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푸른 해 (10)
(133/197)
133화. 푸른 해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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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화. 푸른 해 (10)
2022.09.08.
마음이 넓어서가 아니라 내 협박이 무서워서겠지.
하지만 난 구태여 그 말은 하지 않고 시카르와 손을 잡은 채 두 눈을 감고 있었다.
그가 마음이 편하다고 해서였을까? 왠지 내 마음도 편안해졌다.
“부인의 말대로 오늘은 궁에 얌전히 있는 게 좋겠군. 오늘은 궁에 들어온 첫날이니까.”
“내가 살던 곳에 이런 말이 있어. 아내 말을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
“어른 말을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겠지. 나도 부인이 사는 곳의 속담을 알고 있다.”
기억력까지 좋으니 나보다도 더 정확하게 알고 있구나.
그러고 보니 궁에 온 뒤로 시카르가 내게 꼬박꼬박 부인이라는 호칭을 쓰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이건 또 무슨 변화지?
“저기, 시카르.”
“응?”
“이곳에 와서 내게 꼬박꼬박 부인이라고 하는 이유가 뭐야?”
“그렇게 부르는 게 마땅한 거니까. 그러니 부인도 앞으로 내게 꼬박꼬박 여보라고…….”
“공작님이라고 할게.”
시카르는 여보 소리가 듣고 싶었는지 실망한 얼굴로 나를 보며 말했다.
“예전에 우리 계약할 때도 ‘여보’라고 부르기로 했는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불러준 적이 없었다.”
나는 헛기침을 몇 번 하고 일어났다.
“짐 정리를 덜 끝낸 거 같아서 난 이제 정리 좀 해야겠어.”
“짐 정리는 하녀들이 하는 것이지. 참, 헤르시아에게 시녀가 되어달라고 부탁해봤나?”
“아직 못 했어. 이제 궁에 들어왔으니 말해봐야지. 근데, 난 서연 님도 괜찮을 것 같기도 한데.”
“서연은 쌍둥이들 때문에 거절할 것이다. 그리고 왕실의 예법은 헤르시아가 더 잘 알 테니 쓰려면 왕실 예법을 잘 아는 사람을 써야겠지.”
그렇긴 하다. 헤르시아와 친해지긴 했지만, 서연의 존재를 알고 난 후엔 그녀가 너무 편해서 나도 모르게 그녀를 원했던 모양이었다.
“여러모로 헤르시아를 쓰는 게 좋겠어. 간혹 모비아트 가문의 처결도 거론하는 작자들이 있으니까. 헤르시아가 부인의 시녀가 된다면 더는 그 일에 대해 따질 놈들이 없어지겠지.”
“아직도 그런 사람들이 있구나.”
“뭐든 하나라도 걸리면 그걸 물어서 공을 세우겠다는 심산이지.”
왕이 어리다고 다들 야망에 눈이 돌아 있는 건가.
“참, 길리언은 어떻게 할 생각이야? 계속 감옥에 둘 생각이야?”
“안 그래도 오늘은 길리언을 만나볼 생각이었다. 놈과는 할 말이 남아 있거든.”
“할 말?”
“놈이 내게 던진 미끼가 있는데 오늘은 물어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시카르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검지로 내 볼을 살짝 쓸었다.
“아무튼, 다녀올 테니 먼저 씻고 있도록.”
씻고 있으라는 말이 묘하게 야하게 들린 탓에 나는 발끈하고 말았다.
“씻긴 씻을 건데 그걸 네가 왜 챙겨.”
“욕실이 하나라서. 부인이 먼저 씻어야 내가 씻을 수 있어서 한 말인데, 무슨 엉큼한 생각을 한 거지?”
맞는 말이었다. 그래서 나는 금세 민망해진 탓에 목소리가 줄어들었다.
“아니, 난, 내 말이 그 말이라는 거였어.”
“흠. 매우 뭐라고 한 것처럼 들렸는데?”
“오해야. 오해. 바쁠 텐데 어서 나가 봐.”
시카르는 나를 두고 가려니 신경이 쓰이는지 곧장 나가지 않고 서 있다가 말했다.
“심심하면 부티크에 카탈로그라도 갖다 달라고 해서 쇼핑이라도 해.”
“카탈로그?”
“여긴 레카도르니까 부르기만 하면 부티크에서 갖다 줄 거야. 아니다. 내가 안드레아에게 말해놓지.”
쇼핑이라……. 쇼핑은 좋은 것이지. 하지만, 궁에 들어오자마자 부티크 직원들을 불러 쇼핑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좋진 않겠지.
“아, 아냐. 됐어. 지금은 시기가 좋지 않아. 키안의 왕모가 쇼핑과 사치를 즐긴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도 있잖아. 쇼핑은 나중에 할게.”
“눈치 볼 필요 없어. 지금 부인은 이 레카도르의 최고 권력자니까. 국왕의 어머니보다 더 큰 권력자는 없는 법이지.”
“그렇다면, 난 그 권력을 국왕을 위해 쓰고 싶으니까 괜찮아.”
시카르는 나를 조금 쳐다보다가 내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생각하는 게 정말 예쁘고 속이 깊군. 이런 부인을 두고 길리언 같은 놈을 만나러 가야 하다니. 자리를 뜨고 싶지 않지만, 확인할 게 있으니 가봐야겠다.”
“응. 잘 다녀와.”
시카르는 나가면서도 나를 향해 해맑게 미소를 지었다. 해맑게 웃는 시카르의 미소를 보니 마음이 설레었다.
시카르가 올 동안 방을 좀 정리해야겠는걸.
기분이 좋아서인지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
“난 네가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하느라 더 늦게 올 줄 알았는데, 생각보단 빨리 왔군. 역시 아내가 사라진다니 급했던 모양이지?”
모든 키는 자신이 쥐고 있다는 듯 자신만만한 웃음을 짓고 있는 길리언을 보고 있자니 시카르의 속이 뒤틀렸다.
“네놈 따위를 생각할 만큼 한가하지 않다 보니 늦은 것뿐이다. 헌데 네가 뱀처럼 요망한 혓바닥을 놀려대니 그냥 죽여버릴까 싶기도 하군.”
“그렇게 여유 부릴 때가 아닐 텐데. 내가 죽으면 정말 네 아내는 언제 어떻게 사라질지 모른다.”
“이제 말해라. 검은 눈의 인간들이 사라지는 이유가 무엇인지. 어떤 조건을 충족해야 사라지는지를.”
“이 귀한 정보를 그렇게 쉽게? 에이 그럴 순 없지. 내게 머물 집과 시종들을 제공해라. 이전처럼 내가 풍족하게 살 수 있게 모두 지원하지 않으면 난 결코 입을 열지 않을 것이다.”
“그거야 어렵지 않지.”
“맹세해.”
“알다시피 이 몸이 저주에 걸린 몸이라 맹세할 수가 없다. 맹세를 해봤자 효과를 보지 못 할 테니까.”
“키안이 아직 네 저주를 풀어줄 재주가 없나 보군.”
“그 덕분에 네가 살아 있음에 감사해라. 국왕이 조금만 더 컸더라면 넌 지금쯤 잿가루가 되었을 테니까.”
길리언은 이제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키안이 불의 정령사의 아들이었지. 그날 봤지. 정령들을 불태워 버리는 무시무시한 힘을 갖고 있더군. 후후. 어린놈치고는 대단하긴 했지.”
“나중에는 네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더 대단해질 것이다.”
“마치 자식 자랑을 늘어놓는 부모 행세를 하는군.”
“너와 이따위 수다를 떨 생각은 없다. 길리언. 경고하는데 허튼 생각은 하지 마라. 어차피 넌 절대 이곳을 못 벗어날 테니까.”
“난 어차피 나갈 생각도 없다. 나가봤자 돌팔매질에 맞아 죽지 않으면 다행일 테니까. 말했다시피 내가 원하는 요구조건만 들어준다면 난 군말 없이 살 생각이다. 네가 맹세를 할 수 없으니 내가 새 집에 들어가게 되는 날 그때, 검은 눈의 인간들이 사라지는 조건도 말해주겠다.”
“쓸데없는 소리거나 사실이 아니라면 다시 감옥에 가둘 것이다.”
“나한테 은혜를 갚을 준비나 해둬라. 시카르.”
시카르는 쓰게 웃었지만, 내심 불안감이 밀려오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감옥을 나오며 길리언의 거처를 빨리 준비하기 위해 레이독스의 집무실로 향했다.
***
저녁이 되니 넓게 트인 창문으로 바람이 불어왔다. 창문 밖 가로등 아래로 활짝 피어 있는 장미꽃들이 너무나 아름답게 보였다.
키안이 날 위해 준비한 세상에 하나뿐인 정원이어서 더욱 아름답고 소중했다.
오늘 따라 왜 이렇게 마음이 들뜨는 건지.
궁에 들어온 첫날이라 들뜨는 걸까.
생각했지만 자꾸만 귓가에 아른거리는 그 소리는 나직하게 울리는 시카르의 사랑한다는 말이었다.
생각할수록 설레이는 그 말이 귓가를 자꾸만 간지럽혀왔다.
낮에 제대로 구경 못 한 정원을 산책하기 위해 나가려니 메이리가 황급히 숄을 들고 따라 나왔다.
“마님. 저녁은 호수 바람이 이곳까지 불어와서 쌀쌀해요.”
“고마워.”
“저도 같이 나갈게요. 마님. 오늘 궁이 처음이시잖아요.”
“궁이라 안전하니까 넌 이만 들어가도록 해.”
“하지만 시녀님이 없을 땐 마님의 뒤를 항상 따라다니라고 공작님께서 당부하셨어요.”
“명령이 아니라 당부를 했다고?”
“네. 당부라고 하셨어요.”
그 성격에 명령이 아닌 당부를 했으니 명령을 들은 것보다 더 마음이 무거웠긴 하겠는데.
“왜 그러셨을까. 궁이 공작저보다 더 안전한데.”
“저도 잘 모르겠지만 공작님께서는 궁이 더 위험하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이 아닐까요?”
“글쎄. 잘 모르겠구나. 그럼 메이리 너도 산책을 할 생각이면 숄을 걸치고 나오도록 해.”
“네. 마님.”
메이리는 밝게 웃으며 들어갔다가 금세 숄을 거치고 나왔다.
메이리가 걸치고 나온 것은 그냥 평범한 무명 숄이었다. 이번에 옷을 사면서 메이리의 것도 새로 사야겠군.
메이리는 나와 거리를 조금 두고 내 뒤를 따라왔다. 온통 장미꽃이 피어 있는 정원은 너무 아름다웠다.
한바탕 태풍이 지나가고 나니 이 조용하고 한적한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평화는 정말 좋은 것이야. 좋은 것이고 말고.
“정원이 참 예쁘구나. 그렇지 않니?”
“전하께서 신경 쓰신 게 보일 만큼 아름다워요. 마님.”
“그래. 앞으론 자주 나와서 걸어야겠구나.”
“다음에는 앞으로 태어나실 후계자님과도 같이 걸으면 더 좋을 것 같아요.”
나와 시카르 사이의 2세를 말하는 건가.
앞서 걷던 나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메이리. 지금 그 발언은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
돌아보니 그곳엔 시카르가 서 있었다 그 옆에 서 있던 메이리는 머쓱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전 그럼 들어가 볼게요!”
어쩐지 메이리가 평소 안 하던 말을 한다 했다니 시카르가 시켰던 모양이군.
“너무 2세에 집착하지마.”
“나도 집착하기 싫지만 마음대로 안 되는군. 국왕이 예뻐 보일수록 빨리 아이를 가지고 싶은 마음이 더 커져서 말이지.”
아이 얘기에 얼굴이 화끈거렸기에 나는 곧장 고개를 돌리고 다시 정원을 걸었다. 그러자 시카르가 옆으로 다가와 내 손을 잡았다.
“밤 산책이 나쁘지 않군.”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아주 좋았다. 이곳은 키안이 있는 궁이었으니까.
밤이 깊어 갔지만,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아름다운 정원을 조금 더 거닐고 난 후 우리는 방으로 돌아왔다.
잘 준비를 끝내고 각자의 침대에 누웠지만, 말이 각자의 침대일 뿐 두 침대가 나란히 붙어 있었기에 한 침대에서 자는 것과 다를바가 없었다.
시카르는 창가 쪽에 있는 침대를 선택했다. 간혹 창문에서 찬바람이 들어오면 자신이 막아줘야 한다는 그런 이유였기에 나는 그렇게 하라고 내버려 두었다.
눈을 감고 잠을 청하려하자 목 뒤로 무언가가 스윽 하고 들어왔다. 시카르의 팔이었다.
시카르는 이내 팔을 안으로 감아 나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아이를 갖는 건 참지만 떨어져 자는 건 못 참는다.”
사실 싫지 않았지만. 아니, 좋았지만 그렇다고 너무 좋아하는 척하고 싶지는 않아서 새침하게 말했다.
“이건 봐줄게.”
내가 싫다고 하지 않은 것에 놀란 듯 시카르는 두 눈을 끔뻑거리며 보다가 미소 지으며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이런 걸 두고 사랑스럽다고 하는 거군.”
가슴 설레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의 품은 너무나 따스했다.
나는 그 품에 안겨 아무런 근심도 없이 편안히 잠에 들 수가 있었다.
***
그리고 다음 날.
나는 시카르의 호탕한 웃음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창밖을 봐.”
“창밖?”
아니, 창밖은 볼 필요도 없었다.
커다란 창가를 통해 가득 들어오는 푸른 빛.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이런 푸른 빛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이것은 마치 블러드 킹 소설에서 보았던, 내가 상상했던 한 장면과 흡사했다.
이것은 어쩜…….
내가 설마하는 눈으로 쳐다보자 시카르는 씨익 미소지었다.
“푸른 해가 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