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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화. 해가 뜨다 (1) (121/197)


121화. 해가 뜨다 (1)
2022.07.28.


그 일이 있고, 서연과 쌍둥이가 공작저를 찾았다.

시카르와 레이독스는 왕궁 일로 바빠서 얼굴도 제대로 볼 수조차 없었다.

나중에 비카에게 들은 바로는 파시움이 시카르를 껴안고 자폭을 시도했다고 한다.

내가 케이지를 만져 파시움이 강제로 소환되는 바람에 폭발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었다.

만약 그때 자폭이 일어났다면 시카르와 비카는 이 세상에 없었을지도 몰랐다. 그랬다면 아직 어린 키안은 아무 힘도 못 쓰고 죽었을 것이라 생각하니 끔찍했다.

내 선택 덕분에 시카르와 키안이 살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듀리온은 식탁에서 그 얘기를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글쎄. 그때, 마님께서 파시움의 은신처를 들이닥치자고 안 했다면 정말! 아우.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니까요.”

그때 일을 떠올리니 소름이 끼친다는 듯 몸을 파르르 떠는 듀리온을 보며 비카는 자기야말로 더 소름이 끼친다는 듯 몸을 파르르 떨었다.


“나야말로 더 소름이야. 그때, 공작 놈이 죽었으면 나도…….”

비카는 시카르를 오독오독 씹어먹듯 고기를 아그작 아그작 씹어 먹었다. 하긴 비카 입장에서는 이를 갈고도 남을 만하지.


“그나저나, 듀리온. 빗자루를 타고 오느라 힘들진 않았어요?”

듀리온은 질색이라는 듯 몸을 파르르 떨었다.


“나중에는 조금 요령이 생겨서 다리가 많이 끌리진 않았지만, 두 번은 타기 싫은 물건인 듯합니다.”

우리의 얘기를 경청하던 루이드는 눈치를 보듯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빗자루를 탔다구요? 혹시 저도 탈 수 있을까요?”

루이드를 물끄러미 보던 듀리온은 그거 좋은 생각이라는 듯 무릎을 쳤다.


“소후작 님께 빗자루를 드리지요.”

“정말이요?”

듀리온은 매우 자상한 듯 흐뭇한 미소로 화답했다.


“물론입니다. 소후작 님이 타고 다니기에는 매우 좋은 물건일 것 같군요.”

평소라면 대화에 끼며 자신도 빗자루를 타고 싶다고 했을 루시는 오늘따라 표정이 꽤 심각했다.


“저, 그런데 공작부인.”

“응?”

“정말 키안이 왕손 저하님이세요?”

난 저하님이라고 칭하는 루시의 호칭이 귀여워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냥 저하라고 하는 거야.”

“아…… 네. 공작부인. 근데 아버지 말씀으론 키안이 곧 왕이 된다고 하던데, 정말 왕……이 되는 거예요?”

이젠 쌍둥이들에게 말을 해 줘야 할 때가 온 거겠지.

나는 사실 키안이 이 나라의 왕손이고 키안에게 군주 수업을 시키기 위해 교육을 레이독스에게 맡겼다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루시는 입을 쩍 벌렸고 조금 전만 해도 신나 있던 루이드는 거의 울상을 지었다.


“그, 그럼. 저희 아버지도 키안이 왕손 저하라는 것을 알고 있었단 말이에요?”

“그래. 맞아. 그렇게 된 거야.”

쌍둥이들은 곧 시무룩한 얼굴로 저들끼리 시선을 주고받았다.


“루이드 너 이제 어떡해. 네가 키안을 제일 많이 괴롭혔잖아.”

“요즘은 잘 지내고 있었다고!”

“하지만 너 예전에 맨날 키안 괴롭혔던 거 기억 안 나?”

루시가 잔뜩 겁을 준 탓에 루이드는 울상을 하며 밥도 제대로 안 넘어가는 듯 한숨을 주구장창 내쉬고 있었다.

그동안 자신이 막 대한 아이가 왕이라니 상상도 못 했겠지. 원작에서도 그 사실을 알고 꽤 눈치를 봤었던 루이드였다.

원작에서 키안은 그런 사소한 일에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만큼 그릇이 큰 아이였으니까.

나중에 키안이 봐준다 해도 지금은 루이드를 달래주는 게 좋겠지.

내가 루이드를 달래주려 하자, 서연은 내게 윙크를 하고는 능숙하게 루이드를 달래주었다.


“국왕이 된 소공자 님께서는 그런 사소한 일에 마음을 쓰지 않으실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도련님.”

“하지만 역사를 보면 옹졸한 왕들은 신하에게 질투하고 시샘하고 괴롭히고 잘 사는 귀족을 질투하고 모사를 꾸며서 그 재산을 몰수하려 든다고 하던걸요.”

“장담하는데 소공자 님께서는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에요.”

“유모 말 믿어도 되겠죠?”

서연의 말은 온전히 못 미더웠는지 루이드는 날 보며 물었고, 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럼. 당연히 믿어도 되지. 그리고 내가 장담하는데 키안은 그런 일로 결코 너희를 나무라지 않을 거야.”

내가 그런 말을 해 주니 이제야 좀 안심이 된다는 얼굴로 루이드는 한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아싸! 그럼 이제 그 걱정은 안 하겠어요!”

“그래. 그건 하등 할 필요가 없는 걱정이었어.”

루이드의 걱정을 덜어주었다 싶었다 했더니 이제는 루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어왔다.


“그런데 공작부인!”

“응?”

“그럼 앞으로 키안을 뭐라고 불러야 해요? 국왕 전하라고 불러야 해요?”

친구인 줄 알았다가 갑자기 한 나라의 군왕이 되었으니 뭐라고 불러야 할지 꽤나 당황스럽겠지. 하지만,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응. 대관식이 끝나고 나면 앞으로 이 나라의 군왕으로 모셔야 할 것이야.”

쌍둥이들은 곧장 알겠다고 대답하진 못했다. 아이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난감한 표정을 조금 지었다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 실감이 안 나지만…… 알겠어요. 처음엔 조금 어색하긴 하겠지만 앞으론 그렇게 부를게요.”

“아마 대관식을 치르고 나면 실감이 나겠지.”

루시와 루이드는 다시 한숨을 내쉬며 오물오물거리며 식사를 시작했다. 표정을 보니 영 밥맛이 없다는 얼굴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이제 전하라고 불러야겠구나. 이젠 더는 공작저에서 키안을 볼 수 없을 테지.

그런 생각이 들자 나도 입맛이 뚝 떨어졌다. 옆에서 나를 물끄러미 보던 서연은 그런 내가 안쓰러웠는지 걱정스런 말투로 물었다.


“이제 키안과 완전히 떨어져 지내야 해서 그러시죠?”

실제로 그 일이 있고 나서 궁으로 떠난 키안의 얼굴을 볼 수도 없었다.

언젠간 이날이 올 줄 알고 있었지만, 막상 닥치고 나니 마음 한편이 너무 쓸쓸했다. 나는 쓸쓸히 미소 지었다.


“네. 마음이 좋지만은 않군요. 오늘은 먼저 방에 올라가 보도록 할게요. 이제 키안의 짐을 좀 챙겨야 할 것 같아서요.”

서연은 내가 키안과의 마지막을 잘 준비할 수 있게 도와주려는 듯 조용히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키안의 방에는 우리의 추억들이 아직 고스란히 있었다. 시카르가 만들어준 드림캐쳐와 우리가 함께 만들었던 색종이 접기들.

처음 이 집에 데려온 후 밤마다 키안을 재워주었던 기억들.

무서운 동화를 들려줄 때면 잔뜩 겁을 먹던 귀여운 키안의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쓰렸지만, 그때마다 이젠 그만 보내줘야 할 때라는 것을 더욱 상기했다.

하물며 내 마음도 이럴진대, 베로니아의 마음은 오죽할까.

베로니아는 지금쯤 설산에서 발리제를 만났겠지.

***

베로니아는 연회라면 질색이었다.

그녀는 왕궁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중 가장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은 지긋지긋한 정치 싸움이었다.

연회도 정치판의 연장이었기에 베로니아는 연회만 열리면 도망가기가 일쑤였다.

그녀는 발목까지 내려오는 드레스를 입고도 발코니를 잘도 뛰어내렸다.

언제나처럼 발코니를 뛰어내리려는 그때, 누군가 베로니아의 옷깃을 붙잡았다.


“웬 놈이냐!”

본능처럼 베로니아는 머리핀을 빼서 상대의 목을 겨냥했다.

베로니아를 붙잡은 사람은 다름 아닌 얼마 전 작고한 근위대장의 아들 발리제였다.


“네 놈을 알고 있다. 얼마 전 작고한 근위대장의 아들이라지? 다들 차기 근위대장으로 너를 지목하더군.”

발리제는 공주의 위협에도 전혀 기죽지 않고 침착하게 대꾸했다.


“공주님께서 이렇게 도망가시면 공주님의 시녀는 또 혼이 나게 됩니다.”

“또, 혼이 난다니? 한 번도 그런 일이 없는데 누가 공주의 시녀를 혼낸다는 말이야?!”

“공주님의 시녀가 말을 하지 않았을 뿐 지금껏 왕후 전하께 혼이 났다고 합니다.”

“누가 그런 허튼소리를 해?!”

“저 소공자께서요.”

베로니아는 발리제가 가리킨 곳을 쳐다보았다. 자신과 눈이 마주쳤음에도 피하지 않고 당돌하게 쳐다보고 있는 꼬마 아이는 블레이크가의 소공자 시카르 블레이크였다.

이제 다섯 살쯤 된 시카르는 자신의 말이 맞다는 듯 두 눈을 치켜뜨며 고집스럽게 베로니아를 쳐다보고 있었다.


‘맹랑한 놈.’

“블레이크가의 소공자가 사람 속을 꿰뚫어 본다더니, 저 녀석이 그 소공자 놈이었군.”

 

 


“착한 아이입니다. 속이 깊은 아이라 사람들의 속을 잘 꿰뚫어 보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내가 내 시녀의 안위까지 걱정해야 하나?”

“공주님의 그릇된 행동으로 인해 공주님의 시녀가 그 죄를 대신 받는 것을 방관한다면, 그것은 사람에게 취할 도리로 여겨지진 않습니다.”

“감히 이 나라의 후계 1순위인 나를 가르치려 드는 것인가?”

“공주님께서 군왕의 도리를 모른다면 신하 된 도리로 알려드리는 게 마땅할 것입니다.”

누구도 자신에게 이런 말은 한 적이 없었다. 베로니아는 이 당돌한 정령사가 왠지 싫지가 않았다.

***

잠에서 깨어난 베로니아는 자신의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랜만에 꾸었던 발리제의 꿈.

그 오래된 꿈속에는 어렸던 블레이크 공작의 모습도 있었다.


‘그때 공작은 참 맹랑했었지.’

베로니아는 낮은 한숨을 쉬며 마차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온통 하얀 백색의 산은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외롭게 만들었다.

설산에 도착한 베로니아는 마차에서 내려 발리제가 있는 곳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다. 베로니아를 따라 짐꾼들이 뒤를 따랐다.

짐꾼들 중에는 제르미와 로엔도 있었다. 베로니아가 괜찮다며 거절했지만, 시카르가 그들에게 막대한 자금을 지급하며 베로니아를 잘 안내해달라고 일렀기에 이들은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무엇보다 시카르가 마련한 피신처를 알고 있었기에 베로니아를 안내해줄 수밖에 없었다.

시카르는 베로니아에게 발리제의 시신이 있는 곳을 알려주는 대신 그가 마련한 피신처에서 지낼 것을 당부했기 때문이었다.

설산으로 들어간 베로니아는 하얀 눈으로 가득 덮힌 백색의 산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이의 시신은 어디 있지?”

“피신처 바로 옆에 있습니다. 따라오시지요.”

제르미는 망설임 없이 베로니아에게 발리제의 시신이 있는 곳을 안내했다.

시신과 피신처는 눈 덮인 바위 안에 있었다.

시카르는 만일에 사태를 대비해 설산에 키안의 피신처를 마련했다. 피신처를 물색 중이던 시카르의 눈에 커다란 바위가 포착되었고 그는 인부들을 시켜 바위 안에 각각 피신처와 그 옆에는 발리제의 시신을 안치했다.

겉으로 볼 때는 평범하게 눈 덮인 바위와도 같았기에 피신처로 삼기에 매우 좋았다.

피신처에는 창고도 함께 만들었는데, 보존마법이 걸려 있어서 식재료들도 모두 싱싱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었다.


“공작이 피신처 또한 철두철미하게 준비했었구나.”

베로니아가 감회가 새롭다는 듯 미소를 짓는 동안 제르미는 안치실 문을 매만졌다.


“그럼 이제, 발리제 님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제르미가 눈 덮인 바위 한쪽에 손을 대며 뭐라고 쓰자, 바위가 열렸다.

문이 열리자 바위 안쪽, 관 속에서 두 눈을 감고 잠들어 있는 발리제의 모습이 드러났다.

제르미와 로엔을 비롯한 짐꾼들은 모두 베로니아를 위해 자리를 비켜주었다.

십 년 만에 보는 남편이었다.

꿈에서나 만날 수 있을까. 매일 몸서리 치게 그리워하던 남편이었다.

여보 하고 부르면, 번쩍 눈을 뜨며 일어나 잘 잤냐고 물어줄 것만 같은 남편이 오늘따라 많이 피곤해서 늦잠을 자는 듯 그저 잠들어 있는 것만 같았다.

아야, 하고 외치면, 당장이라도 어디가 아프냐고 수선을 떨 것만 같은 사람이 세상일은 모르겠다는 듯 잠이 들어 있었다.

베로니아는 떨리는 손으로 발리제의 뺨을 쓰다듬었다. 너무나 차갑기만 한 감촉이, 이제 그는 산 사람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그제야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베로니아는 잠든 발리제의 품에 안겨 목놓아 울었다.

지난 십 년간 흘리지 못한 눈물을 한 번에 쏟아내고 있었다.

밖에 서 있는 제르미와 로엔의 귀에도 베로니아의 통곡 소리가 울렸다.

로엔도 감정이 복받쳐와 눈물을 흘리며 제르미의 품에 안기었다. 제르미는 툭툭 떨어지는 눈물을 닦지도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공주의 구슬픈 통곡의 노래가 설산에 메아리를 치며 가득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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