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8화. 푸른 해 (5) (128/197)


128화. 푸른 해 (5)
2022.08.22.


길리언에게 살려주겠다는 약속을 하진 않았지만, 지금 죽일 수는 없었다.

먼저 사실을 확인하는 게 우선이었으니까.

시카르는 키안이 궁으로 들어온 후 하루도 빠짐없이 국사를 돌보느라 쉬지 못한 탓에 갑자기 건강상에 문제가 생겼다는 구실을 만들어 어전회의를 오후로 미루었다.

쉬지 못하고 바빴던 건 각료들도 마찬가지라 그들은 오전 중에라도 쉴 수 있음에 안도했다.

시카르가 갑자기 어전회의를 취소한 것은 키안에게 길리언의 처형을 미루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다만, 유라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제외했다. 그래서인지 키안의 반응은 이해할 수 없다는 투였다.


“그래도 되는 거야?”

“그런 방법도 있다는 거지.”

두 사람은 언제부터인가 둘이 있을 때는 자연스럽게 부자지간으로서 대화를 나누었다.


“근데 길리언을 살려준다면 위협이 되는 건 아니야?”

“길리언을 따를 이들이 모두 제거 됐으니 위험한 건 없다.”

“나중에 사람들을 모아서 오면 어떡하고.”

“그땐 네가 아주 강하게 커 있겠지.”

강해진다는 말은 키안을 조금 들뜨게 만들었다.


“아버지 보다 강해질 수 있어?”

“물론. 나보다 훨씬 강해지지.”

의심스러운 듯 시카르를 보던 키안의 얼굴이 점점 밝아졌다.


“그럼 아버지가 알아서 해. 아버지 말대로 내가 혈육을 처형시킨 왕이 되는 것보다는 길리언을 살려두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하니까.”

시카르는 키안이 길리언의 처형도 망설이지 않는 그런 냉철한 군주가 되는 것이 더 좋았지만. 유라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것은 밝힐 수는 없었다.

반면, 키안은 사실 길리언의 일보다는 유라의 입궁일이 더 중요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입궁 날짜가 늦어지는 건 아니야?”

“물론 늦어지지 않게 할 생각이다. 오늘 점심이 끝나고 있을 어전회의에서는 모두 결론을 내릴 생각이니까.”

“참, 그런데 궁은 어디를 쓸 생각이야? 그건 정했어?”

“공주님이 쓰시던 데이지 궁을 쓸까 하는데 네 생각은 어때?”

키안은 방긋 웃으며 시카르를 향해 손바닥을 내밀었다. 손뼉을 쳐달라는 뜻이었다.


“별걸 다 하는군.”

시카르는 귀찮다는 듯 손뼉을 마주쳤다.


“근데 이런 제스처는 왜 하는 거지?”

“좋은 생각인 거 같아서. 비어 있는 궁 중엔 데이지 궁이 여기서 가장 가깝다고 들었거든.”

“좋아. 그럼 당장 데이지 궁을 청소하라고 명을 내려야겠군.”

“그럼 내일 당장 오면 안 돼?”

토끼 같은 눈망울로 저를 쳐다보는 키안의 모습은 사랑스럽기만 한 열 살짜리 아이였다.

시카르도 유라를 생각하면 내일 당장 입궁하고 싶었지만 기다렸다는 듯 입궁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당장 입궁하기란 어렵고 일주일 뒤로 하지.”

키안은 조금 실망한 얼굴이었지만 받아들이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그렇게 해야 한다면…… 알겠어.”

“그동안 궁을 치우고 꾸미기도 해야 하니, 일주일이면 가장 적당하겠지.”

“궁을 꾸민다고? 그럼 나도 같이 꾸밀래.”

“어떻게?”

데이지 궁은 데이지가 궁 곳곳에 피어 있어서 그런 이름이 붙여진 궁이었다. 베로니아가 궁을 떠난 이후로는 꽃은 모두 시들어 버리고 잡초들만 무성한 폐궁으로 남아 있었다.

키안은 그 점을 떠올리며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잡초와 나무 덩굴을 모두 치우고 어머니가 좋아하는 장미를 심어야겠어.”

장미꽃은 유라가 너무 물러터져서 조금 뾰족하게 살라는 의미로 시카르가 그녀의 방에서 보이는 잔디밭에 심어준 것이었다.

키안이 너무 즐거워하며 말하는 바람에 시카르는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럼 그건 그렇게 하도록 하지. 그리고 우리의 입궁이 끝나면 백성들 민심을 더 끌어 올리기 위해 시찰을 한 번 나가도록 하자.”

“시찰……?”

“일전에 네가 구빈원을 도운 덕분에 블레이크가의 민심이 좋아졌다. 이번에도 또 방문하게 된다면 민심 유지에 더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데 네 생각은 어때?”

“응. 아버지 말대로 할래. 레카도르의 모든 구빈원을 시찰 다니면서 백성들 사정을 두루두루 살펴볼래.”

“훌륭하군.”

시카르는 키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려다 말았다. 아직은 칭찬이 좋을 나이긴 하지만 국왕에게 이런 식의 칭찬은 더는 안 될 테니까.


“그리고 나 할 말 있어.”

“무슨 말?”

“쌍둥이들을 내 수행기사로 훈련시켜 줘.”

원작에서 키안이 본 사람들 중 가장 믿을 만한 온기를 주는 것은 쌍둥이들뿐이었다.

그랬기에 키안이 숙명처럼 쌍둥이들을 고집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안 그래도 그럴 예정이었다.”

키안은 시카르의 시선을 외면하며 주먹을 내밀었다.


‘이번엔 주먹 치기를 하자는 거군.’

시카르는 귀여운 키안을 보고 방긋 웃으며 주먹치기를 해주었다.


“한 번은 해주지. 하지만, 이런 거 두 번은 안 한다. 손뼉치기, 주먹치기. 앞으로 이런 걸 하려거든…….”

“국왕의 명령이라면?”

“…… 그건 횡포라고 하는 거다.”

이렇게 말하면 알아듣고 더는 권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키안은 전혀 굴하지 않았다.


“그럼 나, 아버지께 횡포 좀 부려야겠다.”

“횡포라니.”

“앞으로는 내가 손바닥 내밀면 손뼉 치고 내가 주먹 내밀면 주먹 치기 하는 거야.”

“……나더러 이 유치한 걸 하잔 말이냐. 아니, 국왕이 하기에도 체면이 말이 아닐 텐데.”

이번엔 또 뭐라고 대꾸할까 싶었더니 키안은 매우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어깨까지 축 늘어트린 모습을 보니 이상하게 마음이 개운하지 않았다.


“알았다.”

키안이 실망한 듯 어깨까지 축 늘어트리고 있는 탓에 마음이 약해진 시카르가 마지못해 한 대답이었다.

그러자 키안은 시카르의 긍정적인 대답을 듣자마자 웃음을 머금으며 기다렸다는 듯 또 주먹을 내밀었다.


“연습.”

우습게도 시카르는 화가 올라오다가도 배시시 웃으며 주먹을 내미는 키안을 보고 있으니 다시 화가 내려가는 것 같았다.

이런 적은 없었는데,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말랑말랑해진 거지?

당황스러울 만큼 순해진 자신의 모습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웃던 시카르는 정신을 차린 듯 다시 정색하는 얼굴로 키안과 주먹을 맞부딪혔다.


 

***

어전회의를 앞두고 시카르는 키안과 점심을 함께했다.

레이독스는 키안의 재상이 되었고, 듀리온은 임시로 궁성수비대장을 맡고 있었다.

비카는 임시로 궁내부장을 맡으며 잘 들리는 귀와 멀리 보는 밝은 눈으로 키안의 주변인들을 감시 중이었다.

믿음직한 인물로 주변을 채우기 전까지만 잠시 맡는 임시직이었다.

특히나 가장 중요한 검열은 키안의 식사였다.


“갑각류는 확실히 제거했겠지?”

“네. 궁내부장님.”

“조금이라도 전하께서 불편함을 느끼신다면 네 목이 달아날 것이다.”

“항상 명심하고 있습니다.”

궁 주방장의 확신을 받고 나서야 비카는 키안에게 식사를 들게 했다.


“이제 드시죠. 전하.”

처음 키안은 그 과정들이 익숙하지 않아서 어색했지만, 이제는 완전히 익숙해져 있었다.

하지만, 비카는 여전히 익숙해 있지 않았다.

점심 식사가 끝나고 키안이 옷을 갈아입는 사이, 비카는 앉아서 서류를 확인 중인 시카르의 곁에 섰다.


“언제까지 궁에 있어야 하는 거야?”

“전하께서 궁 안에 있는 사람들을 자유롭게 부릴 수 있을 때까지.”

“……너무 막연한데?”

“궁의 주인이자 이 레카도르의 주인이라는 게 몸에 완전히 베일 때까지란 말이지.”

“결국, 언제가 될지 모른단 말이잖아.”

“전하를 잘 모셔라. 전하께서 변덕을 부려서 내 저주를 안 풀어줄지도 모르니까. 내 저주가 풀리지 않으면 우리도 맹약도 깨지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겠지.”

“같이 죽자는 소리군.”

그놈의 맹약. 비카는 아주 오랜만에 맹약을 수락했던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내가 이만큼 했으면 이젠 날 놓아줄 때도 됐잖아. 이 양심 없는 공작 놈아!”

“맹약이 깨지면 어디 가려고? 어차피 갈 데도 없잖아.”

“너만 없으면 어디든 갈 수 있지. 자유로운 다크 엘프를 속박시킨 주제에 양심이 없어.”

“그건 자유가 아니라 방종이라고 하는 것이다. 비카. 처음 봤을 때 너는 겁 없이 날뛰는 짐승 새끼 같았다.”

“그거야 당연하지. 겁낼 게 없으니까. 나는 두려울 게 없는 다크 엘프라고. 너 때문에 망했지만.”

시카르에게는 비카의 수다를 들어주는 상냥함은 없었다.


“수다는 그만 떨고 회의 준비나 하지.”

“수다가 아니라 대화라고. 대체 날 언제 놔줄…….”

“예전에 국왕이 네 입에 사탕을 넣어주던 게 떠오르는군.”

비카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키안이 어릴 때 툭하면 제 입에 사탕을 넣어주던 것처럼, 시카르는 지금 사탕이라도 입에 물려야 그 소리를 그만할 거냐고 말하는 것과도 같았으니까.


“정말 이럴 거야? 원하는 대로 다 잘 풀렸잖아. 이젠 날 놓아줄 때가 됐다고 생각하지 않아?”

“알겠어.”

“진짜?”

“대신 키안이 궁 생활에 완전히 적응하고 난 뒤에 해지해주지.”

붉그락푸르락 거리던 비카의 얼굴이 조금은 밝아졌다. 곁에서 지켜본 키안은 영특하고 뭐든 금방 배우는 편이었기에 금세 궁 생활에 잘 적응할 것이 눈에 보였으니까.


“그런 거라면 나도 말 않겠어.”

“대신 키안이 누구라도 잘 부릴 수 있는 군주가 되기까지다.”

“물론이라고.”

비카는 당장 자유라도 얻은 듯 홀가분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이제 각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이만 일어날까.”

어전회의에서 여러 가지 국사가 논의되었는데, 그 중 오늘 가장 중점이 되는 일은 길리언의 처형문제였다.

각료들은 어서 이일이 무마돼야 새로운 왕정의 서막을 알리는 초석을 다질 수 있을 것이라며 내일 당장 처형식을 거행하자고 하였다.

그것은 모두 키안에게 보이는 충성심과 다르지 않았다.

키안은 군주의 위엄을 드높이듯 각료들을 차분히 바라보며 말했다.


“길리언 레카도르는 왕좌에서 밀려난 페군이지만, 과인과는 피를 나는 혈육이오. 그래서 과인은 길리언을 처형하지 않고 유폐시키려 합니다.”

각료들은 갑자기 그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는 듯 눈동자를 굴렸지만, 키안의 양 옆에 서 있는 시카르와 레이독스의 눈치를 살피기만 할 뿐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고 그저 ‘전하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만 대답할 뿐이었다.


‘오늘은 각료들의 기를 조금 살려줘야 해.’

계속해서 눈치만 본다면 귀족들은 점점 숨통이 조여올 것이다. 키안은 권위적인 표정은 내려놓고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공들께서 나를 걱정하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더는 내 자리를 위협할 왕족은 없으니 너그럽게 군주의 마음을 보듬어 주시오.”

독단의 결정이었지만 감정으로 호소함으로써 각료들의 동의를 구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런 키안의 대처는 각료들로 하여금 임금에게 발언권을 부여받은 것과 다르지 않았다.


“다음은, 라페와 다이엔느의 처결입니다. 이들은 어떻게 하면 좋을 것 같습니까.”

“라페와 다이엔느는 내일 당장 처형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시오.”

“네. 전하.”

“그리고 중요한 사안이 하나 더 남았는데.”

오늘 있을 사안에 대해선 이미 다 회의를 끝낸 뒤였기에 각료들은 어리둥절한 얼굴들이었다.


“무엇이옵니까. 전하.”

“나의 아버지이신 블레이크 공작과 나의 어머니이신 블레이크 공작 부인에게 궁전을 하나 내어줄까 하는데 그대들의 생각은 어떠합니까.”

각료들은 이번만큼은 그냥은 넘어갈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인상을 굳혔다.


“그것은 안 될 말입니다.”

“왕족이 아닌 사람이 궁에 들어온다는 건 전례에 없던 일이었습니다.”

레이독스는 기다렸다는 듯 베로니아의 명문서를 보란 듯 탁상 위로 올렸다.


“베로니아 공주 저하께서 보내신 명문서입니다. 이래도 반대하실 생각이십니까?”

각료들은 돌아가며 명문서를 확인하고 더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고…… 공주 저하의 명문서를 확인했으니…… 저희도 동의 하겠습니다.”

이걸 노리고 칭찬을 해주라고 한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었다. 든든한 아버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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