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푸른 해 (2)
(125/197)
125화. 푸른 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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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화. 푸른 해 (2)
2022.08.11.
시카르의 추진력으로 우리는 정말 다음날 설산에 도착했다.
설산은 하나 달라진 것 없이 예전과 그대로였다. 온통 새하얀 눈들이 가득한 곳. 멀리서 보면 아름다운 장관이지만 한없이 쓸쓸해 보이는 그곳.
멍하니 바라보고 있노라면 괜시리 눈시울이 붉어질 것만 같은 외로운 그 산에 베로니아가 혼자서 발리제의 무덤을 지키고 있었다.
키안의 생모이자 공주 베로니아를 만나려니 긴장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베로니아가 뭘 좋아했었더라. 생각해봐도 도저히 떠오르는 게 없어서 짐 마차에 먹을 것들만 가득 실어서 가져왔다.
내가 또 많이 긴장한 게 보였는지, 베로니아를 만나기 전 시카르는 내게 알약 하나를 주었다.
“먹으면 좀 나을걸.”
한 번 당해서인지 시카르가 건네는 약에 신뢰는 가지 않았다. 또 가짜겠지.
“글쎄.”
그래서 나는 정중한 제스처로 시카르가 건넨 약을 거절했다.
“됐어. 그냥 사람 만나는 것뿐이야. 누군가를 만날 때 이 정도 긴장은 하고 살아야지. 그리고 이건 기분 나쁜 긴장감은 아니거든. 조금 어려울 뿐이지.”
시카르는 웃으며 약을 던졌다 다시 받았다.
“좋은 생각이군.”
그 순간, 갑자기 키안을 향해 화살이 날아왔고, 시카르가 재빨리 검을 쳐서 이를 막았다.
자식을 향해 화살을 쏘는 엄마라니. 이상할 수도 있겠지만, 베로니아가 그렇게 자랐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놀라진 않았다.
하지만 격한 인사에 키안은 조금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그래서 나는 베로니에겐 이게 인사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러자 키안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교양있는 인사는 아니군요.”
그건 그렇긴 하겠네.
베로니아는 우리를 향해 눈밭을 밟으며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어서 와.”
웃으며 걸어 나오는 베로니아는 두툼한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설산에 혼자 있어도 기품이 넘치는 모습이 절로 감탄이 나올 만큼 아름다웠다.
아니,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라. 베로니아는…… 너무 멋있었다. 백색의 비카 같은 느낌이랄까. 키도 어찌나 큰지 주인공의 어머니다웠다.
배로니아는 나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대가 공작부인이군. 덕분에 국왕이 사랑받으며 잘 컸다지?”
“송구합니다.”
“추운데 다들 들어가지.”
발리제에게 인사를 올리고 난 후 우리는 시카르가 만들었다는 피신처로 들어갔다.
바위 안은 사방이 바위벽인 걸 제외하고는 평범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시카르는 본론으로 곧장 들어갔다.
“다름이 아니라, 오늘 이렇게 공주님을 찾아뵌 건 부탁이 있어서입니다.”
“나한테 부탁할 게 뭐가 있을까.”
“저희가 궁에서 지낼 수 있게 공주님께서 힘을 써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베로니아는 키안을 한 번 봤다가 우리를 쳐다보았다.
“왕궁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나 하나 구했다고 왕족의 행세라도 하고 싶어진 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았기에 나는 시카르의 눈치를 살폈다.
시카르는 무심한 표정으로 베로니아를 쳐다보고 있었다. 시카르가 뭐라고 하려 하자, 키안이 시카르의 손을 잡았다.
키안은 대답을 우리에게 넘기지 않고 당당하게 베로니아를 보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밝혔다.
“제 생각이에요. 갑자기 부모님들과 떨어져 지내게 돼서 왕궁에서 같이 지내고 싶어요. 그래서 공주님께서 허락해 주셨으면 합니다.”
베로니아는 곧장 대답하진 않았다. 그녀는 키안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우리를 보며 말했다.
“국왕을 이렇게 인정 넘치게 키우다니. 그대들이 국왕을 입양한 저의가 궁금해지는군.”
시카르는 변명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저주를 풀기 위해 키안을 입양했다는 사실을 밝혔고 나는 그 사실을 알게 된 키안이 실망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의외로 키안은 덤덤해 보였다.
베로니아는 그런 키안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이미 알고 있었다는 표정이구나.”
“네. 알고 있었어요.”
그럼 지금까지 그 모든 것을 다 알고도 잘해준 건가. 나는 놀랐지만, 시카르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네가 왕손인 것을 알고 입양했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제가 왕손인 것을 알고 입양했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그만큼 위험을 감수하셔야 했고, 절 위해 목숨을 거셨으니까요.”
베로니아가 조금 서운할 수도 있겠는데. 그렇지 않으려나.
하필 베로니아의 표정도 굳어 있는 바람에 나는 어쩔 수 없이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우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베로니아는 금세 미소를 지었다.
“서운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기도 하군.”
베로니아는 간단히 말한 후 곧장 무언가를 슥슥 쓰기 시작했다. 우리의 입궁을 허락한다는 명문서였다.
“귀족들에게 이것을 보여주도록 하라.”
시카르는 덤덤히 문서를 받으며 베로니아에게 감사의 인사를 표했고, 나도 함께 감사 인사를 전했다.
키안도 덤덤히 인사를 건넸다. 그래서 그게 조금 마음에 걸렸다.
키안이 베로니아 공주를 너무 남같이 대하는 것이.
그래서 나는 방을 나오기 전 키안과 베로니아가 부모와 자식간으로서 작별인사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을 주고 싶었다.
시카르와 키안이 모두 방을 나간 후 베로니아와 둘만 남은 나는, 그녀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공주 저하. 부탁이 하나 더 있습니다.”
“들어보지.”
“제가 전하를 처음 뵈었을 때, 전하께서는 굶주리고 추위에 정신을 잃고 계셨습니다.”
키안이 그렇게 고생했을 것은 생각 못 했는지 베로니아의 눈썹이 조금 움찔거렸다.
“제가 전하를 입양하게 되었을 때 반드시 친어머니를 찾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어요. 전하께서 어머니 품을 많이 그리워하셨거든요. 전하께는 자신을 왕으로 삼을 어머니가 아니라, 사랑을 표현하고 안아 줄 어머니가 필요해요.”
내가 주제넘은 소리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베로니아 역시도 그렇게 생각한 듯 불편한 얼굴이었다.
“그래서 내게 뭘 바라는 거지?”
“한 번만 저하를 안아 주세요.”
그녀의 커다래진 두 눈은 그녀가 얼마나 놀랐는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세 살짜리도 아닌, 다 큰 열 살짜리 아들을 품는 것은 왕궁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베로니아는 내 부탁을 외면하듯 고개를 돌렸다.
“그건 네 생각이겠지. 네 마음은 기특하나 국왕을 그렇게 어린애 다루듯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전하는 지금껏 왕궁이 아닌 사가에서 평범하게 자란 분이십니다. 오랫동안 이 외로운 설산에서 평범한 산골 아이로 자라셨고 저희에게 왔을 때에도 비록 양부모지만, 사랑받는 소공자로 자라셨습니다.”
“잘못했으면 응석받이로 키울 뻔했군.”
“부탁드립니다. 전하와 부모 자식간으로서의 작별인사를 해 주세요. 전하를 정말 사랑하신다면 포옹 한 번만 해 주세요. 그리하시면 공주님께서도 마음이 한결 편하실 겁니다.”
생각에 잠겨 있던 베로니아는 발리제의 초상화를 한 번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들여보내라.”
거절하진 않을까 조마조마한 마음이었기에 베로니아의 긍정적인 대답이 정말 힘이 되었다.
마음 같아서는 정말 너무 기뻐서 날뛰고 싶은 것을 꾹 참고 나는 밖으로 나와 키안에게 안으로 들어가 보라고 말했다.
“저만요?”
“네. 공주 저하와 작별인사를 나누셔야죠.”
키안의 얼굴을 보니 싫은 기색이 만면했다.
“물론 불편하겠죠. 하지만, 작별인사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두고두고 더 불편할 거예요.”
마치 답을 구하듯 키안은 시카르를 쳐다보았고 시카르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키안이 나를 한 번 쳐다보곤 안으로 들어갔다.
“무슨 대화들을 할지 궁금하군.”
“나도 궁금해. 나중에 키안의 기억을 보고 내게 말해주면 안 돼……?”
“내가 왕족의 기억을 보지 못한다는 것을 잊었나 보군.”
‘아. 그렇지.’
시카르는 무언가가 떠오른 듯 내 손을 꼭 잡으며 베로니아의 방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창고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여기서 들으면 잘 들릴걸.”
우리는 누가 먼저랄 거 없이 창고 벽에 귀를 대고 벽에 바짝 붙어섰다.
***
키안은 어딜 봐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베로니아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고 쭈뼛거리고 서 있었다.
“부르셨다고요.”
“애석하게도 올해는 네 아버지의 기일이 지났더구나. 기일 때 이곳에 왔더냐.”
“네. 어머니께서 매년 꼬박꼬박 저를 데리고 이곳에 오셨었습니다.”
“그랬군. 앞으로도 기일 때마다 올 생각이니?”
“당연히 올 예정입니다.”
“그래. 아무리 바빠도 와라…….”
그 말을 끝으로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베로니아가 한동안 유지하던 침묵을 깨트렸다.
“네 겉모습은 나를 닮았지만, 성격은 네 아버지를 빼닮았구나.”
발리제의 얘기에 키안은 호기심이 동한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베로니아는 발리제를 추억하며 구슬픈 미소를 지었다.
“네 아버지는…… 상대가 누구든 늘 가차 없이 옳은 말을 하는 사람이었지. 숨 막히는 궁에서만 지내던 내겐 너무 멋진 남자였다.”
“그렇게 숨 막히는 궁 생활인데 왜 저한테는 선택할 기회도 안 주셨어요?”
“나는 그럴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지만, 넌 다르니까.”
키안은 그게 무슨 의미인지 묻듯 베로니아를 쳐다보았다.
“그때 내겐 지금의 너만한 권력이 없었지. 나는 늘 왕실 어른들의 눈치를 보고 살아야만 했었다. 하지만 너는 그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을 것이다. 너는 이제 절대 왕정을 펼칠 수 있을 테니까.”
“그것은 절 위해서인가요. 레카도르 왕조를 지키기 위해서인가요…….”
“둘 다겠지. 난 너를 낳자마자 도망가야 했다. 네가 만약 왕이 되길 거부하고 다른 왕조가 생겨난다면, 너도 나처럼 자식을 버리고 도망자의 신세를 지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널 위해서 우리 왕조를 위해서, 반드시 왕좌를 지켜내야 한다. 네 아버지가 널 살리기 위해 치른 희생을 헛되이 하지 말 거라.”
키안은 이제서야 모든 사람이 자신을 왕좌에 앉히려고 그런 희생을 치렀는지 알 것 같았다.
“네가 서운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너를 낳기만 하고 키우지를 못했다. 그래서 아직 모정이 무엇인지 잘 가늠이 안 되는구나. 하지만 너는 왕손이니라. 한낱 모정에 마음이 약해지면 안 되는 존재니라.”
“이해해요. 저도 아직은 어색하니까요.”
어색하기는 베로니아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녀는 유라의 말대로 이 어색함을 깨트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베로니아는 먼저 두 팔을 벌렸다.
“그래도 한번 안아보자꾸나.”
키안은 뜻밖이었지만, 이내 미소 지으며 두 팔을 벌린 베로니아의 품에 꼭 안겼다.
***
우리는 거기까지만 듣고 동시에 벽에서 떨어져 밖으로 나왔다.
나는 기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어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둘이 안았을까?”
“글쎄.”
“안았겠지?”
“그렇지 않았을까. 우리도 안아보자.”
“으응?”
“사랑한다면 포옹 한 번만 해주세요.”
저건 내가 방금 전까지 베로니아에게 했던 말이었다. 놀리다니.
“좋은 말이던데? 사랑한다면 포옹해달라는 말 말이야.”
시카르가 미소 지으며 나를 끌어안으려 했다. 그래서 나는 가뿐히 몸을 피하며 그 순간 밖으로 나오는 키안을 끌어안았다.
“작별인사 잘하셨어요?”
“네. 어머니.”
키안의 표정도 이곳으로 올 때보다 한결 가벼워 보였다.
우리는 왔던 길을 따라 나란히 셋이서 걸어 내려갔다. 우리가 지나온 눈 위로 여섯 개의 발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오랜만에 온 설산은 여전히 추웠지만, 돌아가는 길은 이전처럼 마음이 무겁진 않았다. 다음에 이곳에 왔을 땐 더 가뿐한 마음이겠지.
가는 길에 나는 키안에게 넌지시 물었다.
“근데, 우리가 전하를 입양한 목적은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요?”
키안은 시카르를 한 번 노려봐주곤 내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
“쌀쌀맞다가도 내가 동상을 녹여주면 얌전해지는 아버지를 보며 모를 수가 없죠.”
그건 그랬겠구나.
시카르는 그게 뭐가 웃기냐는 표정이었지만, 나와 키안은 그때의 일이 생생해서 웃음이 났다.
“맞아. 그때 그랬죠.”
“네. 어머니.”
우리의 웃음소리에도 시카르는 표정 하나 붉히지 않았다.
“겉과 속이 같다는 거지. 후후.”
결코, 굽히지 않는 당당함에 우리는 혀를 내두르면서도 앞서 걸으며 길을 터주는 시카르의 뒤를 졸래졸래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