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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화. 푸른 해 (3) (126/197)


126화. 푸른 해 (3)
2022.08.15.


이전에는 설산을 다녀온 후 항상 집에 함께 왔는데 이번에는 그렇지 못했다.

마차에서 작별을 나누는 키안에게서는 왕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키안은 아직 나의 열 살짜리 아들 같기만 했다. 키안은 나를 꼭 안으며 헤어짐의 아쉬움을 드러냈다.


“요즘 어머니랑 매일 함께 자던 꿈을 꿔요. 함께 색종이를 했던 꿈도 꾸고요…… 빨리 입궁하셨으면 좋겠어요.”

앞에서 보고 있던 시카르가 지루한 듯 하품을 하며 키안을 쳐다보았다.


“공주님께 명문서를 받았으니 입궁은 곧장 서두르도록 하지요. 그러니 이만 들어가시죠. 내일은 아침 일찍 길리언의 처결을 두고 어전회의도 열어야 합니다.”

아. 그렇지. 길리언을 처결해야 하지.

나도 더는 키안을 잡아두면 안 될 것 같았다.


“공작님의 말씀대로 곧 입궁하게 될 테니 이만 들어가세요.”

키안은 아쉬움에 한숨을 내쉬었지만, 이젠 우리가 마차에서 내릴 시간이라는 것을 알았다.


“너무 늦으면 안 돼요.”

“절대 늦지는 않을 거예요.”

우리가 마차에서 내린 뒤 문이 닫힐 때까지도 키안은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자리가 자리인지라 많이 늠름해졌다지만, 그래도 한없이 여리고 어린 모습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아직 어리광을 부릴 나이인데 너무 일찍 군왕의 자리에 앉았다.

시카르는 손으로 내 눈물을 닦아주며 나를 달래주었다.


“길리언의 처결만 끝나고 나면 곧장 입궁을 준비할 거다. 입궁하고 나면 이제 네가 울 일도 없어지겠지?”

무뚝뚝하게 말을 하곤 있었지만 내가 꽤 걱정되는 눈빛이었다.

그래서 나는 지그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거야. 입궁하게 되면 더는 울 일이 없을 테니까.”

시카르는 완전히 안심된다는 듯 큰 한숨을 내쉬며 미소지었다.


“그거 정말 다행이군. 또 밤새 울까 봐 조마조마했다.”

내가 쳐다보자 머쓱한지 시카르는 어서 가자는 듯 손을 내밀었고 나는 그 손을 잡고 공작저를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

공작저에 도착한 후 우리는 곧장 주린 배부터 채웠다. 안드레아는 노련하게도 우리가 도착할 시간에 맞춰 음식을 준비해놓았다.


“오. 안드레아의 센스는 누구도 따라갈 수가 없을 거야.”

“공작님께서 이 시간에 음식을 준비하라고 이르셔서 저는 시간에 맞춰서 한 것뿐입니다. 마님.”

그랬구나. 이런 것마저도 시카르는 주도면밀하구나.

그런데, 이런 주도면밀함은 대환영이었다. 음식이 준비되기까지 기다릴 일이 없으니까.

새벽부터 일어나 추운 설산에 있다가 왔더니 배가 이만저만 고픈 게 아니었다.

시카르는 이 와중에도 차분하게 식사를 하며 고고한 자세로 내 입술을 닦아 주었다.


“물론, 네 나라 법도에서는 배고플 때 허겁지겁 먹는 게 전혀 이상하진 않겠지만, 이 나라 법도에서는 귀족들은 하지 않는 행위다. 곧 터커도 올라올 테니 조금 더 차분히 먹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은데.”

아. 그렇지. 그동안 잘 익혔는데 너무 추위에 떨고 와서 그런지 그동안 귀족의 품위를 배웠던 것을 다 까먹은 것 같았다.

배가 고픈 걸 꾹 참으며 무조건 우아하게 식사를 해야 한다니. 정말 귀족이란 돈 많은 것 빼고는 참 피곤한 신분이다


“안드레아. 터커를 부르고 내가 부탁한 것들을 정리하고 있도록.”

“네. 공작님.”

안드레아가 가고 난 후 곧 터커가 쭈뼛쭈뼛 걸어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공작님.”

“앉아서 같이 들지.”

“네? 저더러 여기서 식사를 하라고요?”

“그래. 오늘은 같이 저녁을 먹었으면 싶군. 어서 앉아라.”

얼떨떨한 얼굴로 서 있는 터커를 향해 시카르가 무심하게 말을 한 탓에 내가 미소를 지으며 터커를 좀 안심시켜 주었다.


“터커. 괜찮아. 앉아서 먹어도 돼.”

귀족과 같은 식탁에서 밥 먹을 일이 없으니 터커로서는 당황스러웠겠지.

터커는 의자에 대충 엉덩이만 걸치듯이 앉아서 시카르의 호통을 한 번 들었다.


“내가 칼을 꺼내 들기 전에 똑바로 앉아라.”

“네. 네. 공작님.”

터커는 시카르의 저 말이 진심이 아니란 것쯤은 이제 알고 있으려나. 잔뜩 긴장한 것을 보면 여전히 잘 모르는 것 같기도 하고.


“준비한 음식들은 마음껏 먹도록 해라.”

터커는 눈치를 보면서도 맛있는 음식에 매료된 듯 접시를 깨끗이 비운 상태였다.

식사가 끝난 후 안드레아는 언제나 그렇듯 밀크티를 준비해왔다. 그리고 밀크티 한 잔은 터커에게 건넸다.

터커는 처음 보는 밀크티에 신기해하는 듯 보였다.


“이것은 귀족들의 차인가 봐요.”

“아니, 내가 좋아하는 거야. 마셔봐 맛있을 거야.”

“공작 부인께서는 항상 제게 과분한 것만 주시는군요.”

“그냥 흔해 빠진 차들 중 하나야. 가볍게 마셔.”

“감사합니다.”

차를 마시는 동안에도 아무 말이 없던 시카르는 우리가 차를 다 마시고 나자 지그시 터커를 불렀다.


“터커, 내가 보상을 내린다고 한 것을 기억하나?”

“아우. 보상이라니요. 그런 거 바라지도 않아요. 빚진 게 더 많은걸요.”

“네가 내 목숨을 구한 것으로도 빚은 다 갚고도 남음이니 그 얘긴 그만하지. 그것보다 네 평생을 갖고 싶어 하던 게 네가 살 집과 땅이라지?”

헤벌죽 웃고 있던 터커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공작님께서 그걸 어떻게…… 혹시 제가 말씀드렸었나요?”

“내가, 네 평생을 꿈꾸던 그 모든 것을 네게 주겠다.”

“네? 하지만 이미 받은 것들이 많은데…….”

“내 목숨을 살려준 대가가 그 정도는 돼야지.”

“안드레아 님께서 국왕 전하가 바뀌셨다고 하셨어요. 공작님께서 세상을 바꾸셨다고요. 이젠 제 목숨을 위협할 사람도 없고, 마차까지 있으니 그것이면 족해요.”

터커는 진심으로 겸양하고 있었지만, 한 번 고집을 피우기 시작한 시카르를 말릴 수는 없었다.


“내가 너무 점잖게 말했나 보군. 다시 말하지. 거절하면 죽는다.”

“저 하지만…….”

“대신 조건이 있다.”

“조건이라면…….”

“네 고향 윈터는 버리고 블레이크로 와서 살아라. 힘든 조건은 아니겠지?”

“그거야 결코, 어렵지 않은 일이에요. 공작님.”

“그리고 네 할머니는 곧 다시 모셔오지.”

조금 전 거절하면 죽는다고 한 탓인지 터커는 시카르가 말하는 대로 무조건 알겠다고 대답하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공작님.”

“잠깐 이게 끝이 아니다.”

“네?”

“네가 거느릴 사용인들도 붙여주지.”

“네…… 네?”

시카르는 대답하는 대신 메이리를 불렀다.


“네. 공작님.”

“안드레아는 아직이더냐?”

“곧 모셔오겠습니다. 공작님.”

터커에게 줄 보상이 다 준비됐다면 오늘 터커가 이 집을 떠날 모양이구나.

나는 시카르가 터커를 위해 무엇을 준비했을지 몹시 기대되었다.

제 목숨을 살려줬으니 겨우 집 한 채로는 끝나지 않을 것 같은데.

안드레아는 서류를 한가득 들고 들어왔다.


“공작님 말씀하신 것들 모두 다 준비했습니다.”

“모두 터커에게 전달하도록.”

터커는 얼떨결에 받아든 서류를 들고 이게 무슨 일인지 싶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멀뚱멀뚱 서 있었다.


“이게 다 뭐예요…… 공작님…….”

안드레아는 터커의 품에 든 서류를 하나하나 넘겨주며 말했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진 토지 문서이고 이건 저택 문서, 이건 보증 문서 또, 이건 물품 문서들. 문서. 여기서부터 여기까진 사용인들의 이력서와 미리 지급해준 월급이고, 여기서부터 여기까지는 각종 문서들이지.”

터커는 믿기지 않는 듯 제 손에 든 문서를 한참을 바라보았다.


“이, 이게 다 제 것이라고요?”

“내 목숨이 그만큼 비싸다는 걸 이제 알았겠군.”

“하, 하지만 이건 제게 너무 과분한 것들입니다. 공작님…….”

“다시 한번 말하는데, 거절하면 나한테 죽일 수도 있다.”

죽인다고 하는 말을 터커가 곧이곧대로 믿었다기보단, 시카르의 선물을 더는 거절할 수 없었던 터커는 문서들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정말 감사합니다. 공작님. 이 은혜는 정말 절대…….”

“은혜는 무슨. 넌 내 목숨을 구했고 난 그 값을 치렀으니 계산은 끝난 것이지. 안드레아가 마차를 준비해줄 테니 이만 네 저택으로 가봐라. 사용인들이 너를 맞이해줄 것이다.”

터커는 곧장 자리를 뜨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눈물을 흘렸다.


“공작님…… 이 은혜를 어떻게…….”

터커는 도저히 자리를 뜰 생각을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계속 통곡하고 있었고 그 모습을 외면하며 앉아 있던 시카르는 사람을 불러 말했다.


“시끄러우니 끌고 나가라.”

곧이어 하인들이 달려와 대성통곡하는 터커를 끌고 나갔다.


“공작니이이임! 으흐흑! 공작니이이임! 으흐흑! 이 은혜는 결코, 잊지 않을 거예요! 반드시 갚아 드리겠습니다! 으흑!”

터커는 사람들에게 끌려나가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대성통곡했다.

대성통곡을 하며 끌려나가는 모습은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잘못해서 쫓겨나는 모습처럼 보였다.

잘해주면서 쫓아내는 저 강단은 어떤 면에서 보면 대단해 보이기까지 했다.

터커가 완전히 떠나고 난 후에야 시카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좀 조용하군.”

그러곤 곧장 서재로 향했기에 나는 그를 불렀다.


“오늘도 일하는 거야?”

“내일 할 일이 많아서 오늘도 늦게까지 일을 해야 할 것 같군. 혹시 혼자 자기 심심하거나 악몽을 꿀까 봐 무서운 거라면 내가 같이 있어 주…….”

“아니야. 됐어. 가서 일 봐.”

물론 같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내일 정말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방해할 수가 없었다.

왕실이 대거 구조 조정되는 바람에 비카고 듀리온이고 요즘은 거의 레이독스를 도와 왕실 일에 매진 중이었으니까.

오랜만에 혼자서 저녁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내일이 되면 피바람이 불기 시작할 테니까.

이 고요한 밤이 폭풍 전야처럼 느껴졌다.

***

끼익.

결코, 열리지 않을 것 같던, 굳게 닫혀 있던 쇠창살 문이 기분 나쁜 쇳소리를 내며 열렸다.

며칠을 감옥 안에 있었지만 길리언은 흐트러짐 하나 없이 왕족의 품위를 그대로 지키고 고고하게 앉아 있었다.


“다신 그 낯짝을 안 보여줄 줄 알았는데.”

길리언은 고개를 빳빳이 들고 들어오는 시카르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감히 자신을 배신한 자를 증오하듯이.


“네 놈에게 죽음의 길을 안내하기엔 나만 한 길라잡이가 없을 테니까.”

“나를 처형시키기로 한 건가.”

당연한 질문에 코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시카르의 낮은 중저음이 또다시 어두운 감옥 안을 울렸다.


“그럼 살 생각이었나?”

“나를 처형당하게 내버려 두면 네 아내의 존재도 무사하지는 못할 텐데.”

“헛소리를 다 하는 걸 보니, 죽을 때가 돼서 겁을 먹은 모양이군.”

“검은 눈의 사람이 또 있다는 건 너도 알고 있겠지.”

“네놈이 찾고 있었다는 것도 알고 있지.”

“찾고 있다는 것만 알고 찾았다는 것은 몰랐던 모양이군.”

어차피 길리언을 잡았기에 이젠 상관없는 일이었다. 시카르는 재미없는 얼굴로 하품을 했다.


“겁을 먹은 건가? 쓸데없이 말이 많군. 검은 머리를 알고 있든 말든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

“관심을 두지 않으면 안 될 텐데. 내가 좀 전에 말하지 않았나? 네 아내의 존재도 무사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검은 눈을 가진 사람이 내 아내에게 무슨 짓이라도 한다는 듯이 들리는군. 하지만 그런다 한들, 내가 못 막을 일은 없을 것이다.”

길리언은 품위를 잊은 듯 갑자기 킥킥거리며 웃었다.


“네가 모르고 있을 줄 알았지.”

“뭘 말이지?”

“검은 눈의 인간들은 어느 순간 갑자기 사라진다는 것을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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