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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화. 푸른 해 (7) (130/197)


130화. 푸른 해 (7)
2022.08.29.



 
장난일 수도 있겠지. 라고 생각했지만 정말 같은 방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있다면 그래도 침대는 두 개라는 것 정도였다. 하지만.


“오른쪽? 왼쪽? 어떤 쪽으로 쓸래?”

어느 쪽을 쓰든 상관없이 두 침대가 붙어 있었다.


“아니, 왜 침대가 붙어 있는 거야?”

시카르는 자신은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로 시치미를 뚝 떼고 있었다.


“글쎄. 하녀들이 붙였나. 누가 붙였지?”

다 알고 있었으면서 시치미 떼는 거 누가 모를까 봐.


“이 방은 누가 꾸민 거야?”

“궁내부장이 지시했지.”

궁내부장이라면 비카가 임시로 맡고 있는 직책이었다. 비카의 성격상 이렇게 방을 꾸몄을 리는 없는데.


“거짓말. 비카 성격상 이렇게 침대를 다정하게 나란히 놓진 않았을 거야.”

그 부분에 대해서는 시카르도 동의했다.


“물론 비카의 성격상 그렇게 하지는 못하겠지. 그래서 내가 대충 원하는 구조를 설명해줬지.”

“그러니까 결국 침대를 나란히 놓은 건 너란 말이네?”

“그렇지…….”

“그럼 바꿔줘.”

나는 매우 당당하게 요구했지만, 시카르는 단 한마디로 내 부탁을 거절했다.


“싫다.”

“왜, 여긴 정령 트랩도 많아서 네가 꼭 내 손을 안 잡고 자도 나 괜찮다고.”

“만약, 누군가가 우리가 사실은 침대도 같이 안 쓰고 떨어져 잔다고 소문이라도 낸다면, 그 소문이 다 누구한테 가지?”

“그야…….”

“우리가 다정하게 한 침대를 쓰는 모습을 보여주진 못해도, 침대를 나란히 붙이는 돈독함은 보여줘야 국왕에게 피해가 가지 않겠지.”

일전에 대신전에서 같은 방을 썼을 때가 떠올라 한숨이 나왔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나와는 달리 시카르는 여유 있는 미소를 지었다.


“우린 부부야. 언제까지 각방을 쓸 생각이야. 이제 키안도 제 위치에 올려놓았으니 우리의 할 일은 다 한 셈이니, 이제 한방을 쓸 때도 되었지. 안 그래?”

그거야 그렇긴 하지만, 나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된 것은 아니었다. 마음의 준비를 하려고 하면, 일이 항상 터지곤 했으니까.

인생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말이 내게는 어쩜 그렇게 잘 적용이 되는 건지. 앞으로 또 무슨 일이 터질지 벌써부터 걱정스러울 정도기도 했다.

그렇다고 아직 나한테 사랑한다는 고백도 안 한 인간과 대뜸 침대부터 쓸 수는 없는 일이지.


“우리가 부부긴 하지만, 엄연히 계약 부부잖아. 네 저주가 풀리고 나면 날 놓아준다고 했던 것 기억하지? 그래서 내 목표는 네 저주가 풀리는 거야. 그때까지 절대 한 침대를 쓰지는 않을 거야.”

“그럼, 그 약속은 취소하지. 맹약도 깨트릴 수 있는데 그깟 약속이야. 얼마든 취소할 수 있다.”

“계약이라는 것은 상호 간의 동의하에 이루어지는 거야. 나는 동의 못 해.”

순조롭게 계획대로 흘러가던 일에 차질을 빚은 듯 시카르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고것 참 고소한 표정이군.


“동의 못 한다니? 그럼 계약이 끝나면 계약을 깨겠다는 말인가?”

“물론이지.”

“어째서?”

“그건, 네가 날…….”

시카르는 몹시도 궁금해서 참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나를 보며 따라 했다.


“내가 널……?”

나는 말을 할 듯 말 듯 입을 뻥긋거렸고 시카르는 온 정신을 집중해서 내 입만 쳐다보고 있었다.

정답을 그렇게 쉽게 알려줄 수는 없지.


“정답은 스스로 알아내야지. 어째서인지 잘 생각해봐.”

시카르는 꽤나 어이가 없다는 듯 나를 보고 말했다.


“문제가 없는데 어떻게 정답을 알아내라는 거지? ‘그건 네가 날.’ 까지만 듣고 무엇을 알아내라는 건지 모르겠군.”

잔뜩 심통 난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을 보니 꽤 통쾌했다.


“힌트 줄까?”

“힌트가 아니라 문제를 정확히 말하도록 해봐. 뭐가 문제야.”

“네가 나에게 아직 하지 않은 말이 있어. 그 말을 하기 전까진 우리 계약은 유효해.”

시카르는 이제야 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니까, 내가 아직 하지 않은 말이 있다는 거지…….”

“그래. 아주 중요한 말이기도 해.”

“그렇다면…….”

많은 생각이 교차하는지 시카르는 한숨까지 쉬며 방 안을 몇 번 왔다갔다 거리다 이제야 생각 났다는 듯 자만한 얼굴로 말했다.


“혹시 이 말을 말하는 건가?”

무슨 말을 할지 기대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다음 말에 꽤나 집중하고 있었다.


“내 아이를 낳아주겠나.”

……역시 괜히 기대했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틀렸어.”

“힌트를 주지.”

“네가 말로는 못 해도 쓸 수는 있는 것을 떠올려봐.”

시카르는 이제야 정말 알겠다는 듯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그것은 그러니까, 사…… 사…….”

드디어 그 말을 듣는 건가? 싶은 순간.


“사람들 오기 전에 창밖을 좀 보지.”

그럼 그렇지. 저 성격에 쉽게 말 할 리가 없겠지. 어차피 기대도 하지 않았다.

밖에 또 뭐가 있길래 밖을 바라보라고 하는 건지.

무심하게 창밖을 바라보자, 공작저에서 본 것과 똑같이 장미꽃이 심어져 있었다.

시카르가 나에게 가시 돋친 장미처럼 조금은 날카로워질 필요가 있다고 심었던 장미꽃이었다.


“공작저에서도 지겹게 본 장미꽃이잖아. 여기서도 가시 돋친 듯 지내라고 심은 거야?”

“내가 심은 게 아닌데.”

“그럼?”

“국왕이 심은 건데.”

키안이……?


“설마…… 여전히 내가 장미꽃을 좋아한다고 생각해서 이걸 심은 거야?”

“이 궁의 이름은 원래 데이지 궁이었다. 하지만, 국왕이 널 위해 장미꽃을 심었지.”

“말도 안 돼!”

나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키안이 날 위해 이런 걸 지시했다니.

너무나도 감동스러워서 마음이 복받쳐 올라왔다.


“그리고 나도 준비한 게 있는데…….”

왠지 그게 좋은 건 아닐 거 같아서 조금은 경계했지만, 의외로 시카르가 내민 건 꽤나 좋은 것이었다.

시카르는 내게 정말 돈다발을 내밀었다.


“이 돈다발은 뭐야?”

“선물.”

“정말 나, 이 돈 다 써도 되는 거야?”

“그래. 생각해봤지. 네가 보석이나 마정수가 아닌 걸 사용하게 된다면 무엇이 좋을까 하고 말이야. 돈이 최고일 것 같더군.”

맞아. 돈이 최고야.

나는 시카르의 시선은 신경도 쓰지 않고 돈을 세는 데에만 집중했다. 자그마치 수표였다. 한 장씩 넘길 때마다 가슴이 설레는 수표 다발.


“그 돈다발을 받고 이젠 좀 마음이 풀어졌으면 좋겠군. 나와 함께 방을 써야 한다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란 말이지.”

“이 돈은 받지만, 그렇겐 못 해. 방은 같이 쓰겠지만, 침대는 분리할 거야.”

“우린 생사를 함께한 몸인데 꼭 그렇게 해야겠어?”

“내게도 절차라는 게 있어. 네가 그 절차를 거부한다면 난 당연히 이렇게 할 거야.”

“그러겠다는 말이지…….”

시카르는 또 무언가를 한참 고민하더니 장미꽃과 돈다발의 감동이 식기도 전에 까맣게 잊어버리게 만들었다.


“그럼 나도 키안에게 사실은 네가 장미꽃을 딱히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해버리겠다는 협박을 쓸 수밖에 없겠군.”

“그걸 이르는 건 협박을 떠나서도 반칙이지.”

“어쩔 수 있나. 지금 내가 쓸 수 있는 게 반칙밖에 없는데.”

맞아. 원래 이렇게 뻔뻔한 놈이었지? 이 미친놈.

아냐. 미친놈은 잘 달래고 길들여야지.


“너 요즘 바쁘잖아. 서재에서 자야지.”

“나 안 바빠.”

시카르는 갑자기 재킷을 벗기 시작했다.


“재, 재킷은 왜 벗어?!”

“새벽부터 귀중품을 챙기느라 너무 피곤하군. 낮잠 한 숨자고 키안과 같이 점심을 먹는 게 좋겠는데. 오늘 밤에 당장 이 침대를 써야 하니, 낮에 함께 누워보는 것도 좋겠지.”

“난 안 졸려.”

“내가 재워 주지.”

시카르는 내 어깨 뒤로 손을 내밀며 나와 함께 침대로 누웠다.


“편하지?”

“아니. 불편해.”

내가 불편하다고 해도 시카르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네가 모르는 것 같아서 하나 알려주는데 요즘 내가 밤마다 네 손 잡고 잔 건 알고 있나?”

그건 알고 있었다. 아침에 잠에서 깰 때마다 시카르가 내 손을 꼭 잡고 있었으니까.


“알고 있어. 그래서 왜?”

“그 덕분에 내가 간혹 침대에 올라가곤 했었지.”

“나한테 허락도 안 받고 내 침대에 올라왔다는 말이야?”

“오해하는군. 내가 올라간 게 아니라, 네가 몸부림치는 바람에 올라갈 수밖에 없었단 말이다.”

“좋아. 거기까진 그렇다고 쳐, 하지만, 여기서는 그러지 않아도 돼. 여긴 정령 트랩이 충분해서 내가 악몽을 꾸진 않을 거니까.”

실제로 원작에서 악몽에 시달리던 키안이 궁으로 들어오고 나서는 정령 트랩들 덕분에 악몽을 꾸지 않았으니까 나도 괜찮을 것이다.


“그래서 침대를 같이 쓰겠다는 건 아닌데.”

“그럼 왜 침대를 같이 쓰겠단 거야. 난 불편해.”

그 순간, 시카르는 상체를 일으키며 다정한 손길로 내 머리를 매만졌다.


“사랑하니까.”

사랑…….

방금 사랑, 뭐라고 했냐고 다시 되묻고 싶을 만큼 낯설고 감미로운 말이 내 귓가에 공명했다.


“너 지금 사…….”

“사랑한다고.”

나를 향해 다정하게 미소지으며 사랑한다고 속삭이는 눈빛에 마음이 거세게 요동치며 나 또한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사랑한다는 말을 몇 번이나 되뇌는 동안 시카르는 다시 말했다.


“사랑해.”

그는 내게 사랑한다고 속삭이며 입을 맞춰왔다. 저절로 두 눈이 감기었다.

맞잡고 있는 두 손을 깍지 끼우며 부드럽고도 따스한 입술이, 촉촉한 감각이, 달콤하고 감미로웠다.

뜨거운 숨결이 스며들며 따뜻한 체온이 덮쳐왔다.

눈물이 날 만큼 감격스럽고 가슴 벅차오르는 말. 사랑해.

한 번 터져 나온 말은,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쉴 새 없이 쏟아졌다.


“사랑해. 사랑해.”

 

 
허리를 끌어안고 있는 손이 다시 거세게 조여오며 내게 계속해서 말하고 있었다.


“사랑해.”

그 말이 너무 좋아서, 너무 달콤해서, 너무 행복해서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내 눈물을 닦아주던 시카르는 또다시 내게 입을 맞춰왔다.

이른 오후 햇살이 쏟아지는 둘만의 방에서, 둘만의 침대 위에서 우리는 사랑을 속삭였다.


“이제 계약 결혼은 해지해주는 거지?”

바로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해주긴 싫어서 대답하지 않고 그의 얼굴만 말똥말똥 보고 있자니, 또다시 그는 입을 맞춰왔다.

마치 계약을 해지하겠다는 소리를 들을 때까지 키스를 하겠다는 몸짓 같았다.

진한 키스를 나눈 후 또다시 시카르는 내게 물었다.


“이제 계약 결혼은 해지해주는 거지?”

나는 마지못한 듯 그의 시선을 외면하며 대답했다.


“그, 그래.”

“침대도 같이 쓰는 거지?”

나는 대답 대신 머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해. 그러니까 절대 내 앞에서 사라지면 안 돼. 알았지?”

사라지지 말라는 말이 너무 뜬금없이 들렸다.

그래서 난,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나중에서야 시카르가 무슨 심정으로 그 말을 한 건지 알 수 있었다.

그가 기를 쓰고 나와 한 침대를 쓰려고 한 이유까지도…….

그에게 내가 얼마나 큰 의미인가도.

모두 나중에서야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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