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푸른 해 (1)
(124/197)
124화. 푸른 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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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화. 푸른 해 (1)
2022.08.08.
“괜찮아. 심호흡해. 그럼 좀 진정이 될 거야.”
우리는 대관식이 열리는 홀 안쪽에 있는 벨벳 커튼 뒤에 서 있었다.
나더러 긴장하지 말라던 시카르는 되레 더 긴장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시카르는 내가 기절이라도 할까 봐 노심초사였다.
“네가 키운 아들은 왕이고 네 남편은 레카도르 최고의 가문 블레이크의 공작이야. 그러니까 긴장할 거 하나도 없어. 긴장을 해도 저들이 긴장해야지. 안 그래?”
“아직은 괜찮아.”
“근데 왜 이렇게 떨어?”
“키안이 정말 왕이 되는 순간이라 떨리긴 하지만, 심장이 쿵쿵 뛰거나 현기증이 일어날 정도는 아니야.”
시카르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밝게 웃었다.
“기특해.”
“머리 헝클어져.”
“아. 그렇겠군.”
시카르는 메이리를 불러 내 머리를 손질케 했고 메이리는 재빨리 내 머리를 어루만져 주었다.
우리는 뻣뻣하게 서서 레이독스의 호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 여기서 정정. 뻣뻣하게 서 있는 건 나와 메이리였다.
시카르는 내가 놀라서 기절하진 않을까 봐 온 신경이 거기에 가 있는 것 같았다.
그럴 거면서 약은 왜 먹지 말라고 했나 몰라.
이윽고, 레이독스가 커튼 뒤로 얼굴을 내밀며 미소지었다.
“이제 나오십시오.”
“어떡해. 우리 나오래.”
레이독스가 이름을 부르자마자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괜찮다더니 역시 괜찮지 않았던 모양이군. 있어 봐. 약 줄 테니까.”
시카르는 메이리를 시켜 내게 물과 약을 갖다 주었고 나는 얼른 그 약을 삼켰다.
“좀 괜찮아진 것 같아?”
내가 심호흡을 천천히 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시카르는 낮은 미소를 지었다.
“어른스러워진 키안을 보면 긴장한 것도 까먹게 될걸. 이제 들어갈까?”
나는 심장이 요동치는 것을 누르며 시카르의 팔을 꽉 잡았다. 시카르는 그런 날 보며 다시 한번 다짐시켜주었다.
“옆에 내가 있으니까 너무 걱정 말고, 로엔도 있으니까 기절하겠다 싶으면 말해. 로엔을 시켜서 정신이 번쩍 들게 해 줄 테니까.”
기절하고 싶은 사람의 정신을 깨우는 게 정말 좋은 방법일지에 대해서 고민하기도 전에 나는 시카르의 팔짱을 끼고 커튼 밖으로 나갔다.
많은 사람 앞에 서야 한다는 두려움을 안고 커튼 밖으로 나갔지만, 모두 우리를 쳐다보고 있지는 않았다.
대관식이 열리는 홀에는 레카도르의 모든 귀족이 양 갈래로 자리를 지키며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기에 나와 눈이 마주치는 이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커튼 뒤에서 긴장한 게 무색할 만큼 아무도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 순간 두려워하던 마음이 사그라들며 헛웃음이 나왔다.
“아무도 우릴 보고 있지 않잖아?”
“당연하지. 아직 키안이 입장하지 않았으니까.”
내가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 레이독스는 우리가 앉을 자리를 안내해 주었다.
우리는 왕좌 옆에 마련해둔 의자로 가서 나란히 앉았다. 의자는 왕좌에 비하면 초라했지만, 온갖 왕실의 문양이 새겨져 있어 휘황찬란했다.
우리가 자리에 앉자마자 레이독스는 손을 들었고, 저 멀리 서 있던 제르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연회장 홀 끝에 있던 육중한 문이 열리며 근위대가 들어와 양옆으로 도열했다.
키안은 거침없이 그들 사이를 걸어 나왔다. 그 거침없이 당당한 위용에 감격해 심장이 뛰었다.
그 작고 여리고 어미 잃은 아기새 같던 키안이 벌써 이렇게 당당하고 멋지게 자랐다는 생각에 감회가 남달랐다.
시카르의 말대로 광장 공포증은 커녕 감격에 겨워 눈물이 흘렀다.
“그렇게 울면 화장 다 지워져서 얼굴 이상해질 텐데. 이 많은 사람 앞에서 그렇게 추한 모습을 보였다간 평생 광장 공포증은 못 고치겠지.”
시카르는 손짓하며 메이리를 불렀고 메이리는 쪼르르 따라와 내 화장을 금세 고쳐주었다.
키안의 뒤로 근위대가 저벅저벅 걸어오다 키안이 우리의 앞으로 와서 서자 근위대는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나는 내 손을 잡고 일어서는 시카르를 따라 키안의 앞으로 가서 섰다.
키안은 우리를 향해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었고, 우리는 레이독스에게서 건네받은 왕관을 들어 키안의 머리 위로 올렸다.
키안의 머리 위로 왕관을 올려주는 순간, 심장이 얼마나 방망이질을 치는지 나는 그 순간을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다음으로는 레이독스와 듀리온이 키안의 어깨에 망토를 씌웠다.
왕관을 쓰고 망토를 입고 있는 키안의 모습은 그 누구도 어리다고 무시 못 할 지엄한 군주의 모습 그 자체였다.
듀리온은 비록 블레이크의 기사였지만 키안을 왕위에 올린 공신들이기에 그 누구도 이에 토를 달지 못할 것이다.
레이독스에게서 선언문을 받아든 키안은 긴장한 기색 하나 없이 낭독문을 읽어나갔다.
“군왕의 자리에 앉기에는 비록 어린 나이지만 과인은 항상 군왕의 마땅한 도리를 깊이 새기며 국정을 다스리도록 하여, 정령의 나라 레카도르를 사랑과 평화의 나라로 더욱 부흥시키고 발전시킬 것을 그대들에게 약속하는 바이다.”
아마도 저건 레이독스가 써주지 않았을까 싶었다. 키안의 짧지만 강한 선언문이 끝난 후 레이독스는 곧장 귀족들의 충성 서약을 받아내었다.
귀족들에게서 받아든 충성 서약은 왕권을 강화시키고 더불어 귀족들을 보호한다는 명목 또한 있기에 그들에게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블레이크와 레이독스라는 막강한 가문이 왕실을 보좌하는 이상 그들도 감히 왕실의 권위에 도전할 수 없을 테니 차라리 안전한 충성이 나을 테니까.
귀족들의 충성 서약을 받은 키안은 그들을 죽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재상의 자리가 비어 있어서 레이독스 유카나다르 후작을 임명할까 하는데, 그대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분명히 이것은 키안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레이독스의 성격상 자신이 재상의 자리에 앉겠다고 할 성격도 아니니 그의 생각도 아닐 것이다.
나는 ‘네 생각이지?’ 하고 묻듯 시카르를 은근슬쩍 쳐다보았다.
시카르는 당연한 게 아니겠냐는 듯 나를 보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귀족들에게 의견을 묻는다면 그들은 거절하지 못할 것이고 그들이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으니, 이는 키안의 독단으로 레이독스를 재상에 앉힌 게 아니게 되니 후에 그 누구도 불만을 갖지 못할 것이다.
불만을 갖는다면, ‘그대들도 모두 동의하였지 않소?’라고 말해버리면 되니까.
시카르는 길리언 척결 후 항복한 이들에게 모두 포상을 내려 후환을 없애기도 했다.
무서운 놈 같으니.
요즘 시카르가 나한테 좀 잘해준다고 그가 주도면밀한 악역이라는 걸 잊고 살았구나.
어쨌든 저 주도면밀하신 분 덕분에 손해 볼 거 하나 없이 대관식은 무사히 치러졌고, 레이독스의 임명식 또한 대관식 직후 바로 치러졌다.
그리고 나는 늦게라도 약을 먹은 덕분에 그 많은 사람 앞에서도 기절하지 않고 잘 넘어갔다.
라고 생각했다. 시카르가 사실을 얘기하기 전까지는.
“그런데 말이야.”
“응?”
“사실 아까 준 건 진정제가 아니야.”
“그럼 그건 뭔데?”
시카르는 내게 윙크하며 미소지었다.
“자양 강장제 같은 거지. 아주 잘 해냈군. 기특해.”
“그럼 나한테 가짜 약을 준 거야? 그 중요한 자리에서 내가 기절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랬던 거야.”
“플라시보 효과를 노렸으니까. 잘 성공한 것 같군.”
아주 잘 했다는 듯 시카르는 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지만 나는 아찔했다.
지금 웃음이 나오냐. 웃음이 나오냐고.
***
대관식이 끝나고 시카르와 접객실에 앉아 있으며 많은 생각이 났다.
키안이 이제 왕이 됐던 것도 실감 났고, 무엇보다, 사람들이 모두 나를 주시하는 게 아닌데 그동안 나는 사람들만 보면 왜 그렇게 긴장했던 건지 회의도 들었다.
시카르가 내 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괜찮다고 말해주는, 동안 키안이 접객실로 들어왔다.
무거운 왕관과 망토는 벗은 채로.
“어머니. 대관식 진행 동안 불편하시진 않으셨어요?”
자상하기도 하시지. 우리 전하, 예쁜 전하.
“불편하긴요. 너무 감동스러워서…….”
내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시카르는 재미있다는 듯 피식 웃었다.
“부인께서 우셔서 화장을 다시 고쳤죠.”
그새 내 걱정에 키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머니. 왜 눈물을 흘리신 거예요…….”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키안이 왕좌에 앉아서도 나를 너무 사랑해주는 모습에 그렇게 가슴이 벅차오를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베로니아와는 인사를 잘 나누었는지 궁금했다.
“공주님과는 작별인사 잘하셨나요?”
“아. 공주님과는…… 제가 불편하신 것 같아요. 저도 어색하고…….”
“제가 전에 말했죠. 공주님께서는 전하를 버리지 않으셨다고요.”
“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어머니와는 많이 다르신 분 같아요. 어머니는…… 절 낳아주지 않았어도 제가 열 살이 될 동안 항상 저와 함께 주무셨잖아요. 그런데 공주님은…….”
키안은 더는 말하지 않고 웃었다.
그 뒷얘기는 나도 서연에게서 들어서 알고 있었다. 베로니아가 키안을 한 번 안아 주지도 않았다는 말을.
겉으로는 애석한 듯 웃고 있었지만, 키안의 속은 제법 서운했을 것이다. 곁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시카르는 베로니아의 그런 행동을 이해하는 것 같았다.
“그건 그럴 수밖에 없지요. 공주님께서는 궁에서 자라 군왕의 법도만 배우셨으니까요. 공주님이 자식을 사랑하는 방식이란, 완전히 속세를 피해 숨어 지내거나 자식을 무사히 왕위에 앉혀 목숨을 보전케 하는 것이니까요.”
생각해보면 시카르의 말이 맞는 말이었다. 왕좌를 놓고 치열한 계승 전쟁이 벌어지는 곳이 왕궁이니까.
특히, 폐왕 때문에 없는 사람처럼 숨어지내거나, 그것이 실패한다면 더 자식을 왕으로 앉히는 일을 목표로 삼았을 것이다. 그래야 안전을 보장할 수 있으니까.
“공작님의 말씀이 옳아요. 공주님께서 자식을 사랑하는 방식은 전하를 왕위에 앉히는 거였을 거예요.”
키안은 조금 놀랍다는 얼굴로 나를 보다가 이해한 듯 머리를 지그시 끄덕였다.
“어머니께서 말씀해주시니 이제 공주님이 이해가 돼요.”
옆에서 듣고 있던 시카르는 조금 못마땅한 얼굴로 한쪽 눈꼬리를 올리고 키안을 노려보았다.
“제 말은 이해하기 힘든 말입니까?”
“아버지보다야, 어머니 말씀이 더 이해가 잘 되긴 합니다만.”
시카르와 대화할 때 키안은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마치 친아버지와 친아들처럼 편해 보인달까.
전에는 조금 서운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조금 알 것도 같았다.
키안도 아빠와만 지냈기에 시카르와는 친부와 그랬던 것처럼 편하게 여길 수 있었다.
엄마의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었던 탓에 나에게는 조심한 것이고.
그렇게 생각하니 나를 그렇게 귀하게 대해주는 키안이 더욱 고마웠다.
우리는 또 다양한 이야기를 했다. 키안은 특히 우리가 빨리 궁으로 입궁하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대관식이 끝났으니 길리언을 비롯해 다이엔느와 라페는 곧 처형될 것이라고 했다.
원래는 전투에서 모두 죽는 사람들이었지만 이렇게 더 이르게 처형되는구나 싶어서 조금은 씁쓸했다.
얘기가 끝나갈 무렵 제르미와 로엔이 우리가 있는 접객실로 들어섰다. 그리고 우리가 가장 궁금해하던 베로니아의 근황을 일러주려고 하더니 시카르를 보고는 다짜고짜 손을 내밀었다.
“공작님이 직접 보세요.”
“귀찮으니 직접 설명하지.”
제르미를 완전히 믿고 있으니 그의 기억을 보는 것도 귀찮아하는 것이겠지.
제르미도 그 마음을 알았는지 즐거운 얼굴로 베로니아가 잘 지내고 있음을 설명했다. 다행이었다.
제르미의 얘기가 끝나자 시카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지었다.
“내일 당장 설산으로 가야겠군.”
하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도 미소를 지을 수도 없었다.
‘내일 당장? 나 아직 베로니아와 정식으로 인사를 나눌 준비도 안 됐는데? 난 초면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