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밤은 기운다 (4)
(119/197)
119화. 밤은 기운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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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화. 밤은 기운다 (4)
2022.07.21.
파시움의 은신처는 레카도르의 강줄기 끝에 있는 보이지 않는 마법진을 통해 있었다.
보이지 않는 마법진을 따라 땅에 대고 그림을 그리자, 듀리온과 나는 눈 깜짝할 사이에 파시움의 은신처로 워프되었다.
“파시움의 은신처가 이곳이었군요.”
듀리온은 신기하다는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파시움의 케이지는 어디 있습니까. 마님.”
“바닥에 있는 색을 순서별로 눌러야 해요.”
나는 기억을 끄집어내, 바닥에 있는 색을 하나씩 차례대로 눌렀다. 빨강, 파랑, 초록, 흰색, 검은색을 차례대로 누르자 바닥에서 마법진이 일어나며 케이지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케, 케이지다! 마님, 케이지입니다!”
케이지를 발견한 듀리온이 안으로 들어오려 했지만, 마법진이 만들어낸 장벽 때문에 들어올 수가 없었다.
나도 이런 건 몰랐기 때문에 당황했지만, 곧 받아들일 수가 있었다.
듀리온은 보이지 않는 장벽을 손으로 쿵쿵 쳐내고 있었다.
“마님! 마님!”
내가 괜히 이 세계에 오는 바람에 키안을 위험에 빠트렸다. 결자해지라 했다. 내가 만든 혼란이니, 내가 해결하는 게 맞는 것이겠지.
이 케이지에 손을 대면, 파시움이 소환된다는 것 말고 나도 아는 게 없었다. 이 다음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를. 하지만, 분명한 건 난 반드시 이 케이지를 박살 내겠다는 것이었다.
케이지에 손을 대자마자 환한 빛이 시야를 가렸다. 그리고는 천둥이 치듯 쿵, 하는 굉음과 함께 무언가가 눈앞으로 툭 떨어졌다.
당연히 파시움이 소환됐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파시움뿐만이 아니었다.
이게 얼마만에 보는 건가. 겨우 반나절도 안 됐는데도 아주 오랜만에 보는 것처럼 너무나 절실하던 얼굴. 시카르였다.
시카르를 보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시카르?”
“유라?”
곧 기절한 파시움이 정신을 차리는 것을 보고 나니, 지금 그와 조우의 인사나 나누고 있을 시간이 없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나는 파사움이 케이지에 손대기 전에 그것을 폭파 시켜야 했기에 케이지를 향해 완드를 조준했다.
“케이지를 박살 내버려!”
완드에서 나온 라이트닝 볼트가 케이지를 향해 전기를 내뿜었다.
이제 막 정신을 차린 파시움이 나를 말리기 위해 뛰어 왔지만, 곧 시카르에게 제지를 받으며 뒤로 나뒹굴었다.
이제 막 케이지를 파괴하는 자는 그 공격을 그대로 스스로가 흡수한다는 말이 하필 그때 떠올랐다.
케이지에서 라이트닝 볼트가 반동되며 내게로 날라왔다. 그리고 시카르는 반사적으로 내게 달려들며 나를 껴안았다.
케이지 박살남과 동시에 시카르의 등도 박살 나는 소리가 들렸다.
“콰지지직! 쾅쾅!”
“빠지지직! 뻑뻑!”
파시움과 시카르의 비명이 동시에 들려왔다.
“시, 시카르, 괜찮아?!”
“고?! 공작님!”
“으아아아악!!!”
시카르는 고통 속에 비명을 지르면서도 내게로 쏟아지는 마법을 자신이 고스란히 받아내고 있었다.
파시움의 집 안은 온통 전기로 지지직거리고 있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모든 것이 천천히 꺼져갔다. 완전히 박살이 나서 손을 쓸 수 없게 된 케이지와 함께, 파시움의 눈이 돌아온 것이 보였다.
그의 눈은 이제 빨갛게 점을 찍은 듯한 그런 눈이 아니었다. 그의 눈은 병든 눈처럼 회색빛 동공이 돼 있었다.
그는 이제 마법으로 앞을 볼 수가 없을 것이다. 눈이 있되 보지 못하고, 혀가 있되 말하지 못하게 되었다.
나는 있는 힘껏 완드를 그를 향해 휘둘렀고, 그도 나를 향해 마지막 힘을 쥐어 짜내며 마법을 날리려 했다.
그러자 시카르가 검을 휘둘러 그를 찔렀다. 무시무시한 괴물 같던 파시움은 힘없이 털썩 쓰러졌다.
실로 허무한 죽음이 아닐 수가 없었다.
시카르는 타는 듯한 고통을 참아내듯 인상을 찡그렸다.
“너, 어, 어떻게 여기까지 온…… 아니, 됐다. 기억을 보면 알겠지.”
“키안은? 키안은 어떻게 됐어?”
“나는 괜찮은지 묻는 게 순서가 아닌가? 너무 키……키안만 찾는다고 생각하지 않아? 쿨럭…….”
말하는 시카르의 입안에서 피가 쏟아졌다.
“시카르, 괜찮아?!”
“고, 공작님! 괜찮으십니까?!”
듀리온은 놀라서 시카르에게 달려왔고 시카르는 남은 힘을 짜내듯 듀리온의 품을 뒤져 힐링포션을 하나 찾아냈다.
“이놈아. 괜찮냐고 묻기 전에 이걸 먼저 줬어야지.”
이 와중에도 시카르는 냉정하게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귀신같이 찾아냈다. 그는 힐링 포션을 입안에 털어 넣으며 이제 조금 살겠다는 듯 바닥에 드러누웠다.
“하아…… 전기를 맞았더니 죽을 맛이구나. 아니면, 내가 정말 죽어가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듀리온! 어서 시카르를 데리고 신전으로 가주세요! 어서요!”
시카르는 내 말이 끝나자마자 내 손을 붙잡았다.
“엄살 좀 피워봤더니 꽤 내가 걱정됐나 보군. 아직 그 정도는 아니다.”
“저, 정말이야?”
시카르는 이제 좀 괜찮다는 듯 머리를 털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힐링 포션을 안 먹었다면 기절했겠지만, 지금은 조금 괜찮다. 근육이 다친 건지 몸이 뻐근하긴 하지만, 기절할 정도는 아니니까.”
“근데, 어떻게 된 거야? 다이엔느의 말로는 키안을 붙잡았다던데, 키안은 괜찮아?”
시카르는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파시움이 없어진 것을 확인했을 테고, 비카가 살아 있으니 내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모두들 인지했겠지. 그러니, 만만히 당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얼마나 버틸지 모르는 거잖아! 우리 어서 가!”
“그래야겠군.”
시카르는 비척거리며 일어섰고, 듀리온은 그를 부축하며 말했다.
“그런데, 공작님 밖에 말이 하나뿐입니다.”
“그래? 너와 내가 같이 말에 오른다면 얼마 가지도 못하고 주저앉겠지. 말에는 나와 유라가 타야겠다.”
“파시움의 집에는 말이 없는데, 그럼 듀리온은 어떡해?”
파시움은 새로 변해 날아다녔기 때문에 그의 집에는 말이 없었다. 하지만 다른 게 하나 있기는 했었다.
“고대의 마법 빗자루가 있으니 그걸 타고 가라. 듀리온.”
“마법 빗자루요? 그런 신기한 물건을 제가 타도 되겠습니까, 공작님? 아무래도 그건 공작님과 마님이 타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듀리온은 마법 빗자루를 탄다는 것에 조금 설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마법 빗자루라는 것의 실체는…….
곧 듀리온도 그것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그 작은 빗자루는 듀리온을 태우긴 했지만, 자유자재로 높이 날아오르는 그런 마법 빗자루가 아니었다.
듀리온은 자신의 발이 바닥에 질질 끌리는 것을 보며 욕이 나오는 것을 가까스로 참는 것 같았다.
“정 불편하면 다리를 빗자루 위로 올려라.”
하지만, 그렇게 하면 중심을 잡기가 쉽지가 않아서 듀리온은 몇 번이고 뒤집어졌다. 빗자루 자체는 빨랐지만, 자꾸만 발이 땅에 닿는 바람에 듀리온은 가다가 멈추고 가다가 멈추고를 반복해야만 했다.
“우린 먼저 갈 테니 조심해서 따라와라! 듀리온!”
듀리온이 멀어지는 것이 안타까웠지만 어서 키안의 안위를 확인해야만 했기에 나도 마음이 급할 수밖에 없었다.
키안만 무사하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았다.
***
“이럴 수가…….”
“비카가 죽지 않았어!”
길리언과 라페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눈을 치켜뜸과 동시에 비카는 떨어진 간을 다시 주워 넣듯 서늘해진 간담을 쓸어내렸다.
“봤나? 길리언. 보다시피 공작이 죽지 않은 것 같군.”
“공작이 살아 있다면, 파시움도 살아 있다는 말이겠지.”
그때, 저 멀리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글쎄. 공격은 우리에게 넘어온 거 같은데?”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린 레이독스 일행은 놀란 얼굴로 고개를 조아렸다.
“공주 저하!”
쌍둥이들과 피신한 줄 알았던 베로니아가 위세 등등한 얼굴로 말을 타고 오고 있었다.
“저 어린 왕손도 싸우겠다고 가는데 나만 도망가긴 그래서 다시 왔다. 요 어린 쌍둥이들이 길을 꽤 잘 알고 있더군.”
쌍둥이들은 베로니아의 뒤에서 웃으며 고개를 내밀었다.
“헤헤.”
키안은 비카가 살아 있음에 안도하고, 쌍둥이들이 다시 왔음에 기뻐했다.
길리언 또한, 베로니아의 등장이 마음에 들었기에 여유있게 웃었다.
“잘 됐군. 너희 둘만 죽으면 모든 게 끝이니까.”
“오는 길에 듣기로는 그쪽에는 마법사가 없어진 것 같던데, 우리에겐 마법사가 있다. 길리언.”
“하지만, 내겐 제1 병기가 남아 있지. 물론 뛰어난 정령사들도 있고 말이야.”
베로니아는 말을 타고 오며 근위대들을 향해 고함 질렀다.
“잘 들어라. 제1 병기들이여! 너희는 선대왕 시절부터 왕실을 지키던 제1 근위대들일 것이다. 지금은 길리언을 국왕으로 섬기고 있지만, 너희가 충정을 바친 왕은 바이카르 선대왕인 것을 알고 있다. 선대왕은 와병 중에 폐왕의 횡포함을 목도하시고 나를 왕위에 앉히지 못한 것을 개탄하시며 승하하시던 날 나를 왕좌에 앉히라 유지를 내리셨다! 하지만, 폐왕이 이를 덮기 위해 3인의 충신 제거했다! 그들이 누군지는 모두 짐작할 것이다. 그 중엔 파시움의 아버지인 하이람 노미나트도 있었으니까!”
길리언은 이를 갈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닥쳐라. 베로니아. 안 본 사이에 요망한 마녀가 돼서 나타났구나! 다시는 베로니아가 요망한 혓바닥을 놀리지 못하게 하라!”
제1 병기는 잠시도 흔들리지 않고 길리언의 명령을 따랐다. 선대왕의 유지가 있었다 해도, 그들이 지금 모시고 있는 것은 현재의 국왕이었으니까.
베로니아도 그들이 바로 입장을 바꾸어 자신을 따르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공주의 의도는 단 한 줌만큼이라도, 백 명 중 한 명이라도 그 믿음을 흔들어 놓는 것이 목표였을 뿐이었다.
베로니아는 신성력을 발휘하면서도 노련하게 검을 휘두를 줄 알았다. 그녀는 말에서 내려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병사들을 냉정하고도 차분히 하나씩 제거하며 키안이 있는 곳까지 향했다.
“공주 저하를 보호하라!”
레이독스가 외치자, 제르미가 힘을 보태 공주에게 들러붙는 인간들을 향해 파이어 볼을 날렸다.
비카가 라페의 공격을 되받아 쳐주고 있었지만, 자꾸만 다친 병사들을 치유시키는 길리언 때문에 적의 숫자를 줄여나가기가 쉽지가 않았다.
싸움은 날이 밝을 때까지도 지속되었다. 양쪽 모두 싸움에 지쳐 갔고, 길리언도 더는 치유마법을 쓸 신성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모두가 지쳐 싸움이 느릿느릿하게 흘러갈 때쯤, 길리언의 뒤로부터 비명소리가 하나둘씩 들려왔다.
그것은 병사들이 하나씩 쓰러지는 소리였다. 길리언이 고개를 돌리자, 피를 뒤집어쓴 시카르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달려드는 병사를 하나씩 베며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어떻게 된 일인지 파시움이 완전히 당했다는 것을 길리언은 직감했다.
“너, 너……!”
시카르는 비릿하게 웃으며 피로 물든 칼날을 길리언의 목에 겨누었다.
“파시움은 죽었고 이제 모든 것은 끝났다. 길리언. 내가 너의 목숨을 거두리라!”
시카르가 들어 올린 검날이 길리언의 가슴을 향해 내리꽂았다. 길리언은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다.
시카르는 축 늘어진 길리언의 앞에 서서 칼을 높이 치켜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