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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화. 푸른 해 (4) (127/197)


127화. 푸른 해 (4)
2022.08.18.


시카르가 집을 나서며 오늘 헤르시아가 올 것이라고 말해서 처음엔 그저 기뻤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헤르시아는 스스로 결정을 못 내릴 테니, 그녀가 오면 샤린을 어떻게 처결할지 나에게 같이 결정하라고 한 탓에 가벼운 마음일 수가 없었다.


“헤르시아! 이게 얼마 만이에요! 대체 어디 갔다 오신 거예요?!”

정말 오랜만에 보는 헤르시아였다. 물론 그동안 정신없는 날들을 보내느라 연락을 못 한 것도 있었지만 헤르시아가 연락이 되지 않은 것도 있었다.


“아. 저는 후작님께서 피신해 있으라고 하셔서 제르미 님 집에서 머물다 왔어요. 피바람에 휩쓸릴 수 있다고 그 누구와도 연락하지 못하게 하셨거든요.”

레이독스가 아론을 위해서 헤르시아를 지켜준 모양이구나.

그의 세심하고 현명한 판단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나는 오랜만에 보는 헤르시아의 두 손을 꼭 잡았다.


“정말 잘했어요. 헤르시아. 참 잘하신 거예요.”

하지만, 그 말로는 헤르시아를 달랠 수는 없는 듯했다. 그녀는 서글픈 듯 눈시울을 붉혔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건 어제였어요. 아론이 오늘 길리언 전하의…… 아니, 길리언의 처형날짜가 결정된다고 말해줬거든요. 공작저의 소공자님이 새로운 국왕이 되셨다는 얘기도요.”

“많이 놀랐죠?”

“네…….”

헤르시아는 그때 일을 떠올리듯 숨죽이고 있다가 말을 꺼냈다.


“후작님께서 가문을 버리고 아론과 결혼할 마음이 있냐고 물으시더군요. 그래서 있다고 했죠. 그랬더니 갑자기 왕후 저하의 시녀직을 그만두라고 하셨어요. 공작님께 말씀드렸더니 후작님의 말씀을 따르라고 하시더군요.”

“그리고 곧장 제르미의 집에서 머무신 거군요.”

“네. 제가 살려면 제르미 님 집에서 꼼짝도 하면 안 된다고 하셨어요. 그땐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몰랐죠. 근데 이젠 알 것 같아요. 제가 길리언의 일에 연루되는 걸 막기 위해서 그러셨다는 것을요.”

덕분에 살았음에도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겠지.


“길리언 문제는 어쩔 수 없겠지만, 모비아트 가문은 무사할 거예요.”

“정말 그럴까요? 제가 다이엔느의 시녀였는데도요?”

“누군가 헤르시아에게 의혹을 갖게 된다면, 공작님과 후작님이 모두 해결해 주실 거예요. 모비아트 가문과는 아무런 유착이 없다는 것도 밝혀 주실 테고요.”

헤르시아는 답답한 듯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족보를 따지자면, 길리언은 헤르시의 외삼촌 되는 사람의 아들이었다.

아무리 친하진 않았다고 해도 마음이 좋을 리는 없었다. 그것도 오늘 처형 날짜가 결정될 테니까.


“헤르시아. 이런 말이 위로가 될지 모르겠지만, 길리언은 헤르시아를 하멜 백작에게 팔아넘기려고 했어요. 왕좌를 뺏기지 않았더라면 사촌이라는 이유로 어떻게든 헤르시아를 이용해 들려고 했을 거예요.”

“하긴, 길리언은 그러고도 남겠죠. 그렇다고 죽길 바랐던 건 아니었는데.”

“헤르시아가 죽길 바라서 이런 일이 생긴 게 아니에요. 이건, 왕좌를 지키지 못한 왕족의 숙명일 뿐이에요. 헤르시아도 그건 이해하시겠죠?”

그녀는 대답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녀가 또 한없이 자신을 자책하지는 않을까. 조금 걱정도 되었다.


“이제 아론과 결혼식도 올려야죠. 참, 샤린 님께도 죄를 묻고요.”

샤린의 일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기에 헤르시아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물었다.


“샤린이 왜요?”

“샤린이 예전에 헤르시아께 독의 꽃을 먹였었어요.”

“네?”

꽤 많이 놀란 모양인지 귀가 따가울 만큼 헤르시아의 목소리가 커졌다.


“저한테 그런 걸 먹였다고요?”

“하지만, 걱정 마세요. 일전에 공작저에 오셨을 때 저희가 이미 해독제를 썼으니까요.”

헤르시아는 여전히 믿기지 않는 얼굴이었다.


“샤린 님이 그러신 게 정말 맞아요? 샤린 님은 제게…… 정말 다정한 분이셨는데 왜…….”

“다이엔느의 지시였으니 어쩔 수 없었던 거죠. 그러니, 너무 맘 약하게 먹지 마세요.”

“하지만 그 문제를 제가 처결할 수 있을까요?”

“네. 공작님께서 어떻게 처결할지 헤르시아 님께 물어보실 거예요.”

헤르시아의 손이 낮게 떨렸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꽉 움켜쥐었다.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제게 독을 먹였으니 저 여린 마음에 얼마나 놀랐을까.

마음이 여리지 않은 사람이라도 누군가 독을 먹였다고 한다면 놀랄 수밖에 없을 텐데.


“그런 일이 있던 줄 꿈에도 몰랐어요.”

“하지만, 그건 분명한 사실이에요. 그러니 냉혹하게 결정하셔야 해요.”

“꼭 제가 해야 하는 일이에요?”

“당사자인 헤르시아에게 처결을 맡기신 거죠. 후작님께서 결정해 달라 하셨어요. 그럼, 헤르시아 님의 결정을 참고해서 처결을 내리겠다 하셨거든요.”

헤르시아는 뜻밖이라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ㄹ사람 좋아 보이는 후작에게도 그런 냉정한 면이 있는 것에 대해 놀라운 듯 말이다.


“후작님께서요?”

“네. 이제 후작님이 재상이 되셨으니 권한이 있으십니다.”

“저는……. 저는 결단을 내리기가……. 공작부인께서는 제가 어떻게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세요?”

“전 살인 미수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제 생각엔 샤린의 재산을 모두 몰수하고 샤린은 북부로 유배를 보내는 게 어떨까 해요.”

“그렇게 까지나요?”

“목숨은 거두지 않으니 그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일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역시나 마음이 여린 헤르시아는 그마저도 고민하고 있었다.


“헤르시아. 죄인이 감옥에 수감되는 게 당연하듯 당연한 처벌일 뿐이에요. 그래도 목숨만은 부지하게 해 주잖아요.”

헤르시아는 꽤 많이 혼란스러워 보였다. 친하게 지냈던 사람에게 벌을 내리려니 그 마음이 쉽지 않겠지.


“뭐가 잘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분명한 건, 잘못하는 것도 없다는 거예요.”

헤르시아는 잠시 고민하는 듯 한숨을 내쉬다 슬픈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공작부인의 뜻에 따를게요.”

 

 

***



“헛소리!”

시카르는 당장이라도 길리언의 목을 벨 기세로 손에 잡고 있는 칼을 꽉 쥐었지만, 길리언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너도 알고 있겠지. 검은 눈의 인간들은 모두 이상한 옷을 입고 나타난다는 것을 말이지.”

애석하게도 그 말은 헛소리가 아니었다. 시카르는 길리언이 검은 눈의 인간을 확실히 알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사라진다니? 거기에 대해서나 자세히 말하라.”

“지금 그걸 설명하려고 하는 것이니 정신 차리고 잘 듣도록 해.”

길리언은 기억을 찬찬히 되짚어 나갔다.


“베로니아의 자식을 찾기 위해 레카도르를 이 잡듯 뒤졌지. 그런데 검은 눈의 인간이 눈에 띄더란 말이지. 검은 눈의 인간이라…… 레카도르에서 그런 눈을 보는 일이란 흔하지 않지, 그래서 미행을 보냈더니 집도, 가족도 아무것도 없더군. 그래서 이곳 감옥에 가두었지.”

“그럼 지금 그 검은 눈의 인간은 어디 있지?”

“내가 방금 말하지 않았나? 사라졌다고. 그 인간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마치 마법으로 순간이동을 하듯이. 하지만, 마법진의 흔적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시카르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 소환이라도 했던 모양이지. 들어보니 별것도 없는 걸 잘도 부풀려대는군.”

“내가 검은 눈의 인간을 한 번만 봤을 것이라 생각하나?”

“또 보기라도 했다는 소린가?”

“키안을 찾기 위해 레카도르를 뒤지는 동안 한두 명 본 게 아니다.”

그 말은 시카르도 흥미를 갖기에 충분했다.

그동안 시카르는 길리언이 동양인들을 찾기 위해 혈안인 줄 알았는데, 지금 보면 그게 아니었다. 키안을 찾던 중에 얻어걸린 것뿐이었다.

시카르는 그 얘기를 좀 더 들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더 말해봐.”

“나는 검은 눈의 인간이 보일 때마다 모두 잡아들였다. 그런데 말이야. 두 번째 잡아들인 인간도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 연기처럼 사라지는 것도 아니야. 그냥 한순간에 삭제된 듯 이곳에서 사라진 것이지.”

“그래? 그거 정말 놀라운 재주군.”

“대개들 사람이 사라질 때에는 어떤 현상이 일어나곤 하지. 얼마 전에 네가 파시움과 사라졌을 땐 폭발이 일어났고, 마법사들이 순간이동을 할때에도 그 자리에는 마법진의 흔적이 나타난다. 소환을 당할 때도 소환진이 나타나지. 그런데 이 경우는 말이지. 정말 신기하게도 그냥 사라졌다. 마치 신기루처럼 말이야. 사람이 눈앞에서 그렇게 한순간에 사라지는 걸 본 적이 있나?”

시카르는 대답하지 못하고 미간을 찌푸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마법사보다 더 놀라운 어떤 능력을 지녔던 모양이지.”

“아니, 그건 능력이나 재주가 아니었다. 그건 하나의 이치였지. 이들은 어떤 조건이 성립되면 사라진다는 말이다.”

시카르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져 내렸다. 어떤 조건이 성립되면 한순간에 사라진다고?!


“그게 무슨 허무맹랑한 소리지?!”

이를 으드득 가는 시카르의 목소리에 무게 있는 힘이 실렸다.

길리언은 이제 주도권은 자신에게 넘어왔다는 듯 조금 더 여유로워진 모습이었다.


“그리고 난 그 조건을 알고 있지. 내 말이 믿기지 않는다면 지켜봐. 네 아내도 어느 날 감쪽같이 사라질 테니까. 이 세계에서 영영 말이지. 아주 볼만 하겠군.”

이 세계라는 말을 쓴다는 것은……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길리언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한 번 사라진 인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 내 말이 믿기지 않으면 저 방을 뒤져봐. 검은 눈의 인간들이 사용하던 물건이 있을 테니까.”

시카르는 곧장 옆 방을 뒤졌다. 거기엔 유라가 살던 세계에서 보이던 핸드폰이 있었다. 전원은 꺼져 있지만, 모양이 핸드폰이 분명했다.


“이곳으로 넘어온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보이는 물건 중 하나였지. 그들은 모두 아무 쓸모도 없어 보이는 그런 네모 납작한 물건을 들고 있더군. 하지만, 미세하게 모양이 다른 것을 보면 이게 신분 패가 아닐까 한다.”

“멍청한 자식. 이건 신분 패가 아니라 마법사들의 수정구슬 같은 물건이다.”

“뭐? 그 네모 납작한 물건이 수정구슬이라고?!”

“그딴 얘기는 그만하지. 그러니까 네 말은, 검은 눈의 인간들이 이 세계에서 사라지는 걸 막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것 같은데, 맞나?”

길리언은 이제 말이 통하는 것 같았다. 그는 마음에 든다는 듯 미소지었다.


“그래. 날 살려라. 그럼 내가 그 방법을 알려줄 테니까. 내가 바라는 건 조용한 숲속 별장이다.”

“그 꼴로도 살고 싶은 모양이군.”

“내가 왕좌를 차지한 것도 살고 싶었을 뿐이었다. 너희 놈들도 살고 싶어서 그리했듯이 말이지. 그리고 난 그 생존 싸움의 패배자일 뿐이다. 날 살려라. 아니면 네 아내는 사라진다. 네 아내가 사라지는 허무함을 느끼고 싶거든 날 죽여보든가.”

길리언의 말을 호락호락 믿을 시카르는 아니었지만, 정황상 그 말이 틀리지 않다는 증거 또한 없었다.


“네 말을 어떻게 믿지?”

“내 말이 믿기지 않으면 검은 눈의 인간들을 잡아들여 봐. 네 아내가 아직은 운 좋게 버티고 있지만, 곧 사라질 테니까.”

미운 놈에게 어퍼컷이라도 날린 듯 길리언은 꽤 기분이 좋아 보였다.


“너 같은 대역죄인의 목숨을 구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건 알고 있을 텐데?”

“난 왕족이니 네가 힘만 쓴다면 살릴 수 있겠지. 나를 죽이게 되면 국왕은 제 혈육을 죽인 냉혹한 왕이 될 수도 있다고 여론몰이를 한다면 간단하게 해결될 수도 있는 문제지. 안 그래?”

“약아 빠진 새끼.”

“말했다시피 나는 살고 싶을 뿐이다.”

“너 같은 쓰레기도 제 목숨 귀한 줄은 아는군. 대체 네 놈이 정말 살고자 하는 이유가 뭐지?”

“이유? 그따위건 없어. 사람은 원래 다 살고 싶은 거야. 난 그냥 숨 쉬며 내 삶을 살아가고 싶을 뿐이니까. 날 살려. 날 살려서 네 아내가 사라지는 것을 막아! 날 살리지 못하면 네 아내도 이 세상에서 영영 사라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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