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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화. 밤은 기운다 (2) (117/197)


117화. 밤은 기운다 (2)
2022.07.14.



“굶주린 하이애나처럼 전장을 떠돌던 용병놈이 이젠 제법 기사 흉내를 내는구나. 듀리온.”

미약한 힘이지만, 듀리온을 도우고 싶었던 나는 방 안에만 처박혀 있을 수가 없었다.

서연도 이에 동의했기에 우리는 거실로 내려와 듀리온을 도왔다. 처음 듀리온은 우리에게 어서 올라가라며 야단이었지만, 내가 매직 완드를 어느 정도 휘두르는 모습을 보고는 더는 나를 올라가라고 하지 않았다.

듀리온을 도우며 근위대를 어느 정도 물리쳤다는 생각에 한숨을 놓으려는 그때, 하필 왕후 다이엔느가 제복을 차려입고 근위대장을 앞세우며 찾아온 것이었다.

정말 쉴 틈을 안 주는 족속들이었다.

다이엔느를 본 서연은 침을 꼴깍 삼키며 뒤로 숨었다. 그녀는 평범한 왕후가 아니었으니까. 정령사 라페의 동생답게 그녀 또한 정령사로서 손색이 없는 실력을 갖고 있었다.

시타르 족에게 정령을 지배당한다는 이유로 정령사를 천대했던 선왕은, 베로니아가 정령사와 결혼했다는 이유로 궁에서 쫓아냈었다.

하지만, 길리언은 제 손으로 왕좌를 차지했기에 누구도 왕후 다이엔느가 정령사라는 이유로 토를 달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다이엔느는 그만큼 강력하고 냉혹했다.


“이제 그런 어설픈 기사 흉내는 그만 내고, 왕손을 내어놓아라. 그럼 너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다이엔느가 뭐라고 말해도 듀리온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너도 라페처럼 혀를 잘 휘두르는군. 공작님께서는 너희 같은 족속을 가장 조심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지.”

“내 능력이 겨우 잘 놀리는 혀 정도라고 생각하는 거라면 오산이란 걸 보여줘야겠군. 그리고 한 가지 더. 네가 오랜만이라 잊은 거 같은데. 나를 조심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 더 있어.”

나 또한 그 이유를 알고 있었기에 나는 서연을 내 뒤로 숨기고 공격 자세를 취했다.


“내가 매우, 비열하다는 것이야!”

나도 알고 있다고!

다이엔느는 곧장 나를 향해 자신의 정령을 내보내었다. 물의 정령. 그녀가 가장 잘 다루는 능력이 바로 물의 정령을 다루는 능력이었다.

하지만, 내게는 시카르가 준 매직 완드가 있었다. 나는 완드를 휘둘러 그녀가 내게 보낸 공격을 거뜬하게 막아내었다.

이것 봐라? 는 듯 나를 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맨손 싸움이라면 내가 불리하겠지만, 매직 완드 대 정령 싸움이라면 나도 해볼 만했다.

그리고 내게는 정령이며 마법이며 베지 못하는 게 없는 듀리온의 검이 있었다.

시카르가 듀리온을 위해 특별히 제작해준 듀리온의 검은 특히나 정령을 베는 기술이 매우 뛰어났다. 검의 잔상이 도망가는 정령의 뒤꽁무니까지도 쫓아갔으니까.

그만큼 듀리온의 검은, 그를 아끼는 시카르의 마음이 녹아나 있는 무기였다.

듀리온은 내가 미처 막지 못한 정령들을 쳐내며 앞을 막았다.


“당연히 잊지 않았다. 남매가 쌍으로 비열하기란 힘든 법이니까. 앞으로도 너희 같은 남매는 다시 없을 테지.”

“그리고 너는 이곳을 살아서 나갈 수 없을 것이다.”

다이엔느는 웃으며 뒤로 물러났다. 그녀가 뒤로 물러서자, 근위대장을 필두로 근위대들이 일제히 앞으로 몰려들었다.

이들이 입고 있는 붉은 옷을 보니, 근위대 중에서도 제1 병기들이었다. 그 수는 제법 많았기에 우리는 조금 뒤로 물러났다.


“마님. 혹시라도 불리해진다면,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밖으로 나가, 백마를 타고 가면 설산으로 마님을 안내할 것입니다.”

근위대 숫자가 많았기에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몸을 피하기 전에 시카르가 올 것이라 믿었다.


“아니요. 듀리온. 공작님께서는 반드시 우리에게 다시 오실 거예요. 반드시.”

만약 그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그땐 그가 죽은 것이리라.

그 생각을 하니 갑자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시카르가 너무 보고 싶어요…… 흐윽…….”

시카르가 봤다면 자신이 그렇게 좋냐고 놀릴 텐데.

놀림을 당해도 좋으니 그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눈물이나 흘리며 감상에 젖어 있을 수가 없었기에 나는 금세 눈물을 닦아야 했다.


“그러니까, 듀리온. 우리 버텨요! 공작님이 오실 때까지 꼭! 꼭 버텨요!”

듀리온은 나를 보며 충성을 표하듯 경계를 했다.


“마님을 실망 시키지 않겠습니다!”

 

 

***

비카는 시카르가 궁지에 몰렸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더는 갈 수가 없었다.


“공작이 갇혔어!”

제르미가 퇴각하다 말고 발걸음을 돌렸다.


“돕겠습니다!”

하지만 시카르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삼삼오오씩 모인 병사들이 원형경기장처럼 시카르의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 중앙에 서 있는 길리언은 결코 길을 내어주지 않을 작정이었다.


“네 놈만 죽는다면 더는 걸릴 게 없이 모든 것은 순조로울 것이다.”

“그 멍청한 머리를 굴리느라 애를 썼군.”

길리언은 마냥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자신에게 반드시 필요한 오른팔이 썩어간다는 이유로 잘라내야 하는 심정이었으니까.


“모두 네놈에게 배운 것이지. 그런 면에서 넌 참 쓸만했는데 말이야. 그런 너를 버려야 해서 나도 씁쓸해.”

“너한테 버려질 일은 없다. 네가 날 취한 적도 없으니까. 모두 너의 착각이었지.”

 

***

말에 오르기 전 제르미가 로엔과 함께 이곳으로 오는 것을 확인했던 레이독스는 출발을 하려다 멈추고 그들을 기다렸다.

하지만, 곧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곳을 향해 질주할 것만 같던 제르미와 로엔은 어떻게 된 영문인지 갑자기 발걸음을 돌려 다시 하천을 향해 뛰어갔다.

상황이 나빠지고 있음을 직감한 레이독스는 빨리 이곳을 떠나야겠다고 판단했다. 레이독스는 베로니아에게 말고삐를 건네었다.


“아무래도 우리는 먼저 출발해야겠습니다. 공주님.”

“레이독스. 넌 어릴 때부터 늘 선택에 있어서 신중했지. 네가 가자고 하는 것을 보니 급한 듯하구나. 서둘러야겠군.”

“따르시옵소서.”

레이독스가 말에 오르려 할 때였다. 키안이 레이독스의 옷깃을 붙잡았다.


“스승님!”

“지금은 급하니 할 얘기가 있거든. 나중에 하자꾸나.”

“아니요! 전 안 가겠습니다.”

“키안. 지금은 그런 거로 실랑이할 시간이 없으니 가서 얘기하자.”

“지금처럼 좋지 않은 상황에서 저는 공작님을 두고 갈 수 없어요. 전 가지 않겠어요.”

“너답지 않게 아이처럼 떼를 쓰는구나.”

“이건 떼가 아닙니다.”

키안은 눈짓으로 베로니아를 한 번 본 후 다시 레이독스를 쳐다보며 말했다.


“제가 이 분, 그러니까 공주님의 아들이 맞죠?”

베로니아는 흥미로운 얼굴로 키안을 지켜보았고, 레이독스는 조금 민망한 눈으로 베로니아를 한 번 봤다가 다시 키안을 쳐다보았다.


“그래. 네가 공주님의 하나뿐인 아드님. 즉, 이 나라의 왕손이다.”

앞에서 흥미롭게 쳐다보던 쌍둥이들이 키안이 왕손이라는 말에 입을 쩍 벌렸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럼, 스승님께 첫 번째 명령을 내리겠습니다. 저는 지금 당장 공작님을 구하러 가야겠습니다. 함께 가주세요.”

레이독스는 난처한 얼굴로 키안을 물끄러미 쳐다볼 뿐이었다. 그의 임무는 키안과 베로니아를 무사히 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키안은 곧 자신이 모시게 될 군주가 될 몸이었다. 더군다나 첫 번째 명령이라니.

레이독스는 마치 도움을 청하듯 베로니아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매우 흥미로운 얼굴로 키안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스승님이라고? 레이독스가 키안을 가르친 건가?”

“송구합니다. 공주님.”

“사가에서 자라서 왕족의 모습이 없을 줄 알았더니, 마치 궁에서 자란 것처럼 왕족의 고귀함과 지엄함을 고스란히 갖추고 있구나. 키안의 말대로 해라. 공작을 구하러 가자. 무슨 연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왕손이 구하고 싶다는데 구해야겠지.”

키안은 고개를 돌려 베로니아를 똑똑히 쳐다보며 말했다.


“저를 키워주신 분입니다.”

“응?”

“시카르 블레이크 공작님께서는 저를 키워주셨습니다.”

시타르 족이 정령사의 피를 가진 왕손을 키웠다고?

시타르 족은 정령사가 불러낸 정령을 마음대로 조작하는 능력이 있었기에 정령사를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었다.

그 시타르 족의 하나 남은 혈통인 블레이크 가에서 제 아이를 키웠다는 사실은 베로니아로 하여금 놀라움을 자아낼 수밖에 없었다.

지금껏 차분하던 베로니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래. 이제 이해가 돼. 그래서 블레이크 공작이 나를 구하러 온 것이군. 제 손으로 키운 왕손의 어미를 구하기 위해서…… 이거 정말 놀라운 일이구나. 레이독스. 키안의 말대로 하라.”

“공주 저하. 하지만, 두 분이 무사하신 게 우선입니다.”

“명령이라지 않느냐. 명령을 어길 생각이냐?”

레이독스는 난처했다. 당장 그러겠다고 할 수 없었기에 그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동안 키안은 자신의 작은 조랑말에 올랐다.


“스승님이 허락지 않아도 저는 가겠습니다. 키워주신 분에게 제 도리를 다하기 위해서요. 그것이 제가 저를 키워준 어머님과 스승님에게 배운 것이니까요.”

키안은 레이독스의 대답도 듣지 않고 말을 몰아갔다. 레이독스는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말에 올랐다.


“방법이 없을 것 같군요. 저도 왕손 저하를 도우러 가겠습니다. 감히 공주 저하께는 제 쌍둥이들의 안전을 부탁하겠습니다.”

“그 쌍둥이들이라면, 지금 키안의 뒤를 따라 말을 몰고 가는 저 애들을 두고 하는 말이겠지?”

“네?”

레이독스가 놀란 눈으로 베로니아가 보는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을 땐 이미 쌍둥이들이 키안의 뒤를 따라 말을 몰아 달리고 있을 때였다.

레이독스는 베로니아에게 인사를 할 틈도 없이 뒤를 바짝 쫓기 위해 말을 몰아갔다.

베로니아 역시도 웃으며 말에 올랐다.

***

전투 현장은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

수많은 병사가 시카르 하나를 잡기 위해 그를 에워싸고 있었고, 그 뒤로 시카르를 향해 비카 일행이 길을 트고 있었지만 쉽지가 않았다.

멀리서 어렴풋이 보이는 시카르의 모습은 머리에서부터 피를 흘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얼핏 보아도 상황은 매우 심각해 보였다. 시카르가 쓸 수 있는 것은 오직 팔 하나가 전부였다. 움직일 수 있는 오른팔 단, 하나로 적들과 싸우고 있었다.

키안은 시카르를 향해 내달리며 이를 바닥바득 갈았다. 그리고 비카에게서 배운 대로 정신을 집중해 자신이 모을 수 있는 최대한의 정령을 불러가며 말을 달렸다.

말을 몰며 달려가는 키안의 뒤로 잔상처럼 정령들이 붙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잔상이 아닌, 불의 정령들이 모인 것이었다. 마치 키안의 몸에서 불이 난 것처럼 하나씩 모여든 정령들의 몸집이 제법 커져 있었다.

이윽고 병사들이 있는 곳까지 키안이 다다랐을 때, 비카 일행을 비롯해 길리언까지도 키안을 발견했다.


“왕손이다! 왕손을 붙잡아라!”

“왕손은 즉시 척살해도 좋다! 즉시 척살하라!”

“왕손의 목을 가져오는 자에게 큰 포상을 내리리라!”

라페와 파시움은 병사들의 사기를 돋우기 위해 더욱 고함을 쳤다.

하지만, 그런 말 따위 키안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키안은 오직 시카르가 있는 곳을 향해 내달릴 뿐이었다.

이윽고 시카르를 막고 있는 병사들이 있는 곳까지 달려온 키안은 자신이 지금껏 모아왔던 불의 정령을 병사들을 향해 내던지며 외쳤다.


“내 아버지를 건들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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