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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화. 해가 뜨다 (3) (123/197)


123화. 해가 뜨다 (3)
2022.08.04.


어젯밤 늦게까지 대관식을 위한 연습을 해두었지만, 막상 대관식 날 아침이 되니 긴장이 밀려왔다.


“긴장하지마.”

“나도 긴장 안 하고 싶은데……. 후우. 대관식엔 사람도 많겠지?”

“오늘은 약 먹지 말고 그냥 가도록 해.”

“아, 안 돼. 알잖아. 내가 광장공포증이…….”

“네가 파시움의 케이지를 박살 내기 위해 은신처까지 갔던 때를 생각해봐. 그때 용기의 반만 있어도 사람들 앞에서 떨지 않을 거니까.”

“그땐 반드시 키안을 지켜야 한다는 의지가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 그런 동기 같은 단순한 이유가 아니었어. 그건 모성애였지. 네게 모성애가 생긴 이상, 넌 그 누구보다 강해. 키안을 키우며 모성애가 생긴 너는 예전과 많이 달라졌으니까.”

“그건…….”

그러고 보니, 시카르도 나도. 키안을 키우며 정말 많이 변해 있었다. 우린 둘 다 목숨을 바쳐 키안을 구해내려 했으니까.


“내가 정말 잘할 수 있을까?”

“물론이지. 할 수 있어. 너에겐 잘해야 할 이유가 있고 난 그런 너를 계속 응원할 테니까.”

내가 정말 약을 먹지 않고 잘 해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확신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시카르의 말대로 내가 지켜야 할 키안이 있고, 그런 나를 믿어주는 시카르가 있는 한. 내가 잘 해내야 할 동기는 충분한 것이었다.

시카르는 준비됐냐는 듯 나를 쳐다보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차에 올랐다.

마차에 오른 후 내가 후- 하고, 심호흡을 하자 시카르는 내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오해하지마. 네 기억을 보려고 잡는 게 아니라 내 손 잡고 의지하라고 잡는 거니까.”

나도 알고 있다고. 어차피 계속 붙어 있느라 볼 기억도 없는데 새삼 그걸로 신경 쓸 것도 아니었다.


“근데, 너.”

“응?”

“내가 보고 싶다고 울었더군.”

아……. 진짜. 기억 안 본다고 해놓고. 그것도 이제 봐서 보고 뒷북을 치는구나.

시카르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내 단순함을 탓해야지.


“기억 안 본다며?”

“보려고 본 건 아닌데 뭔가 스쳐 지나가길래. 살짝 열어본 거지.”

“그 말이 그 말이지.”

“이건 몸에 밴 거라 나도 어쩔 수 없는 것이지. 그런데, 넌 정말 못 말릴 만큼 나를 너무 좋아하는군. 그렇게 울면서 보고 싶다고 찾던 나를 다시 보고 있으니, 이제 좀 괜찮나?”

이럴 줄 알았지. 이럴 줄 뻔히 알고도 보고 싶다고 울었던 내가 죄인이로다.


“죽을 맛이야.”

죽을 맛이라고 한 내 말에도 시카르는 기분이 좋은 듯 미소를 지었다.


“죽을 정도로 좋다니 나쁘지 않군.”

나는 못 들은 척 두 눈을 감았다. 그러자, 시카르가 나를 자신의 가슴 안으로 끌어왔다.


“물론 나도 보고 싶었다.”

그 말이 듣고 싶었던 모양인지 이상하리만큼 가슴이 두근거렸다.

사실 정말 많이 보고 싶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런 말은 나오지 않았다.

안겨 있는 품이 너무 따뜻해서 나는 그냥 조용히 눈을 감았다.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품이 있다면 바로 이 품이 아닐까 싶을 만큼 포근했다.

***

키안을 만난 곳은 왕궁의 알현실이었다.

왕의 제복을 입고 있는 키안은 아직 어려도 멋지고 근사했고 시카르의 말처럼 왕의 위엄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왕좌에 앉아 있던 키안은 우리가 들어가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뛰쳐나왔다. 키안은 이전처럼 곧장 달려와 내게 안겼다.


“어머니! 보고 싶었어요!”

“전하! 무탈하시지요?!”

“전하라뇨. 어머니. 공주님께서 어머니를 제 왕모로 인정하셨다고 하셨는데 전하라니요.”

어차피 원래 그렇게 불렀어야 했던 일이었다. 우리가 임금의 왕부와 왕모가 되었다 해도, 우린 왕족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 호칭이 마땅했다.


“전하께서 보내주신 옷을 입고 왔어요. 너무 고마워요. 우리 전하.”

키안은 마냥 좋다는 듯 나를 보며 헤헤 실실 웃었다.


“어머니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니 제가 더 기쁜걸요.”

“왕궁의 음식은 입에 좀 맞으십니까?”

“아니요. 하나도 입에 안 맞아요. 저는 공작저 주방장이 해 준 음식이 더 입에 맞아요.”

“그럼 주방장에게 일러 전하께서 좋아할 만한 음식을 만들어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아니요. 전 어머니께서 자주 오시는 게 더 좋아요.”

시카르의 말로는 키안에게서 성숙한 국왕의 모습이 보인다고 했는데 나를 만나서 그런지 키안은 내가 알던 그 키안과 다름이 없었다.

키안이 너무 성숙하게 변해서 낯설게 느껴지는 건 아닐까 걱정했던 게 무색해질 만큼 그대로여서 한편으로 다행이었다. 적어도 내게는 어린 아들이고 싶은 모습을 보였으니까.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으니 귀족들에게 무시를 당할 수도 있었을 테지만, 감히 블레이크 가문이 보필하는 왕을 아무리 어리다 한들 그 누구도 무시할 수가 없었다.

베로니아도 그것을 알고 마음 편히 떠났을 테지.


“참, 어머니. 아버지가 그러는데 제 물건을 챙겨오셨다고요?”

“네. 전하의 방에서 전하의 물건들을…….”

잠시만. 지금 키안이 뭐라고 했지? 아버지?


“전하, 방금 뭐라고……?”

키안은 왜 그러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네? 어머니?”

“방금 아버지라고 하셨던 거 같아서요…….”

그러고 보니 이런 말을 들었는데도 시카르의 반응이 너무나 평온하기만 했다.

나는 의아한 얼굴로 시카르를 쳐다보았다.


“공작님? 방금 전하께서 아버지라고 부르신 분이……?”

시카르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나를 보며 대답했다.


“접니다.”

아니, 누가 그걸 몰라서 묻냐고.


“그러니까, 저 언제부터 전하께서 공작님을 아버님이라고……?”

대수롭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는 건 키안도 마찬가지였다.


“제가 집을 떠나오게 된 그날부터요.”

그럼 그날부터 쭉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는 건가? 그래서 이렇게 자연스럽게 키안은 시카르를 아버지라고 부르고, 시카르도 대수롭지 않다는 듯 듣고 있는 건가.

키안이 시카르를 아버지라고 부르다니.

헌데 여기서 어리둥절해하는 사람이 나뿐이라는 게 더욱 놀라웠다.

그러니까 두 사람 왜 이렇게 자연스럽게 부자 행세를 하냔 말이다!

아니, 행세를 하는 게 아니라 진짜 부자가 돼 있었다. 그것도 쉴 틈 없이 티격태격거리는 부자.


“전하. 오늘도 반찬 잘못 드신 겁니까? 얼굴이 좀 부으신 것 같습니다만.”

“아버지. 오늘도 늦잠 주무신 거 아닙니까? 제가 아침 일찍 오시라 했는데 왜 이렇게 늦으셨습니까? 또 어머니 핑계 대려고 하시죠?”

“제가 어제도 말씀드렸다시피 핑계가 아닙니다. 부인께서 밤마다 전하가 쓰던 빈방에서 잠을 자는 바람에 제가 편히 잠을 못 자다 보니 늦잠을 잘 수밖에요. 안 그렇습니까?”

내가 키안의 방에서 자는 것과 시카르가 무슨 상관이란 말이지?


“저, 공작님? 그게 무슨 말씀이죠? 왜 저 때문에 잠을 못 주무신 거죠?”

키안은 나를 보며 장난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버지가 어머니 걱정돼서 어머니 주무실 때 옆을 지키셨거든요. 어머님이 자다가 경기라도 일으킬까 봐 걱정된다고요. 그게 다. 아버지께서 어머니를 너무 사랑하셔서 그런 거죠.”

옆에서 듣고 있던 시카르는 민망했던 모양인지 얼굴이 붉어져서는 키안을 보며 두 눈을 부라렸다.


“전하. 대관식 준비를 서두르시지요. 얼굴 붓기도 빼시고요.”

키안은 어리광을 부리듯 한숨을 쉬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얼굴 붓기를 꼭 빼야 합니까?”

시카르는 키안과 이런 말싸움을 종종 한 모양인지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부인께 물어보시지요. 뭐라고 하시는지.”

시카르는 나를 보며 자신의 편이 되어 달라는 눈빛을 보냈고 키안은 내가 뭐라고 할지 긴장된다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두 남자의 묘한 신경전. 그 중심에 서 있는 기분이…… 많이 묘했다.


 
키안이 나를 좋아하지만 내게는 어떤 선이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시카르를 대하는 키안의 모습은 정말 친아버지를 대하는 모습과도 같았다.

이상하게 그런 모습이 조금은 서운하게 느껴졌다. 내가 많이 어려웠던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것과는 별개로 얼굴 붓기 문제는 시카르의 말대로 하는 게 좋겠지.


“얼굴 붓기는 빼는 게 좋겠어요. 공작님의 말처럼 귀족들이 볼 때 마냥 아이로만 보지 않아야 할 테니까요.”

기대했던 키안은 실망한 듯 눈을 내리깔았다.


“네…… 어머니…….”

시카르는 흐뭇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가 키안을 보며 자신이 이겼다는 듯 피식 웃었다.

***

키안의 얼굴 붓기는 성공적으로 빠졌고, 턱선이 훨씬 더 매끄러워졌다.

시카르는 매우 흡족해했지만, 키안은 별 표정 없이 거울을 봤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생긋 미소를 지었다.


“너무 좋아요.”

“네? 전하?”

“어머니가 있어서 너무 좋다고요.”

나를 보며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헤벌쭉 웃는 모습을 보니, 아까 서운해하던 감정은 저 멀리 날아가고 없었다.


“저야말로 전하를 보니 너무 좋은걸요.”

“그럼 자주 오시면 안 돼요?”

키안은 응석을 부리듯 나를 보며 구슬픈 표정을 지었다.

귀여워라. 그러고 보니 내게는 마냥 아이같은 어리광이 아닌, 이렇게 귀여운 응석을 부렸구나.


“국정은 어쩌시고요? 전하께 왕위를 양보하신 공주 저하의 판단이 그르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려면 지금부터 국정을 잘 돌보셔야 합니다. 역사에 공주 저하가 불명예스럽게 기록되길 바라는 건 아니시겠죠?”

키안 보다 더 어린 나이에 정치 싸움에 들어가 공작저를 이끌어간 시카르의 말이라 토를 달 수가 없었다.

시카르는 그를 보좌하는 사람 하나 없이 혼자서 정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니까.

주인공보다 더 대단한 악역이었으니 이상하지 않긴 하지.

키안은 도움을 구하듯 나를 쳐다보았지만, 시카르의 말이 맞았기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전하께서 혼자서도 국정을 잘 이끌고 모든 귀족에게 큰소리를 칠 정도가 되면, 그땐 제가 전하를 뵈러 자주 오겠습니다.”

키안은 한숨을 내쉬더니 문득 무언가가 떠오른 듯 해맑은 미소로 말했다.


“차라리 그러지 말고 어머니께서 궁으로 들어오시는 건 어때요?”

우리가 궁으로 들어온다고? 우린 왕족도 아닌데?

그렇게 생각한 건 시카르도 마찬가지였던 듯했다.


“지금껏 그런 전례는 없었습니다.”

“그 전례를 제가 만들면 되잖아요. 공주 저하께서도 부모님을 전례에 없는 왕부와 왕모로 인정해주셨잖아요.”

“그와는 다른 문제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왕실과 국정을 살피는데 몰두하지 않고 키워준 부모를 왕실에 들이는데 몰두한다면, 민심은 흉흉해지고 귀족들에겐 책잡힐 일만 만들어주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나도 뭐라고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안쓰럽게도 키안은 맥이 탁 풀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시카르가 조금은 쿨럭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전하께서 장성하실 때까지만 저희가 궁에 머문다는 명분만 단다면, 더 안전한 정사를 볼 수 있겠죠. 대신 공주 저하의 윤허가 필요할 테니, 저하를 찾아뵙고 말씀을 드려볼 테니 한번 기다려 보십시오. 너무 기대는 마시고.”

“진짜죠? 약속했어요. 아버지?”

시카르는 그런 키안이 모습이 귀엽다고 느꼈는지 피식 웃었다가 다시 엄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네. 약속드리지요.”

키안과 함께 궁에서 지내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궁이란 곳이 궁금하다기 보단 키안을 자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내겐 너무나 기쁜 일이었다.

그때, 키안의 방문이 활짝 열리며 레이독스가 들어왔다.


“대관식 준비가 모두 끝났습니다. 전하.”

드디어, 새로운 해가 뜨는 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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