋지 않은 예감에 입술을 악물었다. 곧이어 나타난 사람은 다름 아닌 이 나라의 군주였으니까.


“국왕 전하시잖아?! 근데 왜 국왕 전하와 맞서는 것처럼…….”

멀리에서도 국왕과 공작이 서로를 향해 맞서고 있다는 것이 한눈에 보였다.

국왕 앞에 맞서는 것은 반역을 의미한다는 것을 쌍둥이들도 알고 있었다.

아버지 레이독스에게서 주군에 대한 충성을 배운 아이들은 국왕을 향해 맞서고 있는 제 아버지의 모습에 꽤 충격을 받았다.


“지, 지금 우리 아버지가 바, 바, 반역을 일으킨 거야? 공작님과 같이?”

루시와 루이드는 꽤 충격을 먹은 얼굴이었기에 키안은 어떻게 설명을 해줘야 할지 난처했다.


“루시. 그러니까…….”

루시는 이제야 이 모든 상황이 납득이 되는 것 같았다.


“그래. 이제 알겠어. 우리를 장작 마차를 싣고 가는 마부로 변장시킨 것도, 오랫동안 우릴 공작저에 맡기신 것도, 이제 모두 이해가 가.”

하지만 루시와 루이드는 오랫동안 충격에 빠져 있지만은 않았다. 루시는 이내 큰 결심을 한 듯 고개를 치켜들었다.


“아버지가 그런 선택을 했다면 우리도 그 선택을 따라야지. 안 그래? 루이드?”

루이드는 번뜩 대답하진 않았지만 오래 고민하지도 않았다.


“네 말이 맞아. 아버지의 선택을 따라야지. 가자! 아버지를 도와주러!”

쌍둥이들은 대책 없이 맨손으로 뛰어들려고 했기에 키안은 당황스러웠다. 갑자기 패기 발랄해진 것도 좋다지만 정말 패기만 있을 뿐이었으니까.


“잠깐! 얘들아! 지금 그렇게 가면 안 돼!”

“왜 안 돼? 공작님도 나타나셨으니 이제 우리가 가서 도와드리면 되잖아.”

“앞에 병사들이 많아서 가다가 병사들에게 잡히면 안 되니까 조금 더 기회를 봐서 정신이 없을 때 접근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앗. 그러게. 괜히 인질이 되면 민폐니까 조금 더 정신없을 때 접근하는 게 좋겠는데?”

루시는 금세 수긍했지만, 루이드는 몸이 근질근질한 듯 몸을 풀었다.


“맨손으로도 싸울 수 있는데.”

“싸울 수야 있겠지. 이기지를 못해서 그렇지.”

“나 이길 수 있거든?”

“맨손으로 무기 든 사람을 어떻게 이겨. 그것도 왕실 근위대를!”

평소의 키안이라면 두 아이를 말렸을 테지만, 지금은 쌍둥이들에게 신경을 쓸 수 없었다.

병사들의 동태를 살펴야 했으니까.


 

***



“수로에서 도망간다고 레카도르의 포위망을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나. 이제 보니 공작이 어리석기가 짝이 없군.”

왕후 다이엔느는 어디 갔는지 길리언의 곁에는 라페 뿐이었다. 키안을 찾기 위해 자신의 공작저로 왕후를 보낸 것이 분명해 보였다. 다이엔느 혼자 갔다면 듀리온이 막을만할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베로니아였다. 저들은 시카르의 일행의 중심에 있는 베로니아를 집중 공격 하거나 어떻게든 그녀를 인질로 삼으려 할 테니까.

차라리 곁에 없는 것이 전투에는 더 유리하겠지.


“공작. 큰일인데?”

“큰일이라니?”

“도련님이 여기 있어.”

“뭐? 그럼 키안이 납치됐다는 소리야?”

“그게 아니고 저기 숨어 있어. 어떻게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까지 몰래 따라온 것 같아.”

납치당한 게 아니라면 다행이었다. 키안이 길리언의 눈에 띄게 되는 순간 표적은 키안으로 바뀔 것이다.

베로니아 보다도 훨씬 쉬운 표적이었고 마지막 목표일 테니, 키안만 제거한다면 길리언으로서는 두려워할 것이 없었다.


“비카와 무슨 계책을 꾸미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만 택해라. 나인가, 베로니아인가.”

길리언은 병사들 사이에 꼿꼿하게 서서 시카르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카르가 항복한다면 오른손을, 불복한다면 왼손을 들 것이다. 시카르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국왕은 내게 무슨 손을 들어주고 싶은 것이지?”

“난 당연히 오른손을 들어주고 싶지. 내게 있어 공작은 다루긴 힘들어도 사용하기 좋은 수하니까. 베로니아와 왕손을 내놓고 내게 항복하라. 그렇게만 한다면, 지금껏 공작이 내게 저지른 과오는 모두 덮어 주도록 하지.”

“생각을 좀 해봐야겠군.”

시카르는 잠시 생각하는 비카에게 명령했다.


“여기 공주 저하와 키안이 있으면 걸리적거릴 뿐이다. 내가 길리언의 시선을 끄는 사이, 레이독스에게 베로니아와 아이들을 데리고 도망가라 일러라.”

“공작저는 들르지 않아도 돼?”

“다이엔느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니, 공작저로 간 것 같다. 듀리온이 둔한 놈이라 해도 전투적인 눈치는 빠른 놈이니, 곧 유라를 피신시킬 것이다.”

“알았어.”

비카는 곧장, 곁에 서 있는 레이독스의 옆으로 다가가 키안이 여기 와 있으니 데리고 함께 가라고 했지만 그는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런 일은 제르미와 로엔에게 시키십시오. 저는 이곳에 남아 있겠습니다.”

“네 놈이 가야 하는 이유가 있어. 네 쌍둥이들도 여기 와 있거든.”

평온한 표정을 유지하던 레이독스의 얼굴에 경악이 일어났다.


“네? 싸, 쌍둥이들이 여기 있단 말입니까?”

“그래. 네 쌍둥이들을 근위대의 창살 더미가 되게 내버려 둘 작정이 아니거든 모두 데리고 나가.”

이놈의 사고뭉치 쌍둥이들이 어쩌다 여기까지 왔다는 말인가? 레이독스는 주변을 둘러봤지만, 쌍둥이들은 물론 이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제 눈엔 보이지 않습니다. 비카 님.”

“인간의 시력으로는 보이지 않겠지. 저 뒤에 숨어 있다. 내가 정령을 날려 놓을 테니 어둠의 정령이 춤을 추고 있는 곳을 찾아 베로니아와 아이들을 데리고 떠나라.”

“알겠습니다. 비카 님.”

“준비되면 공작에게 말해라.”

레이독스는 몸을 빼기 전, 제르미와 로엔에게 자신은 공주를 피신시켜야 한다는 입장을 먼저 전했다.


“어서 가.”

“조심하세요. 후작님!”

“로엔 님도 몸조심 하십시오.”

그러곤, 곧이어 베로니아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공주 저하. 이곳에 왕손 저하께서 오셨습니다. 우린 먼저 함께 이곳을 떠나야 합니다.”

길리언을 향해 칼날을 들이대고 있던 베로니아는 아들이 여기 있다는 얘기에 간담이 서늘해졌다.


“키, 키안이 여기 있다고?”

“네. 그렇습니다. 왕손 저하께서 이곳까지 오신 모양인 듯합니다.”

길리언에게 키안의 존재가 발각되는 순간, 키안은 모든 이의 표적이 될 것이라는 걸 베로니아는 잘 알고 있었다.


“출발하지.”

레이독스는 시카르에게 지금 출발한다고 언질했다. 그 즉시, 비카는 어둠의 정령을 날려 아이들이 있는 장소를 안내했다.

길리언이 뭔가 눈치를 챈 듯 고개를 틀자, 시카르는 길리언이 움직임을 눈치채지 못하게 공격을 시작했다.


“오른손을 들 일은 없을 것 같군. 길리언!”

시카르의 날 선 칼이 길리언을 향해 내찔렀지만, 그의 1 병기들이 검을 막아섰다. 길리언은 한 발 뒤로 물러나서 자신의 병사들이 상처 나지 않게 신성력으로 보호했다.


“이때야. 어서 가!”

비카의 외침에 레이독스는 베로니아와 함께 출발했다. 이를 놓치지 않고 길리언이 곁에 있는 라페에게 지시를 내렸다.


“가서 쫓아!”

파시움은 시카르라는 거대한 무기를 막아야 했기 때문에 그를 내보내진 않았다.


“베로니아를 빼돌리려는 수작인가 본데, 쉽진 않을 것이다. 공작.”

“너도 내 계획을 막기 쉽진 않을 것이다. 길리언.”

 

***

풀숲을 기어가던 키안과 쌍둥이들은 갑자기 자신들의 목덜미를 낚아채는 손길에 깜짝 놀랐다.


“꺅!”

“악! 뭐야!”

“이 녀석들! 얌전히 공작저에 안 있고 왜 여기까지 온 것이야!”

“어? 아빠?”

“스, 스승님…….”

“일단 이곳을 피해야 하니, 어서 말이 있는 곳까지 뛰어야 합니다.”

키안은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제르미와 로엔이 이곳으로 오는 병사들을 막고 있었다.

시카르는 지금 한쪽 손과 발이 동상에 걸려 있었지만, 곧 한쪽 팔을 완전히 못 쓰게 될 터였다. 이대로 두면 곧 남은 한 팔 마저 쓰지 못하게 된다.


“하, 하지만 지금 공작님의 몸 상태가…….”

“공작님이 지금 싸우는 이유가 누구 때문인지를 생각해라. 공작님을 진정 위하는 길은 지금 당장 말에 오르는 것이다. 어서 가자!”

키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레이독스의 뒤를 따랐다.

키안의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시카르는 점점 공격을 피하기가 힘들었다.

아무리, 그가 정령들의 정신을 지배해서 공격을 막아낸다고 해도, 몸의 민첩함도 그만큼 따라줘야 했다.

하지만, 둔해진 몸은 잘 움직이지 않았다. 오직 정신력만 몰두해서 공격을 막아야 했다. 하지만, 그만큼 공격도 느려졌다.

비카가 시카르의 옆구리로 날아 들어오는 마법을 받아쳐 냈다.


“젠장. 약골 공작 같으니.”

“키안은 완전히 떠났나?”

공작에게 사실대로 얘기하면 미련하게 더 버틸 것 같았기에 비카는 있는 사실대로 전달하지 않았다.


“갔어. 안 보여.”

“그럼 우리도 적당한 기회를 봐서 빠져야겠군. 이곳을 나가는 즉시 파시움의 케이지를 파괴할 것이다.”

“좋은 생각이야. 사람이라면 머리를 써야지.”

“내가 막아서며 정령들을 모으고 있을 테니까, 제르미와 로엔에게도 도망갈 준비를 하라고 일러라.”

“알았어.”

파시움이 불러낸 불꽃들이 비카의 발목을 잡았지만, 이내 비카가 불러낸 정령들이 파시움의 뜨거운 불꽃에 맞서 제 몸을 태우며 비카를 보호했다.


“제르미, 로엔. 도망갈 준비를 해라. 곧 공작이 한 번에 모은 정령들을 사방으로 퍼트릴 것이다. 그때 곧장 출발해야 돼. 알았어?!”

“아, 알겠어요!”

로엔과 제르미는 이미 무척이나 지쳐 있었기에 대답하는 것조차도 숨을 헐떡거렸다. 오랜만에 하는 전투인 데다, 수적으로도 불리했기에 비카도 힘이 들기는 마찬가지였다.


“대신 공작이 정령을 잘 모을 수 있게 모두 공작을 보조하도록 해!”

제르미와 로엔은 마른침을 삼키며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시카르의 앞에는 그가 정신을 지배한 정령들이 꽤 모이고 있었다. 시카르와 함께 전투를 벌였던 이들이었기에 그가 정령을 모으는 까닭을 모를 리가 없었다.


“도망가려 한다! 퇴로를 차단시켜라!”

파시움의 명령에 제1 병기들은 시카르 일행을 포위하듯 주변을 원형으로 둘러싸려 했다.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제르미가 그리스(Greece) 마법을 불러내 바닥을 미끄럽게 만드는 바람에 일부가 나자빠지며 대열이 엉클어졌다.

그 순간 시카르는 자신이 원하는 만큼의 정령을 끌어모았다.


“지금이야! 어서 가!”

시카르가 고함을 지름과 동시에 제르미와 로엔이 먼저 진영을 벗어나고 비카마저 자리를 떠났다.

시카르가 끌어모은 정령들이 그의 일행을 제외한 모두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수많은 벌떼가 말벌 하나를 공격하는 모양새 같았다.

정령들로 시간을 버는 동안 모두 이곳을 벗어나는 게 이들의 계획이었지만, 그 계획은 보기 좋게 실패하고 말았다.

길리언은 시카르가 정령을 모으기 시작할 때부터 이런 사태가 올 것을 짐작했기에, 시카르의 다른 일행들은 도망가게 내버려 두고 오직 시카르만 에워쌌다. 파시움은 제 온 힘을 기울여 마법으로 시카르 하나만을 붙잡고 있었다.

비카는 한참, 전투 진영을 벗어나고 레이독스의 근처까지 간 후에야 이것을 깨달았다.

길리언의 진영 앞에는 오직 시카르 혼자만이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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