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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화. 푸른 해 (9) (132/197)


132화. 푸른 해 (9)
2022.09.05.



 
키안의 일정은 꽤 빡빡했다.

아침식사 후 어전회의가 있고 점심을 먹고 난 뒤, 또 어전회의가 있고, 어전회의가 끝나고 나면 훈련이 있고, 저녁을 먹고 나면 책을 읽다 잠이 든다고 한다.

그 시간이 내가 가장 보고 싶은 시간이라고 했다.

이젠 옛날처럼 보고 싶다고 옆에 끼고 있다간 유약한 왕이라 놀림 받기 십상일 테니까.

그래서 키안과는 점심만 간단히 먹고 보낼 수밖에 없었다.

새끼 잃은 짐승처럼 허망하게 앉아 있는 날 보며 시카르는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가서 국왕을 데려오지.”

“큰일 날 소리야. 이제 더는 품 안의 자식이 아니라고.”

“그걸 알고 있다면 너도 마음을 좀 비워 보는 게 어때.”

마음이란 게 그렇게 마음대로 쉽게 되면 진작 비웠겠지.


“쉽지 않아.”

“관심을 다른데 돌리면 마음 비우기가 훨씬 쉽겠지.”

“관심을 다른데 돌리라고?”

시카르는 갑자기 팔을 걷어 올리더니 셔츠 단추를 하나 풀며 카라깃을 옆으로 세웠다.


“우리 아이를…….”

나는 시카르가 더 말을 하기 전에 검지로 그의 입술을 눌러버렸다.

나의 난데없는 제동에 시카르는 두 눈을 끔뻑거리며 보다가 내 손을 치웠다.


“내 말은 아직 안 끝났…….”

‘우리 아이를’ 까지 나왔다면 우리 아이들을 갖자는 말일 게 뻔했다. 나는 또다시 검지로 그의 입술을 누르며 말했다.


“시기상조야.”

그래도 조금은 말이 통했는지 시카르는 내 말에 수긍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검지를 누르고 있던 내 손을 잡았다.


“그렇지. 아직은 시기상조지. 우린 아직 아이를 가질 일을 벌이지 않았으니까. 그럼 오늘 밤부터 아이를 가질 절차를 마치면 되겠군.”

“아, 아니. 그 말이 아니야. 아직 푸른 해가 안 떴다는 말이야.”

“아. 푸른 해.”

원작에서 키안이 왕이 된 후 일주일 후에 푸른 해가 떴다. 푸른 해는 초대 왕이 레카도르를 건국한 후에 떠오른 해였다.

그 이후로는 한 번도 푸른 해가 뜬 적이 없었지만, 주인공 키안이 왕이 되고 일주일이 지나 레카도르에 푸른 해가 떠올랐다.

그래서 백성들은 키안을 향해 푸른 왕이라 칭송했다. 초대 대왕은 레카도르에서 성군이 태어나는 날 또다시 푸른 해가 떠오를 것이라 예언하며 태평성대가 올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레카도르에서 푸른색이 주는 의미는 희망이었다.

그런데 일주일이 넘도록 푸른 해가 떠오르지 않고 있어서 조금 불안했다. 키안이 아직 어려서 해가 뜨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이야기가 바뀌어서인지 알 수 없었으니까.

시카르는 동의 못 하겠다는 표정이었다.


“그것과 우리가 무슨 상관이지?”

“자식이 잘 되는 것을 먼저 기다려주는 게 부모라고 생각하니까. 키안이 친자식이라고 생각해봐. 우린 전혀 둘째가 급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거야.”

“이미 키안은 잘 된 것 아닌가?”

“지금 키안이 가진 모든 것들은 원래 원작대로의 이야기일 뿐이야. 우리가 해 준 게 하나도 없다고. 그런데 푸른 왕이란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된다면 그건 우리 탓이라고.”

시카르는 내 말에 고민하는 듯 있다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의 말이 맞아. 원래의 위치를 조금 더 빨리 찾게 한 것뿐. 정작 우리가 해 준 건 하나도 없지. 하지만, 난 그래도 이것과 그건 별개의 문제 같은데…….”

“별개는 아니지. 키안이 아직 푸른 왕 소리를 듣지도 못했는데 동생이 생기게 할 수는 없어.”

곰곰이 내 말을 되씹듯 생각하던 시카르는 갑자기 자신의 인중을 몇 번 긁적였다.


“그렇다면 푸른 해가 뜨면 동생을 곧장 가져도 된다는 말이 되겠군?”

슬쩍 기대하는 듯 미소짓는 얼굴이 귀여웠다.

행복한 상상이라도 하는 듯 입꼬리를 씰룩이는 모습이 강아지를 연상하게 했다.

그때쯤이면 뭐, 괜찮겠지.


“아마도.”

“그런 막연한 대답 말고 난 확실한 대답을 원해.”

“그때쯤이면…… 나쁘지 않겠지.”

시카르는 또다시 해맑게 헤벌쭉 웃었다. 저렇게 웃는 모습을 몇 번 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그 표정이 너무 신기해 조금 멍하니 보고 있자, 그는 금세 본래의 무심한 얼굴로 돌아와서는 말했다.


“들어와라. 비카.”

밖에 비카가 있었구나. 그래서 저렇게 금세 표정이 굳어진 건가.

시카르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비카가 볼을 긁적이며 들어왔다.


“아이 갖는 얘기를 너무 진지하게 하고 있길래. 방해하면 안 될 것 같아서 서 있었지.”

저 밝은 귀로 우리의 자녀 계획을 들었다고 생각하니 민망해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들어오세요. 비카 님. 제가 비켜드릴 테니 대화 나누세요.”

내가 나가려 하자, 시카르가 내 팔을 붙잡았다.


“부인이 있어도 상관없어. 그래. 각료회의 내용은 뭐였지?”

아니, 내가 상관있다고!

하지만 이 두 사람은 정말 내가 있어도 전혀 상관없다는 듯 나에게는 전혀 신경 쓰지도 않고 있었다. 병풍 수준도 안 됐기에 나간다고 유난 떠는 대신 조용히 다시 자리에 앉았다.

대충 내용을 들어보니 각료회의 내용을 비카가 시카르에게 보고하고 있었다.

요즘 시카르가 전권을 맡고 있으니 이런 식으로 보고를 듣는 모양이군.


“참, 안 그래도 각료회의에서 공작의 2세 문제를 두고 얘기 중이던데.”

우리 2세 문제?

시카르도 그랬겠지만, 나도 상당히 의외였다.


“왜 우리의 2세 문제가 각료회의에서 거론됐을까?”

“두 사람 사이에서 2세가 태어난다면, 국왕에게 위협이 될 수도 있으니 2세가 생기면 왕궁을 나가는 게 법도에 맞다고 얘기들 하던데.”

그건 각료들이 모르고 하는 소리지. 우리가 반역을 꾀하거나, 만약 우리의 2세가 반역을 꾀하려는 흑심을 품고 있다면 결코 온기를 읽는 키안을 속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사실을 안다면 그런 말을 못 하겠지.

시카르도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신경 쓰는 표정은 아니었다. 하지만 결코, 이해해주지도 않을 요량이었다.


“그렇게는 못 하지. 키안과 유라가 서로를 얼마나 그리워하는데. 그렇게 또 떼어 놓을 수는 없지. 그리고 우리의 2세가 위해가 된다고 느낀다면 국왕이 가장 먼저 알아볼 것이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줄 모르는 것들이 우리를 걸고넘어지려 하는군.”

비카는 심드렁한 눈으로 턱을 괴며 시카르를 쳐다보았다.


“국왕이 클 때까지 아이를 갖지 못하게 하는 거에 화난 것처럼 보이는데?”

“당연히 화나는 일이지.”

시카르의 손이 또 허리춤을 향했다 말았다 하는 것을 보니 내가 없었다면 당장 칼이라도 빼 들고 각료회의장으로 갔을 기세였다.

이렇게 화내는 모습을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화난 얼굴로 허리춤에 손을 가져가고 있는 시카르의 박력 있는 모습에 나는 잠시 넋을 빼앗겼…… 이런 모습을 보고 멋있어하다니.

어쨌든 내가 나설 일은 아니었다.


“누가 그런 소리를 하고 있지?”

“윈터 백작이. 하멜 백작도 끼어 있더군.”

“그 쥐새끼 같은 놈들. 아무래도 죽여 버려야겠군.”

참은 것도 없는 시카르는 더는 못참겠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가 없으면 저 어린 왕을 등에 업고 제 세상처럼 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물론 시카르가 그 칼로 귀족들을 바로 처단하진 않겠지만, 키안이 왕으로 있는 궁에서 함부로 귀족들을 겁박하게 둘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시카르를 말리기 위해 그를 따라 일어섰다.


“안 돼. 그 칼 내려놓고 나중에 좋게 말로 해.”

“말로 좋게 해서 들을 놈들이면 그딴 소리도 하지 않았겠지. 지금 질서를 잡아 놓지 않으면 기회가 올 때마다 정세를 잡으려 할 놈들이다.”

“그렇다고 칼을 휘두르면 국왕에게도 좋지 않아. 무력을 쓰는 방법은 아니야. 그러니까 칼은 이리 줘.”

시카르는 칼을 냉큼 내어주진 않았지만 내 말을 무시하지도 않았다. 그는 고민하는 듯 나를 보고 서 있다가 말했다.


“그럼 칼은 휘두르지 않고 들고만 있겠다.”

“그게 그거야. 네가 칼을 옆구리에 차고 노려보기만 해도 칼로 겁박하는 것처럼 보이니까.”

“제 놈들이 지은 죄가 있으니 내가 칼을 들고만 있어도 겁박으로 보이는 것이겠지.”

“지금은 아니야. 기회를 좀 더 보는 게 좋아.”

“기회는 무슨. 그런 것들에게 기회를 줄 필요는 없다.”

“시기적절하지 않아. 지금 가서 뭐라 하면 아들을 등에 업고 네가 국정을 좌지우지한다고 할 뿐이라고. 국왕을 생각해야지.”

“그렇게 말하는 놈들을 모조리 죽여버리지.”

그런 놈들을 모조리 죽여버리자는 말이 썩 마음에 든다는 듯 비카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거 괜찮겠군.”

세상이 바뀌어도 이분들은 남의 이목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군.


“비카 님, 실례지만, 자리 좀 비켜주시겠어요? 공작님과 할 얘기가 있어서요.”

비카는 끼기 싫은 인간들 일을 피해 자리를 비킬 수 있다는 사실에 만족하듯 일어섰다.


“마님께서 원하시니 난 이만 나가야겠군. 즐거운 대화 나누시길요.”

꽤 홀가분했는지 비카는 폴짝거리기까지 하며 뛰어나갔다.

비카가 나가자 시카르는 시큰둥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무슨 말을 하려고 비카를 내보낸 거지?”

“잘 들어봐. 이제 국왕도 자신의 위치를 찾았고 우리는 궁으로 들어와 살 수 있게 됐어. 모든 게 우리가 목표한 대로 잘 된 거야. 아니, 그보다 더 잘 됐지. 그러니 그렇게 날 세울 필요는 없어. 그들의 말대로 2세가 생기면 우린 궁을 나가주면 돼. 그게 국왕을 위한 일이라면 난 그럴 수 있어.”

하지만 시카르는 내 말에 동의할 수 없다는 듯 물끄러미 보다 말했다.


“큰 장애물 하나 넘었다고 모든 것이 순탄해지는 것은 아니지.”

“물론 귀족들이 우리의 2세도 축하해주면 좋겠지. 하지만 너도 알잖아. 왕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만약 우리가 그들에게 우리의 아이를 인정해 달라고 해야 한다면, 그건 우리에게 그만한 명분이 생겼을 때나 가능한 일이야. 그러니 지금은 우리가 수긍해줘야 해.”

시카르는 또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짙은 한숨을 내쉬며 허리에서 칼을 치웠다.


“그래. 그 부분은 부인의 생각이 현명한 것 같군.”

그 순간 시카르가 꽤 기특해 보였다. 본래 타고난 성격이 저돌적 인간형이었던 그가 내 말을 듣고 제 손으로 칼을 놓았으니까.

이렇게 말을 잘 들으면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잖아?!

시카르는 내 손을 잡고 의자에 앉아 등을 기대었다.


“이상해.”

“뭐가?”

“부인의 말을 듣고 나니 기분이 좋아졌어.”

“어어? 그래?”

남 말을 듣지 않는 성격인데 내 말을 듣고 기분이 좋아졌다니. 놀라운 변화다.

시카르는 두 눈을 지그시 감으며 계속 말했다.


“이거, 아무래도 나…… 애처가가 되려는 모양이군.”

“애처가는 너보다 더 말 잘 듣거든.”

“나도 그런 조짐이 없지 않아 있는 것 같단 말이지. 하지만 난 잡혀 살진 않을 테니 각오 단단히 해야 할걸.”

“그래? 난 잡혀 사는 남자가 좋은데. 그럼 넌 내게 사랑받는 남편은 되지 못하겠다.”

 
시카르는 전혀 예상 밖의 말을 들은 얼굴로 멀거니 나를 보다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하지만, 난 마음이 넓으니 잡혀 살아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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