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밤은 기운다 (3)
(118/197)
118화. 밤은 기운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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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화. 밤은 기운다 (3)
2022.07.18.
“아름다운 내 얼굴에 흠집 날뻔했어. 공작 부인. 그 매직 완드는 공작의 것인가?”
듀리온이 근위병과 맞서는 사이, 내가 휘두른 마법에 한 방 맞은 다이엔느가 기분 나쁜 얼굴로 다가왔다.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전설의 그 마법 무기지. 이번엔 스쳐 지나갔지만, 다음엔 네 머리통을 제대로 맞출 거야.”
나의 과격한 발언에 듀리온은 조금 놀란 듯 쳐다보았지만, 그는 이내 웃으며 다이엔느를 향해 칼날을 세웠다.
“우리 마님께서는 한다면 하는 분이시지.”
우리는 전투를 잠시 멈추고 있긴 했지만, 다이엔느가 전투를 멈춘 것은 내가 그녀를 향해 라이트닝 볼트를 쏘아대서가 아니었다. 왕실에서 나온 다급한 파발 때문이었다.
전투를 지켜보던 다이엔느는 어찌 된 영문인지 파발을 받고는 전투를 멈추었다. 그리고 그 틈을 타, 내가 매직 완드를 그녀에게 날린 것이었다.
기껏해야 그녀의 볼을 잠시 스쳐 가는 정도였지만, 꽤 자극을 받은 듯 다이엔느는 살기를 뿜고 있었다.
“잘도 매직 완드를 익힌 모양이군. 내게 시간이 좀 있다면 네 낯짝을 뭉개주고 싶지만, 아쉽게도 난 가봐야겠구나.”
다이엔느가 공작저에 온 이유는 키안을 찾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가 간다고 하는 것이라면…….
혹시 키안을 찾은 것일까?
불안한 마음에 그녀가 그냥 가게 둘 수가 없었다.
“시간이 없다니, 무슨 소리야?”
몸을 돌리려던 다이엔느는 살벌한 미소를 지었다.
“베로니아의 아들놈을 찾았다는 소리지. 이제 그놈이 죽고 나면 너희도 끝날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살려주지. 어차피 곧, 모두 죽을 테니까.”
아, 안 돼. 이대로 보낼 수 없어.
나는 걸어 나가는 다이엔느를 향해 마법을 날려 그녀의 머리를 가격했다.
전기를 머리에 직통으로 맞은 다이엔느는 그대로 고꾸라지며 쓰러졌다. 감전 때문에 쓰러진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내가 다음엔 머리를 맞춘다고 했지!”
설마 공작가의 공작부인이 돌아서는 왕후의 뒤통수를 가격할 줄은 상상도 못 했는지 근위대들은 당황한 얼굴로 나를 향해 검을 치켜들었다. 듀리온은 그런 나를 지키기 위해 부채모양으로 크게 한 바퀴 검을 휘둘렀다.
그사이에 나는 근위대들을 향해 완드를 세우며 말했다.
“죽진 않았다. 기절한 네 주인이라도 데려가고 싶으면 쓸데없는 힘 싸움은 그만하는 게 좋을 것이다. 아니면 내가 왕후의 숨이 끊어질 때까지 마법을 쏠 것이다!”
이것은 진심이었다. 키안이 저들 손에 들어갔다면 상황이 보통 심각한 게 아닐 텐데 왕후의 목숨 따위, 내 알 바 아니었다.
“들은 바와 같이 이대로 물러가지 않으면 왕후의 숨이 끊어질 때까지 나는 너희를 막을 것이다. 어쩔 텐가. 숨이 끊어진 왕후를 데려갈 텐가? 아니면, 지금 데려갈 텐가?”
근위대장은 길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수하들을 시켜 왕후를 들게 했다.
“지금은 물러나겠습니다.”
근위대가 사라지는 것을 보고 나는 서연에게 잠시만 공작저를 지키고 있으라고 일렀다.
“어, 어딜 가시려고요?! 설마, 제가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니죠?”
“지금은 그 방법뿐이에요. 잠시만, 있어 주세요. 키안을 찾았다고 하니 공작저는 당분간 안전할 거예요.”
“하, 하지만 정말 제가 생각하는 그것이라면…….”
“서연 님, 죄송해요. 길게 대화를 나눌 수가 없을 것 같아요.”
듀리온은 우리가 나누는 대화를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그 방법이라니. 그 방법이 무엇입니까. 마님.”
“파시움의 은신처로 가야 해요. 서둘러요.”
“네?! 파시움의 은신처라니요. 설마, 파시움의 케이지를 노리는 것입니까?”
“자신의 신체를 제물로 바친 마법사의 위력은 대단하다고 하죠. 키안이 잡힌 것을 보면, 시카르 조차도 파시움을 감당하기 힘들기 때문일 거예요. 그러니, 가서 그의 케이지를 부숴야 해요! 그래야 키안의 안전을 보장할 수가 있어요!”
“하지만, 케이지를 건들면 파시움이 소환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그런 일이라면 제가 하겠습니다.”
“아니요. 듀리온은 파시움의 은신처를 찾을 수 없을 거예요. 숲속 은신처를 찾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니까요. 같이 가요. 같이 가야 해요! 지금 공작저에서 가장 빠른 말을 타야 해요! 어서 나가요!”
서연은 자신도 따라가겠다는 의미 없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안드레아를 불러 그녀와 같이 있어요. 그러면 좀 나을 거예요.”
내가 서연을 보며 웃어주자 그녀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슬픈 미소를 지었다.
“부디 조심히 다녀오세요.”
나는 서연을 안심시키기 위해 무사히 잘 다녀오겠노라 말하고 웃으며 저택을 빠져나왔다.
듀리온과 나는 마구간으로 곧장 향했지만, 마구간에는 빠른 말이 없었다. 그나마 제일 빠른 말을 구해오겠다던 듀리온은 커다란 말 하나를 끌고 왔다.
“마님! 이것 보십시오!”
말 위에는 누군가가 축 처진 몸으로 엎드려 있었다. 다가가 자세히 보니 그 얼굴은 터커였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부상 당한 터커를 레이독스의 말에 태워 보낸 것 같습니다.”
내가 시카르였다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라도 읽어볼 텐데 참 답답한 노릇이었다.
“먼저 터커를 저택에 두고 올 테니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듀리온은 그 커다란 몸으로 터커를 포대 자루 들듯 어깨에 들춰 메고 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터커는 괜찮아요?”
“출혈 자국이 있었지만, 누군가 치유마법을 사용한 흔적이 있었습니다.”
“다행이군요. 그럼 우린 어서 가요!”
“레이독스의 말은 빠를 테니, 이 말을 타면 될 것입니다.”
더 생각하고 말고 할 게 없었다.
“어서 타요!”
듀리온과 나는 곧장 말에 올랐다.
***
“아버지!”
파시움의 공격에 피를 뿜어내던 시카르는 남은 한 손으로 입술을 닦아내며 키안을 쳐다보았다.
“너 방금 뭐라고……?”
키안은 눈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뛰어와 시카르의 얼어붙은 팔과 다리를 살폈다.
“뭐긴. 뭐야! 아버지 불렀잖아!”
아버지…….
이런 상황에서 어처구니없게도 시카르는 눈물이 툭 떨어졌다.
“너 방금 아버지라고…….”
“그럼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하지, 아저씨라고 해? 팔다리 다 꽁꽁 얼었는데 이러고 싸우면 어떡해. 어서 팔 좀 뻗어봐. 시간 없어!”
키안은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으로 슥슥 닦고는 툴툴거리며 잔소리를 계속했다.
“이 꼴로 혼자 어떻게 싸우겠다고 다 보내면 어떡해!”
“너는 위험한데 피신하지 않고 이곳으로 오면 어떡해!”
“아버지가 걱정돼서 못 가겠는데 어쩌라고!”
내가 걱정돼서 갈 수가 없었다고……?
눈물이 또 한 번 툭 떨어졌다.
자신을 치료하겠다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슥슥 닦으며 열중하는 키안을 보며 그는 생전 처음으로 가슴이 뜨겁고 뭉클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시카르도 툭, 떨어지는 눈물을 손으로 닦으며 키안이 불러낸 정령들을 쳐다보았다.
“많이도 모았다.”
“아버지가 한방이 필요할 땐 이렇게 모아서 한방에 터트리라며.”
“그래. 그랬었지. 기특하게도 잘했군.”
“열심히 모으긴 했지만 내 정령들은 약해서 오래 못 버텨. 그동안 동상 걸린 것들 녹여줄 테니까. 앞으로 아버지가 나 책임지고 어머니께 다시 데려다줘. 알았어?”
“그래. 알았다.”
시카르는 피식 웃으며 키안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키안도 웃으며 시카르의 팔을 어루만졌다.
일시적이긴 했지만, 저주의 발현에서 벗어난 시카르는 자유롭게 몸을 날릴 수 있었다.
그는 키안에게 벌떼처럼 날아드는 무리를 쉽게 베어내며 떠도는 정령들을 지배했다.
키안이 시카르의 저주를 풀어주는 모습을 자신의 두 눈으로 확인한 길리언은 이를 으드득 갈았다.
“파시움. 저 쥐새끼 같은 왕손부터 죽여라. 어서!”
이제 표적은 시카르가 아닌, 온전히 키안에게 몰렸다.
“모두 블레이크가의 소공자를 향해 공격을 집중한다! 소공자를 죽이는 자에게 큰 포상을 내릴 것이다! 소공자에게 공격을 집중하라!”
모든 맹공격은 키안을 향해 집중되었다. 왕손을 없애고 공주를 없애고 나면 모든 화근의 싹은 사라지는 것이다.
저주로 인해 몸이 둔해져 파시움의 마법을 피하기 힘들었던 시카르는 가벼운 몸으로 그를 막아내었지만, 키안을 계속 보호하는 것은 무리였다.
“키안! 이제 네 할 일은 다 했으니 어서 이 자리를 피해라!”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
키안은 전투 진영을 빠져나가기 위해 몸을 돌렸지만, 길리언은 제 발로 들어온 먹잇감을 놓칠 수가 없었다.
“도망가지 못하게 포위 진영을 갖추어라! 어서!”
파시움을 내버려 두면 키안이 무사하지 못할 것 같았다. 시카르는 파시움의 앞으로 바짝 붙어서 그를 공격했다.
시카르의 공격은 갈수록 드세졌고, 파시움은 갈수록 불리했다. 전투는 어느새 시카르 일행이 유리해지고 있었다.
그러자, 파시움은 블링크(Blink)를 쓰며 순간적으로 몸을 이동시켜 키안을 껴안았다.
파시움이 키안을 껴안았다는 것은 함께 자폭하려는 시도가 아니고서야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자폭이다!”
시카르는 자신이 지배할 수 있는 모든 정령을 불러모아 파시움과 키안을 분리하며 뒤에서 파시움을 꼭 끌어안았다.
“이 몸 놓지 않으면…… 죽는다!”
“왜!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하려는 거야! 파시움!”
“국왕 전하…… 내 가문… 되살렸다. 스승님도 양지바른 곳… 묻어주셨다. 나의 왕…… 내 식대로 지킨다.”
“그럼 난 아비로서 아들을 지키겠다. 어차피 너와 난 죽을 운명들이었지. 조금 더 빨리 그 운명이 찾아온 것일 뿐이니 억울할 것도 없다!”
키안은 파시움의 자폭을 막아야 했기에 자신을 향해 등을 보이고 서 있는 시카르를 바라보며 고함을 질렀다.
“아, 안 돼! 아버지를 살려야 해! 살려줘!”
하지만, 로엔이 뒤에서 키안을 꽉 붙잡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온 힘을 다해 키안을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키안은 그동안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시카르가 자신의 친아버지인 발리제의 시신을 찾아주고, 어린 시절 무릎 위에 저를 앉혀주고 재워주었던 따스한 기억들.
직접 해주었던 요리들과 자신을 두 손으로 높이 들어 올렸던 기억들까지.
떠올려보면 받은 것이 참 많았지만, 저는 해 준 게 단, 하나도 없었다.
“이거 놔! 난 아버지께 아직 해준 게 하나도 없단 말이야! 이거 놔! 놓으라고!”
키안은 울부짖었지만, 로엔도 필사적으로 키안을 끌어 안고 있었다. 로엔도 대신전에서 공작과 함께 보냈던 일들이 떠올라 눈물을 흘리면서도 왕손을 놓아줄 수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저하. 저하를 보내드릴 수가 없는 저를 용서해주세요…….”
시카르를 안고 있는 파시움의 몸에서 쏟아지는 빛이 점점 커졌다.
“아! 안 돼!”
비카도 시카르의 판단을 존중해줄 수가 없었다. 그녀도 시카르를 향해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이 미친 공작 놈아! 너 죽어서도 죽여 버릴 거야!”
비카의 저주가 무색하게, 곧이어 폭발이 일어나며 거대한 바람이 불었다.
“쿠아앙!!!”
바람을 정통으로 맞으며 비카는 울부짖었다.
“죽여버릴 거야! 시카르!”
파시움과 시카르가 있던 자리에는 폭발의 흔적만이 남아 있을 뿐. 두 사람은 가루가 된 듯 사라지고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