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해가 뜨다 (2)
(122/197)
122화. 해가 뜨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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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화. 해가 뜨다 (2)
2022.08.01.
“언제까지 이 방에서 잘 생각이지?”
눈을 떠보니 시카르가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요즘 나는 거의 매일 비어 있는 키안의 방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처음에는 키안의 짐을 챙기다 이 방에서 함께 잠든 것이 떠올라 잠에 들었고, 그다음에는 앞으로 키안을 자주 못 볼 걸 생각하니 마음이 허전하다 보니 계속 이 방에서 잠을 청하고 있었다.
시카르가 그만 좀 하라고 했지만, 그게 마음대로 돼야 말이지.
반드시 엄마를 찾아준다고 했는데 도로 엄마와 멀어지게 한 건 아닌지도 걱정이었고, 무엇보다 일주일이 넘도록 키안의 얼굴 한 번 못 보고 있어서 더욱 마음이 울적했다.
“누가 보면 실연당한 줄 알겠군.”
“아니, 이건 실연당한 것보다 더 슬픈 일이야.”
이곳에 온 뒤로 늘 붙어 있던 자식과 하루아침에 떨어졌으니 실연과는 비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영영 떨어져 지내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상심할 거 없어.”
“하지만, 궁에 간 뒤로 아직 얼굴 한 번 못 보고 있는걸…….”
시카르는 나를 유심히 쳐다보더니 알겠다는 듯 피식 웃었다.
“왕에게 서운한 모양이군.”
서운하다기보다, 키안이 날 찾지는 않는지 궁금한 것은 사실이었다.
“키안이 혹시라도 내가 잘 지내는지 묻거나 그러진 않아……?”
시카르는 마치 아이를 다루듯 내 볼을 양쪽으로 붙잡았다.
“유라 블레이크. 설마 키안이 너를 잊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나는 내 볼을 붙잡고 있는 시카르의 마수 같은 손길에서 벗어나며 뿌루퉁한 얼굴로 말했다.
“누가 그렇대? 그래도 시간 나면 나를 보고 싶어 해줬으면 해서 물은 것뿐이야.”
“그런 면에서는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군. 키안에게 널 하루라도 빨리 보고 싶으면 어떻게든 모든 일을 빨리 처리해야 할 것이라고 일렀거든. 지금 키안이 이제 막 왕궁에 들어간 탓에 왕궁 사람들부터 왕궁의 내밀한 모든 일을 익히게 하느라 바빠서 그런 것이니 서운해 말도록.”
“나를 보려면 일을 더 빨리 익혀야 한다고 해서 지금 일을 열심히 하느라 나를 못 보는 거라고?”
“그래. 이제 마음이 좀 풀렸나?”
풀리다마다. 진작 그 얘기부터 해줄 것이지.
나는 모든 것이 한 방에 해결됐다는 듯 무엇보다 밝게 웃었고, 시카르 또한 피식하고 웃었다.
“그리고 대관식은 내일 바로 진행하기로 했으니, 오늘은 왕관을 씌우는 연습을 좀 하도록 하지.”
“잠깐. 뭐라고? 대관식이 언제라고?”
“내일.”
“아, 그러니까 대관식이 바로 내일인데 그걸 오늘 나한테 얘기해서 오늘 준비하라고 한다는 말이지.”
“그렇지.”
세상에 이렇게 친절한 사람이 또 있을까. 물론 이건 반어법이다.
나는 화가 조금 끓어오르는 것을 주먹을 쥐고 꾸욱 참았다.
“시카르. 네가 요즘 바쁜 건 알겠는데, 이건 조금 더 일찍 말을 해줘야 하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겨우 하루 남겨 놓고…….”
“그거야, 겨우 하루 남겨 놓고 대관식 날짜가 잡혔으니까.”
현재 키안이 어린 탓에 그의 왕부인 시카르에게 모든 권한이 넘어가 있는 상태였다.
그렇다면 대관식도 분명히 시카르가 일정을 잡았을 텐데 왜 남이 잡은 것처럼 말하는 거지?
“그 대관식 날짜를 누가 잡았는데?”
시카르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네 아드님이 잡으셨지. 한시라도 네가 빨리 보고 싶다고 내일 당장 잡으셨다.”
그 말은 날이 선 내 마음을 한순간에 눈 녹듯이 녹였다.
“키안이 정말 내가 보고 싶다고 대관식 날짜를 앞당긴 거야?”
“그래.”
그런 일이 있고, 키안이 괜찮은지 어떤지 확인도 못 하고 있던 내게는 정말 감동일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내가 하루라도 빨리 보고 싶어서 대관식을 잡았다니. 주책맞게 또 눈물이 글썽거렸고 시카르는 내 허락도 없이 나를 꼭 껴안았다.
“감동해서 우는 거라면 아직 이른데.”
“아직 이르다니?”
“키안이 내일 네가 대관식에서 입을 옷을 직접 보내왔거든.”
“내일 대관식에서 입을 옷?”
그 옷은 내 입을 떡 벌어지게 만들었다.
내 질문이 끝나자마자 가져온 드레스는 신화 속 여신들이나 입을 만큼 화려했다.
드레스 위에 거쳐야 할 망토는 카펫처럼 걸어 다닐 때마다 바닥을 쓸고 다닐 만큼 길었고 드레스 소매 끝자락은 드레스와 연결돼 있었다.
이런 옷이라면 정말 그림에서나 봤던 옷들이었다.
“내일 내가 이 옷을 입는다고?”
“그래. 평생 가야 대관식에서나 입을 수 입는 옷이지. 돈이 있다고 해서 아무나 입을 수 있는 옷이 아니란 거지. 아. 키안이 결혼할 때나 한 번 더 볼 수 있겠군.”
정말 웃기게도 그 옷을 보니, 내가 이제 왕의 왕모인 것이 어느 정도 실감이 나는 것 같았다. 물론 내일이면 더 실감 나겠지만.
드레스를 보고 있으니 벌써부터 광장공포증이 오는 듯 온몸이 후들후들 떨려왔다. 시카르는 그런 내 손을 꼭 잡아 주었다.
“떨지 마. 네가 이 나라 최고의 권력자인 왕의 왕모니 그 누구에게도 떨 필요 없다. 앞으로 고개 빳빳이 들고 모두를 내려다보도록. 예전에 내가 알려준 표정 기억하고 있겠지?”
시카르는 아주 오랜만에 나를 보며 턱 끝을 들어 올렸다. 도도하다 못해 사납고 악녀 같은 표정.
그땐 저 표정이 그렇게 어색할 수가 없었는데 지금은 그리 어색하지도 않았다.
나는 시카르를 따라 턱 끝을 들어 올리고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어때? 나 잘하고 있어?”
“너무 순해 보이는군. 그런 컨셉은 안 되겠어. 차라리 자비로 나가지.”
내가 생각해도 차라리 그게 나을 것 같았다. 그건 연습하고 말 것도 없었다.
“시카르 너도 자비로운 표정을 좀 지어보는 건 어때?”
“앞으로 키안을 도와 정사를 돌봐야 하는데 그럴 순 없지. 귀족들이 군주를 두려워하지 않으면 왕의 권위가 바닥으로 떨어지니, 키안에게 군주의 지엄함을 가르쳐야 하거든.”
그런 거라면 누구보다 시카르가 잘 해낼 것이다.
“드디어 내일이면 키안을 볼 수 있다니. 믿기지가 않아.”
흐뭇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시카르의 얼굴이 갑자기 굳어졌다. 그는 자못 심각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간혹 네가 무언가를 생각하며 미소를 짓는 것을 봤었지. 근데, 그게 내가 아니고 키안이었던 모양이군.”
지금 내 기억을 본 얘기를 하는 건가.
“내 기억 얘기야?”
“그래. 나를 떠올리는 건지 알고 못내 흐뭇한 적이 있었는데 이제보니 그게 아니었군. 내게 친절해진다고 하지 않았나?”
“그건 친절과 상관없는 겁니다. 시카르 씨.”
“그럼 그건 무엇과 상관이 있는 거지?”
그건 사랑과 매우 관련이 깊은 문제지.
물론 시카르를 떠올리며 웃었던 적도 있었지만, 나는 왠지 그 말이 입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아직도 나에게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있는 이 남자에게 그런 말을 해 주고 싶지도 않았다.
“왜 대답을 않는 거지?”
“친절한 건 잘해주는 거고, 미소 짓는 건 기분이 좋아지는 거라서 전혀 다른 문제니까. 네가 스스로 알기 바랐거든.”
시카르가 ‘그렇군.’이라며 생각을 곱씹는 사이, 안드레아가 기분이 좋은 듯 활짝 웃으며 들어왔다.
“공작님. 마님! 터커가 깨어났어요!”
맞아. 그날 터커가 쓰러져서 왔었지. 정신이 없어서 생각하지도 못했구나.
시카르도 흡족한 듯 환하게 웃었다.
“터커가 깨어났다니. 내가 직접 가봐야겠군.”
시카르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터커가 어색한 미소로 뒷머리를 긁적이며 방으로 들어왔다.
“나오실 거 없어요. 제가 먼저 왔거든요.”
“터커! 괜찮아?! 그날 의식 없이 실려 와서 정말 놀랐어!”
나와는 달리 시카르는 완전히 유령이라도 본듯한 얼굴로 터커를 보고 있었다.
“너 이놈. 살아 있었군. 어쩐지 네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보낸 수색대가 늘 허탕만 친다 했더니. 멀쩡히 살아서 내 집에 있어서 그런 거였군?”
이게 무슨 말이지?
“그게 무슨 말이죠? 공작님?”
내가 물어보자 시카르와 터커는 그날 있었던 일들을 낱낱이 말해주었다.
시카르를 통해 들은 터커의 얘기는 놀라웠다. 겨우 마차 하나 선물했을 뿐인데 터커는 시카르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고 했다.
나를 포함해 같이 듣고 있던 안드레아는 놀라운 듯 입을 쩍 벌렸다.
“터커가 공작님을 위해서 목숨까지 바쳤다니! 장하구나. 장해!”
안드레아는 감동한 듯 터커의 팔을 몇 번이고 붙잡았고 터커는 머쓱하게 웃을 뿐이었다.
시카르도 터커가 마음에 드는지 피식거리며 웃었다.
“그래. 어떻게 살아 나왔지?”
“그러게. 나도 궁금해. 거긴 물에 떠내려가면 살아나올 수 없는 곳이라며?”
터커는 죽다 살아난 사람 같지 않게 너무나 해맑게 웃었다.
“공작부인 덕분에 살았어요.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내 덕분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터커?”
“마님이 제게 몰래 주신 약 때문에 살았거든요.”
“약이라…….”
“그때 제게 챙겨주신 약들이요.”
내가 잘 기억을 못 하자 시카르가 대신 내 기억을 확인시켜주었다.
“마정수를 말하는 것이지. 바빠서 못했지만 안 그래도 그걸 물으려고 했었지. 대체 그건 왜 챙겨준 거지?”
“보석은 공작님께서 선물한 거니 안 된다고 하셨죠? 그래서 마정수라도 선물해준 거예요. 안드레아도 선물을 챙겨주는 마당에 공작저의 마님인 내가 빈손으로 보낼 수는 없잖아요.”
“마정수는 구하기가 쉽지가 않다. 그 희소성 때문에 가치가 높은 것이지. 정말 필요할 때 없으면 골치니 앞으론 차라리 보석을 줘.”
“하지만 나한테는 보석보다 마정수가 더 많았어요.”
“그건 모두 내가 부인을 위해 어렵게 구한 거라는 생각은 안 드나보군?”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긴 했지만 크게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조금 서운해 보이는 정도랄까.
“앞으론 대신 보석을 주도록 하죠.”
“절대 안 주겠다고는 안 하는군.”
“그럼요. 난 베풀고 살아야죠. 베풀고 살아야 조금이라도 복을 받으니까.”
시카르는 내게서는 더는 원하는 대답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은 듯 시선을 터커에게로 돌렸다.
“근데 그게 무슨 효과가 있었던 거지?”
터커는 놀라운 경험을 했다는 듯 상당히 들뜬 표정이었다.
“이제 난 죽겠다 싶었을 때 마님께서 주신 마정수가 생각났어요. 선물로 챙겨주신 비싼 건데 죽을 때 죽더라도 마님이 주신 선물은 먹고 죽는 게 도리 같아서 그걸 마셨더니.”
“마셨더니?”
터커는 엄청난 모험담을 얘기하듯 발뒤꿈치를 들어 올렸다.
“부력효과가 있었어요. 갑자기 몸이 물 위로 붕 떳거든요.”
시카르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들이 마력이 부족할 때 쓰는 보조마력이니, 터커가 마법을 부릴 줄은 몰라도 마력으로 물에 뜨는 것 정도는 도움을 받을 수 있었던 모양이군.”
살림에 보태쓰라고 준 마정수가 생명을 구했다니 내가 다 뿌듯했다.
“터커! 정말 잘했어! 근데 그건 내 덕분이 아니라, 네 고운 심정 덕분인 것 같은데?”
“모두 마님 덕분이시죠. 전 정말 마님의 은혜를 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
시카르는 고민스러운 얼굴로 팔짱을 끼고 있다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의 오지랖 넓은 이타심이 여러 사람을 살리는군. 어쩔 수 없겠군. 앞으로는 적당히 퍼주는 건 말리지 않도록 하지.”
한 입으로 두말하진 않으니, 약속을 되물을 필요는 없었다. 나는 새침하게 시카르를 바라보았다.
“감사하군요.”
이제 내가 보석을 몽땅 다 써도 아무 말도 안 할 것 같았다. 시카르는 터커가 몸이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조금 더 공작저에 머물라고 이르며 매우 큰 보상을 내릴 테니 기대해도 좋다고 했다.
터커는 딱히 기대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기대하고 있는 것은 되레 나였다.
시카르가 큰 보상을 내린다니. 뭘 내릴지 정말 궁금해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