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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화. 푸른 해 (8) (131/197)


131화. 푸른 해 (8)
2022.09.01.


그 시각, 공작저에서 온 하녀들은 궁전의 놀라운 위용에 크게 감탄하고 있었다.

메이리도 자신이 쓸 방에 들어가서 각각 감탄하며 궁전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실감할 수가 있었다.


“우리가 정말! 궁전으로 오게 되다니!”

“살다 살다 궁전까지 오게 될 줄이야!”

그나마 하녀장인 안드레아만큼은 침착을 유지하고 있었다.


“천장이 높아 더 웅장해 보이는 것이니 호들갑은 그만 떨도록 해라. 너희들이 할 일은 공작님과 마님의 체통을 위해 매일 궁전을 반짝반짝 윤이 나게 문지르고 닦는 일이다. 조금이라도 게을리 일한다면 바로 쫓아내겠다. 알아들었느냐?”

안드레아의 절도 있는 으름장에 잔뜩 들떠 있던 하녀들은 금세 차분해졌다.


“죄송합니다. 하녀장님.”

“명심하겠습니다. 하녀장님.”

한편, 비카에게 탑층 방을 빼앗긴 듀리온은 공작저가 편하다며 투덜거리는 중이었다.


“여긴 정말 불편해.”

“난 네가 불편해. 내 방에서 그만 투덜거리고 네 방으로 좀 가주지 않을래?”

“너도 공작저가 더 편하지 않아?”

“아니. 여기가 정령 트랩이 많아서 훨씬 편해. 진작 이런 곳에서 살았어야 했는데. 역시 관리자가 많으니까 트랩도 매일 교체가 되고, 왜 다들 궁에 오고 싶어하는지 알겠다니까.”

“너 정령 잡아먹는 거 좋아하잖아. 그럴 땐 너 참 흉물스러운데.”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제거하기가 편하니까 그렇게 하는 거야. 바보 녀석아.”

“그랬던 건가?”

“그래.”

듀리온은 에라 모르겠다는 듯 비카의 침대에 드러누웠다. 하지만 듀리온의 만행을 호락호락 내버려 둘 비카가 아니었다.


“어딜 누워?! 당장 안 내려와?!”

“그냥 나 여기서 같이 지내면 안 되냐?”

그 말은 비카에게 경기를 일으키게 하고도 남을 말이었다. 비카는 못 들을 소리를 들었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미, 미쳤어?! 어차피 나 곧 떠나면 그때 네가 이 방 쓰면 될 거 아냐?!”

태평하게 드러누워 있던 듀리온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떠난다고?!”

“그래.”

“언제 떠나는데?”

“국왕이 궁 생활에 익숙해지면 그땐 떠나도 된다고 했어.”

“아…….”

듀리온 답지 않게 뭔가를 알겠다는 말투가 비카는 거슬렸다.


“뭐야? 그 말투는?”

“생각해봐. 도련님. 아니, 전하께서 궁 생활에 익숙해진다고 하면 그게 몇 살이실 때겠어?”

“몇 살이긴. 우리가 곁에서 보필하는데, 금방이지. 적어도 내년이면 될걸?”

“아닐걸.”

“왜 아니라는 거야.”

“국왕 전하께서 몇 살이시냐. 이제 열 살이신데 성인 되려면 아직 7년은 남으셨다고. 못해도 15살은 돼야 좀 크실 텐데. 그전에는 궁 생활에 적응됐다고 말하기 힘들지.”

비카는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그, 그럼…….”

“전하께서 안정된 국사를 보려면 못해도 5년은 걸릴걸.”

“시카르 블레이크! 또 나한테 사기 쳤어!”

“뭐야? 비카. 나한테 맨날 멍청하다고 놀리더니 나보다 더 멍청했네. 140살이 그렇게 앞을 내다볼 줄 몰라서 되겠어?”

“내가 인간들의 습성을 어떻게 알아?!”

“그냥 원래대로 저주가 풀리면 맹약을 깨자고 해.”

비카는 시카르를 떠올리며 제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 망할 공작놈!”

“네가 내 말을 잘 들으면 내가 공작님에게 잘 말씀드릴 수도 있어.”

“네 말? 무슨 말?”

“먼저 이 방부터 내게 양보해. 그럼 내가 잘 말해줄게.”

비카는 듀리온의 생각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너 지금…… 이 방도 빼앗고 나를 부려먹기 위해서 저딴 소리를 한 거군? 나를 바보 취급한 건가? 듀리온?”

비카의 주변에서 정령들이 스멀스멀 모이기 시작했고, 놀란 듀리온은 벌떡 일어섰다.


“비카! 지금 이럴 때가 아니야. 넌 오늘 각료회의 내용을 보고 해야지! 난 그럼 이만.”

듀리온이 방을 빠져나감과 동시에 검은 기운을 가득 품은 비카가 그를 따라나섰다.


 

***

시카르에게 안겨 있다 보니 정말 신기할 만큼 편안한 낮잠을 취했다.

한낮의 낮잠은 한없이 달콤하기만 했고 우리는 그 달달한 낮잠에 취해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화들짝 놀라 깨어났다.


“어머니!!!”

바로 복도에서부터 들려오는 저 소리 때문에.

나는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났지만 시카르는 아직 편안한 낮잠에 빠져 있었기에 나는 본능적으로 그를 밀어 침대에서 밀어트렸다.

쿵 소리가 나긴 했지만, 내 알 바가 아니었다.

지금 키안이 이 방으로 오고 있단 말이다!


“어서! 일어나! 전하께서 오고 있다고!”

아이에게 이런 흐트러진 꼴을 보일 수는 없었던 탓에 나는 얼른 머리를 단정히 하며 허리를 붙잡으며 일어나고 있는 시카르의 머리도 단정히 빗겨 주었다.


“나 어때?”

“예뻐.”

“아니, 그거 말고. 지금 내 상태가 어떠냐고!”

“아름다워.”

말을 말자.

나는 적당히 심호흡한 뒤 키안이 도착하기 전에 먼저 방문을 열었다. 그러자 계단을 올라오는 키안의 모습이 보였다.

키안은 나를 발견하고는 환하게 웃으며 내게로 달려왔다.


“어머니!”

“어서 오세요. 전하!”

우리는 깊은 포옹을 하였고 시카르도 나와서 키안을 함께 안았다.


“오셨습니까.”

“어머니. 너무 보고 싶었어요! 이 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요. 이제는 매일매일 볼 수 있겠죠?”

“물론이죠.”

“매일 아침마다 인사도 오고, 매일 아침을 어머니와 함께 식사해도 될까요?”

키안은 그래도 되냐는 듯 시카르를 쳐다보았고 시카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키안은 깊고 크게 심호흡을 하며 나를 껴안았다.


“어머니 이제 아침마다 함께 식사도 할 수 있어요! 너무 좋아요!”

“저도 너무 좋아요.”

키안과 나는 서로의 볼을 비비며 볼 키스를 했다.

우리를 빤히 보고 있던 시카르는 어정쩡하게 고개를 숙여 같이 볼을 맞대었다.


“참, 절 위해 정원을 온통 장미꽃으로 물들여 놓으셨더군요!”

“네. 어머니.”

“전하…….”

“마음에 드세요?”

“어떻게 마음에 안 들 수가 있겠어요. 전하께서 직접 마련해주신 건데요.”

“어머니가 좋아해 주셔서 너무 행복해요.”

키안의 행복한 미소를 보니 나도 절로 행복해졌다.


“식사하고 전하의 방도 구경시켜줄래요?”

“안 그래도 어머니께 방을 구경시켜 드리고 싶었어요.”

여태까지 키안이 내게 그냥 하는 말을 본 적이 없었다. 역시나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식사 후 키안은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방을 구경시켜주었다.

키안의 방에는 오래전 시카르가 만들어 준 드림캐처와 우리가 함께 만들었던 학 종이, 그리고 말린 로즈마리와 장미꽃 또한 그대로 침대맡에 있었다.

다른 건 다 보기 좋았지만, 그중 침대에 걸려 있는 드림캐처가 유독 마음에 걸렸다. 혹시나 아직도 간혹 악몽을 꾸는 건 아닌지 걱정되기도 했으니까.


“설마 요즘도 악몽을 꾸는 건 아니죠?”

키안은 시카르를 보며 낮게 에헴, 이라고 한마디 하며 나를 향해 말했다.


“이건, 아버지가 준 선물이라 이렇게 간직하고 있을 뿐이에요. 어머니.”

너무나 큰 감동이 아닐 수가 없었다. 궁에 들어와서도 우리가 함께한 일들을 여전히 모두 잘 간직하고 있으니까.


“공작저에 있던 제 방이 더 좋았어요. 이 방은 너무 넓고 공허해요. 그래도 어머니와 매일 함께 잠들었을 때를 떠올리며 버텨요.”

나는 키안의 방 침대에 엉덩이를 거치고 싶었지만, 이젠 신분이 국왕인지라 그럴 수가 없었다.

우린 모두 키안의 방 소파에 나란히 앉아있었고, 레이독스가 손수 우리에게 밀크티를 가져다주었다.


“어, 레이독스님.”

레이독스는 차분하게 웃으몀 말했다.


“궁내부장님께서 입궁 문제로 자리를 비우셔서요.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시카르의 말로는, 아직은 궁 안에 우리의 사람이라고 확실히 믿을 수 있는 자들이 별로 없으니 모든 시중을 비카가 들거나 비카가 없을 땐 재상인 레이독스가 대신 하는 중이라고 했다.

또, 궁내부에 자잘한 모든 일들은 제르미와 로엔이 맡아서 해주는 중이라고 한다. 다들 얼마나 바쁜지 얼굴이 보기 힘들 정도였다.

그래서 비카가 요즘 툭하면 ‘내가 140살이 넘어서 인간 아이의 시중이나 들고 있다니…….’란 말을 달고 살았지만, 키안의 앞에서는 인간세계의 신분제도를 엄격히 따라주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무서운 맹약의 힘이겠지만.

나는 레이독스가 내어준 밀크티를 마시며 키안을 바라보았다.


“어전회의는 어때요? 이제 익숙해진 것 같아요?”

“스승님과 이전에 담론을 많이 나누었는데 그게 정말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스승님께서 이런 날이 올지 알고 그런 모의 학습을 많이 시켰나 봐요.”

“오늘 어전회의는 무슨 내용이었어요?”

“리하트에서 작년부터 비가 오지 않는다고 해서 거기서 기우제를 언제 지내야 하는지에 대해서 의논했구요. 아 그리고 블레이크에서 어떤 평민이 저택을 갖고 있다고 해서 평민이 돈이 많다는 이유로 귀족처럼 저택을 가져도 되느냐를 두고 가장 많은 얘기를 나누었어요. 그리고…….”

키안은 거기까지만 얘기하고 부끄럽다는 듯 시카르를 쳐다보다가 볼을 긁적였다.


“왜 그래요? 말해보세요.”

“그……러니까, 그게.”

시카르는 왜 그걸 말 못 하냐는 듯 키안을 보다가 답답하다는 듯 대신 말했다.


“전하의 약혼문제가 가장 큰 사안이 되었지.”

키안은 정말 귓볼까지 벌게질 정도로 고개를 푹 숙였다.

나는 그런 키안이 너무 귀여워서 웃고 싶었지만 웃을 수가 없었다.

아, 이래서 말을 못 했구나. 너무 귀여워. 어떡하면 좋아.

나는 웃음을 겨우 참고 키안을 향해 미소지었다.


“우리 전하께서 이제는 여자를 만날 때도 되었죠.”

물론 진심은 아니었다. 다만, 왕자의 신분일지라도 열 살이면 약혼녀를 얻어야 하는 마당인데 국왕의 자리라면 결혼을 해도 이상하지 않을 위치였기 때문에 한 말이었다.

하지만 사가에서 자란 키안에게는 깜짝 놀랄 일이었다. 키안은 붉어진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니에요! 어머니! 저는 여자라곤 어머니밖에 몰라요! 정말이에요!”

그러니까 더 귀엽잖아.

나는 귀여움을 감당하지 못해 눈물이 날 것 같은 심정을 꾹 참으며 말했다.


“알고 있어요. 하지만, 국왕의 자리에 있는 만큼 결혼을 서두르셔야 해요. 그러려면 어서 약혼을 하셔야겠죠.”

그리고 주인공 루시에게 운명적으로 끌릴 수밖에 없을 테니. 루시로 결정이 날 것 같은데.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약혼자 후보는 결정됐어요?”

“몇 명이 올라오긴 했는데…… 루시는 없었어요.”

루시가 없어서 애석하다는 건가? 하지만 그대로 말하면 절대 아니라고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은근슬쩍 돌려 물었다.


“루시가 왜 없었을까요. 루시가 기상이 씩씩하고 강단이 있는 게 왕비의 자질이 넘치는 것 같은데.”

키안은 내 말이 꽤 마음에 들었던 모양인지 밝게 웃으며 두 눈을 크게 떴다.


“그쵸? 어머니? 저도 루시만큼 그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아요. 루시가 사나워 보이지만 그건 모두 카리스마거든요. 어린 여자아이가 그런 카리스마를 갖기란 어려운 일이잖아요.”

역시. 키안은 다른 후보들은 하나도 눈에 안 들어오고 오직 루시만 보이는 것 같았다.

여주인공이니까 당연한 이치인 거지.


“공작님. 어떻게 생각하세요?”

“뭘 말입니까.”

“전하의 약혼자 후보에 루시도 포함시켜주면 어떨까 해서요.”

시카르는 내가 어떤 의도로 이런 질문을 하는지 훤히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시카르는 나를 보며 피식 웃고는 대답했다.


“이미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부인.”

“옳은 판단이십니다. 공작님.”

키안은 아직 얼굴이 빨개져 있었지만, 기분이 좋은지 슬쩍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전하. 그거 기억해요?”

“어떤 거요?”

“여름이 오면 같이 해변에 가기로 한 거 기억해요?”

“네. 어머니. 예전에 아버지가 출정에서 돌아오시면 같이 가기로 했었죠.”

“우리 이번엔 꼭 같이 가요. 전하의 약혼자와 함께 말이죠.”

“정말 이번엔 가는 거예요? 갈 수 있는 거예요?”

시카르는 자신도 이제 생각났다는 듯 멍한 표정을 짓다가 미소를 지었다.


“이번엔 꼭 가죠. 태풍이 몰아치더라도 반드시 가고 말 테니까.”

“와. 루시도 수영 한 번도 안 해봤다고 그랬는데, 정말 재미있겠어요.”

키안은 거기까지 말해놓고 아차, 싶은지 입을 다물었다.

이거, 이렇게 루시를 신부로 맞이하고 싶다고 속마음을 다 밝히는군.

이런 모습까지도 얼마나 귀여운지 나와 시카르는 키안을 보며 활짝 웃었다.

물론 키안은 다시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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