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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화. 밤은 기운다 (5) (120/197)


120화. 밤은 기운다 (5)
2022.07.25.


시카르는 내가 전투가 벌어지는 장소로 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기에, 중간에 나는 공작저로 돌아왔다.

서연은 나를 보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쉬며 눈물을 흘렸다.


“무사히 잘 다녀오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정말 다행이에요. 공작부인.”

안드레아도 눈시울을 붉히며 옆에 서 있었다.


“정말 다행이에요. 마님.”

“참, 터커는 어떻게 되었지? 안드레아?”

“터커는 저체온이 심해서 안정을 취하고 있습니다. 며칠 지나면 괜찮아질 것 같습니다.”

“그래. 다들 무사하다니 다행이야. 안드레아는 이제 물러가도록 해.”

“네. 마님.”

안드레아가 물러가고 나자, 서연은 내게 정말 궁금한 것을 물어왔다.


“그런데, 파시움은 어떻게 됐어요? 케이지는 파괴하신 거예요?”

그녀가 원하는 소식을 전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나는 기쁨의 미소로 화답했다.


“네. 파시움은 죽었어요.”

나는, 시카르와 만난 일과 듀리온이 저비행 빗자루를 타고 느릿하게 오고 있을 것이라는 얘기를 해주었다.

진지하게 내 말을 경청하던 서연은 저비행 빗자루를 타고 오는 듀리온의 얘기를 듣자 그제야 활짝 웃으며 눈물을 닦았다.


“이제 정말 편히 웃을 수 있겠어요. 아 참, 식사를 준비하고 기다리던 중이었어요.”

“식사요?”

서연은 우리가 잘못될까 봐 걱정하는 와중에도 우리가 무사히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식사를 준비 중이었다고 한다.

그 마음이 고마워서 더욱 감동적이었다.

간단히 식사를 끝내고 나니, 듀리온이 시카르에게서 서신을 갖고 왔다.

모두 잘 해결됐고, 곧 공작저로 올 테니 걱정말고 편히 쉬고 있으라는 내용들이었다.

모두 잘 되었다고 하니, 그제야 잠이 몰려왔다.


 

***

얼마쯤 잤을까. 머리를 쓸어 넘기는 손길에 놀라 눈을 뜨자 시카르가 덤덤한 눈으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잘 잤어?”

시카르의 얼굴이 유달리 반짝여서 처음엔 꿈인 줄 알았다가 곧 깨어난 나는 그의 등 뒤로 햇살이 내리쬐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얼마나 반갑던지 나는 곧장 팔을 뻗어 시카르를 껴안았다.


“시카르!”

내가 이렇게나 반겨줄 거라고는 생각도 못한 모양인지 시카르는 잠시 멈칫했다가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잘 자고 있어서 다행이군.”

“다 잘 됐다는 서신을 받긴 했는데, 어떻게 된 거야?”

나는 그에게서 뒷얘기를 듣기 위해 몸을 빼내려 했지만, 시카르는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잠시만, 조금만 더 안고 있자.”

시카르는 나를 꼭 껴안은 채 긴 한숨을 쉬며 얘기를 꺼냈다.

***

라페는 길리언의 죽음을 목도한 즉시 도망을 치기 시작했고 레이독스는 라페를 바짝 뒤쫓아 그를 붙잡아 끌고 왔다.

시카르는 쓰러져 있는 길리언의 앞에 서서 손에 든 검날을 높이 치켜들어 올리며 외쳤다.


“이제 레카도르 왕국은 역사를 다시 쓸 것이다. 이 시카르 블레이크가 천명을 받드니! 왕국의 새 주인을 모실 것이다! 모두 베로니아 저하께 충성을 바치도록 하라!”

“베로니아 저하께 충성을 다 바치겠나이다!”

하지만, 베로니아를 향해 충성 맹세를 하는 건 시카르의 일행들 뿐. 근위대들은 자신들의 눈앞에서 왕을 향해 칼을 휘두른 시카르를 따르지 않았다.

시카르는 다시 한번 더 칼을 높이 치켜들었다.


“새 주군을 따르는 자에게는 자비를! 따르지 않는 자에게는 죽음을 내리리라!”

베로니아는 눈치를 보고 있는 근위대들을 향해 자신의 신성력으로 그들을 하나씩 치유하며 걸어 나갔다.


“그대들에게 레카도르의 안녕과 평화를 약속하노라!”

공주의 자비로운 신성력에 근위대의 절반 이상이 베로니아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새로운 군왕께 충성을 다 바치겠나이다!”

시카르는 자신이 뱉은 말대로 충성한 자들은 다시 왕실의 병사로 삼았으며, 불복한 자들은 모두 옥에 가두었다.

한편, 기절한 왕후를 데려와 왕후궁으로 옮긴 근위대는 병사들로부터 왕권이 바뀌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근위대장님! 큰일 났습니다! 베로니아 공주님의 반정이 성공했습니다!”

“전하께서는 어떻게 되셨느냐?”

“전하께서는 사망한 듯 보입니다!”

이미 국왕이 사망했다면 왕권은 완전히 바뀐 것이리라. 근위대장은 결단을 내려야 했다. 자신의 잘못된 선택 하나로 모두가 다 죽을 수 있었다.

대장은 근위대에 새로운 주인을 따를 것을 명했다.


“군왕이 바뀌었다고 해도 우리가 모시는 국왕은 레카도르 왕족의 핏줄이다! 그러니, 너희는 모두 새로운 국왕을 따르도록 하라!”

근위대 몇 명은 국왕에 대한 충정을 손바닥 뒤집듯 할 수 없다고 투덜거리긴 했지만, 대부분은 모두 근위대장의 말을 따랐다.

그때, 길리언의 시신을 수습하던 한 병사는 아직 그가 숨을 쉬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급하게 근위대장에게 보고했다.


“대장님! 국왕 전하의 숨이 아직 붙어 있습니다.”

시카르의 칼날이 정통으로 길리언의 심장을 관통했지만, 질긴 목숨은 쉽사리 끊어지지 않았다. 그는 미약하게 남아 있는 의식에서도 자신을 끊임없이 치료해 나갔다.

길리언이 살아 있다는 것을 보고 받은 시카르는 길리언의 시신을 수급하는 대신, 베로니아가 갇혀 있던 왕궁 지하 감옥에 가두었다.

기절해 있던, 다이엔느는 잠결에 물을 가져오라고 호통을 쳤다가 아무도 반응하지 않자, 눈을 떠보니 감옥인 것을 알고 당황했다.

한동안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쇠창살을 붙잡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던 다이엔느는 결국 지친 듯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고, 라페는 조용히 죽음을 기다렸다.

파시움의 시신을 수습하러 갔던 제르미는 그가 아직 살아 있는 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파시움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기억을 모두 잃은 자를 죽여 무엇하겠습니까. 파시움은 제가 거두어가겠습니다.”

시카르가 기억을 본다는 것을 몰랐다면 파시움의 시신을 수습했다고 하고 그를 거둘 요량이었다는 것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케이지가 파괴된 충격으로 파시움은 예전만큼의 마력을 부릴 수는 없었다. 파시움의 기억이 돌아와도 제르미가 충분히 다룰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먼저 베로니아에게 보고를 하는 게 우선이었다. 시카르는 베로니아에게 파시움을 어떻게 처결할지 물었지만 베로니아는 모든 전권을 시카르에게 맡겼으니 알아서 하라고 하명했다.

시카르는 베로니아의 뜻에 따라 신속하게 모든 일을 처리해나갔다.

무엇보다 왕좌를 오래 비울 수가 없었기에 대관식부터 서둘렀다.

하지만, 베로니아는 왕위를 거부했다.


“이 자리에는 곧바로 키안을 앉히도록 하라.”

놀란 건 시카르 뿐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직 국정을 돌보기에 왕손의 나이가 너무 어리십니다.”

“내가 아들에게 왕위를 양보하는 것은 내 아들만을 믿어서는 아니다. 그대들이 내 아들을 잘 보좌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후계가 없는 것도 아닌데, 베로니아가 왕좌를 거부한다면 강요할 수는 없었다. 다만, 그 말이 진심인지 떠보는 말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기에 시카르는 다시 한번 공주의 의중을 확인했다.


“다시 한번 상량해 주시옵소서.”

“난 이미 내 생각을 일렀으니 날 회유할 생각은 마라. 군왕의 자리는 오래 비워둘 수가 없다는 것을 그대들도 알겠지. 되도록 빨리 키안의 대관식을 준비하도록 해라.”

유라의 기억 속에서 본 원작에서도 베로니아가 왕좌에 앉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때 키안은 충분히 국정을 다스릴 수 있는 나이였지만, 지금 키안은 혼자 국정을 이끌기에는 너무 어렸다.


“공주님께서 왜 그런 선택을 하셨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나는…….”

베로니아는 말끝을 흐리다 슬픈 어조로 말했다.


“내 남편이 보고 싶구나. 발리제는 지금 어디 있지? 어째서 내 아이만 키우게 된 건지 모두 설명하라.”

발리제가 죽었다는 사실을 베로니아가 아직 모르고 있다는 것이 시카르는 조금 의아했다.

예전이었다면, 아무런 망설임 없이 발리제는 이미 죽었다고 했겠지만, 지금의 시카르는 조금 망설여졌다.

발리제의 죽음이 베로니아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 될지.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았으니까.

시카르는 조금은 머뭇거렸지만, 하지 않으면 안 될 말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발리제 님께서는 설산에 계십니다.”

참, 이상하게도 예전 같으면 죽었다는 말이 쉽게 나왔을 텐데 그 말이 선뜻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며 시카르는 자신이 참 많이 변했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다시금 말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발리제 타히곤 님께서는 설산에 안치돼 계십니다.”

자신의 아들을 보고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던 베로니아의 눈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눈빛은 슬퍼 보이지 않았다. 그저 허망한 눈빛으로 눈물을 후두둑 쏟아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시카르도 마음이 착잡했다.


 


“나는 설산으로 가야겠다.”

“네?”

“나는 당장 내 남편이 있는 곳으로 가야겠구나.”

“하지만, 왕손 저하는 어찌하시고 설산으로 가신단 말씀이십니까.”

“키안이 평범한 가문의 자식이라면 내가 곁에 끼고 살았겠지. 하지만, 키안은 이 나라에 하나 남은 유일한 왕족이다. 내 아들이기 이전에 이 나라의 군왕이지. 하지만, 내 남편은 내가 아니면, 그 무덤을 돌봐줄 이가 없는 평범한 사람이니라. 나는 내 남편이 있는 설산에서 지낼 생각이다.”

“부마님의 시신은 왕궁에 안치시키면 되는 일입니다.”

“살아 있는 남편의 곁을 지키지 못한 아내가, 죽어 있는 남편의 곁이라도 지키고 싶은 내 마음을 알겠는가.”

베로니아의 눈빛이 너무나 슬퍼 보인 탓에 시카르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설산에서는 시신이 부패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내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 그때 내 남편과 함께 왕궁에 우리 부부의 시신을 안치해 주겠나.”

“…….”

“시타르 족인 네가, 정령사의 아들인 내 아들을 키워줬다더군?”

“그렇습니다.”

“너희 시타르 족은 정령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어서 정령사들을 아주 우습게 보고 있지. 내 아버지께서는 너희 블레이크가의 웃음거리가 되기 싫어서 정령사인 발리제가 내 남편이 되는 것을 반대했다. 그건 어렸던 너도 알고 있었겠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정령사의 아들인 우리 키안을 네가 키웠다니. 얼마나 아이러니했는지 모른다.”

“저하께서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도 이상하지 않겠지요.”

“네가 어떤 목적으로 내 아들을 키웠건,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내 아들이 너를 살리기 위해 제 발로 사지로 뛰어 들어갔다는 것이겠지.”

시카르는 그때의 일이 떠올라 또 한번 울컥했다.


“하지만, 키운 건 몇 해 되지도 않습니다. 그마저도 출정을 나가 있느라 대부분을 아내가 키웠습니다.

“나는 낳기만 했을 뿐 단 하루로 키워본 적이 없었다. 물론, 단 하루도 잊은 적은 없지만 말이다.”

“불가항력이었을 뿐입니다.”

“내 아들을 네 손으로 거두었고 네 손으로 왕위에 올렸다. 이젠, 네 손으로 대관식을 진행하라.”

국왕의 대관식에서 물론 귀족들이 왕관을 올려주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은 엄연히 공주가 있는 상황이었다.

시카르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의미이십니까?”

“너를 내 아들의 왕부로 인정하겠다는 말이다. 그리고 네 아내는 내 아들의 왕모로 인정하겠다.”

시카르는 또 한번 뭉클한 감정이 울컥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저, 저를 왕손 저하의 왕부로 인정하신다는 말씀은…….”

“너희들 손으로 내 아들의 머리에 왕관을 씌우라는 말이다.”

이 같은 일은 전례의 없던 일이었다. 시카르는 제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지도 모르고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베로니아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

그렇게 된 거였구나. 베로니아가 나와 시카르를 키안의 부모로 인정해주고 우리에게 부모 자리를 양보한 거구나.


“곧 키안의 대관식이 진행될 것이다. 각오는 단단히 돼 있겠지?”

방긋 웃으며 묻는 시카르의 말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제 모든 것은 끝났다.

모든 것이 무사히 잘 끝났음에 나는 안도하고 감사했다.

밤은 기울었고, 이제 새로운 해가 떠오를 일만 남았다.

내일이면 새로운 태양이 찬란하게 떠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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