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축제 (2)
(135/197)
135화. 축제 (2)
(135/197)
135화. 축제 (2)
2022.09.15.
나는 깜짝 놀라 키안을 쳐다보았다. 놀라기는 시카르도 마찬가지였다.
시카르는 조금 서운하다는 듯 키안을 힐끔거렸다.
“왠지 차별당한 기분인데. 왜 난 뽀뽀 안 해 주는 거지?”
나를 향해 은근한 미소를 짓던 키안은 시카르를 보며 엄한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가 어머니는 어떤 존재라고 했었지?”
“우리가 지켜줘야 하는 존재?”
“그래서 어머니의 주먹을 지켜준 거야.”
그랬던 건가? 알고 나니 더 감동인걸.
시카르는 알아들었다는 듯 핑거스냅을 튕겼다.
“잘했군.”
그러자 키안도 시카르를 따라 핑거스냅을 튕겼다.
“기본이지.”
원작 ‘블러드 킹’에서 분명 시카르는 냉혹한 악역이었는데, 지금은 뭔가…… 냉혹한 빙구가 된 것 같았다.
나쁘진 않지만. 적응하기까지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할 듯했다.
다시 몇 걸음 더 걸어가려는데 비카가 어딘가를 보며 말했다.
“저기 헤르시아가 있군요.”
“헤르시아?!”
“어디요? 비카?”
“저기요.”
비카가 앞을 가리키긴 했지만, 우리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먼 곳을 볼 수 있는 비카의 눈에는 어딘가에 있는 헤르시아가 보였던 모양이었기에 우리는 비카를 따라 걸었다.
그러자 정말 헤르시아가 보였다. 머리를 양옆으로 땋고 토끼귀가 달린 머리띠를 착용하고 있는 헤르시아는 화려한 드레스를 벗고 나와 같은 무명 원피스에 앞치마를 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헤르시아는 노점에서 밀크티를 팔고 있었다.
노점상 앞 작은 현수막에는 <블레이크가의 비법 그대로의 밀크티!>란 문구가 떡하니 박혀 있었다.
그 순간 헤르시아에게 밀크티 레시피를 써서 보내줬던 게 떠올랐다.
그래서 그거로 이렇게 밀크티를 팔고 있었던 모양이다.
“헤르시아! 서신을 보내도 답장이 없으셔서 무슨 일인가 했는데 여기 계셨군요!”
헤르시아는 나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 듯 몸을 파르르 떨었다.
“고, 공작부인!”
“헤르시아. 오늘 같은 축제 날에 노점을 하느라 바쁘셨군요.”
“고, 공작부인. 죄송해요…….”
“뭐가요?”
헤르시아는 미안해서 어쩔줄을 모르겠다는 듯 얼굴을 붉혔다.
“공작부인께서 알려주신 레시피로 장사를 해서요.”
아. 난 괜찮은데.
시카르는 헤르시아를 쳐다보다가 밀크티를 들어 키안에게 건네었다.
“이건 마셔도 되겠다.”
키안은 목마르던 차에 잘 됐다는 듯 밀크티를 받아 마셨다.
헤르시아는 키안을 보고 놀란 듯 바로 고개를 숙였다.
“저, 전하. 인사드립니다. 모, 모비아트 가문의 헤, 헤르시아 모비아트라고 합니다. 전하의 성은이 아니었다면 이번 풍파를 견디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늦게나마 전하께 인사 올…….”
나는 헤르시아가 무릎이라도 꿇으려고 해서 그녀를 말렸다.
“쉿. 헤르시아. 우린 오늘 놀러 나온 거라 국왕의 신분이 노출 되면 안 돼요.”
“아. 그, 그래요?”
키안도 웃으며 헤르시아를 향해 검지를 입술 위로 올려보였다.
“쉿! 부탁해요. 헤르시아.”
“아! 네! 알겠습니다. 전하!”
“그런 호칭은 곤란해요. 쉿!”
“아, 네. 네! 알겠습니다!”
“좋아요. 불필요한 호칭은 빼고 그렇게만 말해주세요.”
그동안 듀리온은 밀크티를 두 잔째 마시고 있었다. 비카는 그런 듀리온이 한심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넌 체통이란 게 없냐? 네가 사람이냐. 곰이냐.”
비카의 말을 들은 듀리온은 밀크티를 세 잔째 마시려다 말고 입맛을 다시며 잔을 내려놓았다.
“목이 많이 말랐나 봐요.”
듀리온은 내 관심이 고맙다는 듯 두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내게 고마움을 표했고 비카는 듀리온이 마시려던 세 번째 밀크티를 들어 마셨다.
우리는 헤르시아의 작은 노점 앞에 있는 값싼 나무로 만든 야외 테이블에 앉았다. 광장에 보이는 많은 사람들 때문에 간혹 현기증이 밀려오긴 했지만, 참을만했다.
거적데기에 가까운 파라솔 아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도 썩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음. 밀크티를 정말 맛있게 잘 만드셨는데요?”
“죄송해요. 제가 마음대로 공작부인의 레시피로 판매를 해서요……. 정말 며칠만 하고 말 생각이었어요.”
“괜찮아요. 제가 놀란 건 그게 아니니까요.”
“그, 그럼요?”
“헤르시아께서 노점상을 하고 계셔서 놀랐죠. 왜 노점을 하고 계신 거예요? 오늘 같은 날은 아론 님과 데이트라도 하셔야 하지 않아요?”
“아. 아론은 우유를 구하러 갔어요.”
“그래요?”
헤르시아는 시카르의 눈치를 살폈지만 시카르는 키안과 함께 팔씨름을 하고 노는 중이었다.
“사실…… 아론이 계속 돈이 없다고 하고 집에서는 아론과의 결혼을 반대해서 제가 그와 결혼하면 한 푼도 지원해줄 수 없다고 했어요. 그래서 제가 직접 벌어볼까 하고 노점이라도 시작해 봤는데 공작부인의 밀크티가 너무 인기가 많은 거예요. 그래서 정말 결혼식 비용만 벌고 그만두려고 했어요. 정말이에요.”
헤르시아는 내게 너무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어차피 난 이곳에 와서 밀크티로 돈을 벌 생각은 아니었다. 돈을 벌지 않아도 내게 수표 다발을 안겨주는 시카르가 있고 국왕이 아들이라 궁전에서 살고 있는 덕분에 돈에 대해 아쉬울 게 없었다.
그래서 헤르시아가 밀크티를 팔아도 상관은 없었지만 내 시녀직을 부탁하려 했는데 들어줄지가 의문이었다.
“헤르시아. 저한테 미안해 하지 말아요. 얼마든지 제가 알려드린 레시피로 밀크티를 파셔도 괜찮아요. 그 레시피도 어차피 제가 만든 건 아니거든요.”
“그래요? 그럼 이건 누가 만든 레시피인지 여쭤도 되나요?”
“제가 살던 곳에 어느 누군가가 만든 거예요. 아무튼,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저도 부탁이 있어요.”
“말씀하세요. 부인.”
“제가 시녀를 구하고 있는데 혹시 제 시녀를 해 주실 생각은 없으세요?”
“공작부인의 시녀요?”
“네. 헤르시아. 월급도 괜찮으니 수입 걱정도 덜 할 거예요.”
헤르시아는 곧장 긍정적인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녀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공작부인.”
“네?”
“그때 다이엔느의 시녀 일을 하며 시녀는 제게 안 맞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시녀는 다른 사람들에게 부탁도 잘해야 하고 모시는 주인의 전반적인 모든 것들을 총괄해야 하는데, 제가 낯가림도 심해서 힘들었어요.”
그랬구나. 흔쾌히 수락할 거라고 생각했던 건 내 착각이었던 듯했다.
“사실 저는 카페를 하고 싶어요.”
“카페요?”
“네. 이번에 공작부인의 밀크티를 팔며 느낀 건데 이 일이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처음엔 결혼식 비용만 벌려고 했지만, 이제는 그 돈으로 작은 카페라도 하나 차릴까 해요. 아론도 돈을 보태주기로 했거든요. 물론, 공작부인의 레시피는 쓰지 않을 거예요! 그건 도용이니까요.”
카페라……. 헤르시아가 내 시녀를 해주면 좋겠지만 카페를 차리는 게 그녀의 꿈이라면 그것도 응원해 줘야겠지.
“그럼, 그건 제가 투자할게요.”
헤르시아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투자요?”
“네. 제가 헤르시아에게 카페를 차려줄게요. 헤르시아는 점주가 되는 거죠.”
“점주요?”
나는 헤르시아에게 프렌차이즈라는 시스템에 대해 설명했고 곰곰이 듣던 헤르시아는 두 손을 모았다.
“그렇다면 전 마다할 게 없죠!”
옆에서 키안에서 한 번도 팔씨름을 져주지 않던 시카르는 마지막으로 키안의 팔을 꺾은 후 나를 쳐다보았다.
“설마, 부인. 그 돈 내가 준 돈은 아니겠지?”
“맞아. 공작님이 내게 준 돈. 근데 이 돈에 대해선 개입하지 않기로 했잖아.”
“물론 난 개입하지 않을 생각이긴 하지만, 또 남을 위해 돈을 쓰는 건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어서…….”
“투자야.”
“투자?”
“프렌차이즈 창업을 시작한다고 생각해줘.”
시카르는 차분히 생각에 빠진 듯하다 고개를 들었다.
“부인의 뜻대로 하시죠.”
시카르의 긍정적인 대답을 들은 헤르시아는 이게 꿈이냐 생시냐 하듯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곧 우유를 들고 온 아론에게 이야기 하며 두 사람이 방방 뛰기 시작했다.
아론은 뒤늦게 우리의 앞으로 와서 인사를 했다.
“저, 전하! 아론 하비커 인사드립니다. 저는 유카나다르 기사단의 기사로 현재는 유카나다르 재상님을 보필 중에 있습니다. 오늘은 푸른 해가 뜬 것을 기념하여…….”
아론은 한참을 자신을 소개했고 키안은 차마 지루함을 표현하지 못하고 멍한 눈으로 아론의 말을 들었다. 시카르가 손으로 아론의 입을 막음으로써 그의 소개를 멈출 수가 있었다.
“적당히 해라.”
“죄, 죄송합니다. 공작님!”
아론은 진땀을 흘렸지만, 키안은 시카르가 아론의 입을 막고 있는 게 우스운지 화통하게 웃기 시작했다.
아론은 그런 키안을 보며 감정이 복받쳐 오른다는 듯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눈을 감았다.
아론의 표정은 하늘의 푸른 해를 띄운 왕을 봤으니 여한이 없다는 그런 표정이었다.
그나저나, 헤르시아가 없으면 이제 시녀는 어떻게 구해야 하나. 아무래도 부탁할 사람은 서연 뿐인 것 같은데.
***
“이 계절에 감기에 걸리는 건 우리 쌍둥이들 뿐이군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서연 님.”
“아이들이 고생이죠. 오늘 같은 날 광장 축제 구경도 못 하고…… 너무 짠해요.”
하지만, 레이독스와 서연의 걱정처럼 아이들이 아파서 다 죽어간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감기몸살이 심해서 앓아누워 있을 뿐이었다, 물론 와중에도 아이들은 서로를 향해 베개를 던질 수 있을 정도의 힘은 남아 있었다.
밖은 나갈 수 없었지만, 다행히 창밖으로 솟아 오른 푸른 해는 볼 수가 있었다.
참으로 진귀한 광경에 쌍둥이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진짜 신기해. 해가 푸른색이라니.”
루시는 저 해를 손으로 잡을 듯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보고 있었고 루이드는 손하나 내밀 기운이 없다는 듯 눈을 반쯤 뜨며 창 밖을 보고 있었다.
“초대 대왕 이후로는 처음이래. 유모가 그러는데, 이번이 지나가고 나면 다시는 볼 수 없대. 오늘 실컷 봐둬.”
“다시 볼 수 없다니. 아쉽다. 그래서 더욱 눈을 못 떼겠어.”
“밖에서는 축제가 한창이라는데, 루시 너 때문에 나까지 감기에 걸려서 이게 뭐야.”
“말은 똑바로 해! 네가 그 빗자루를 타겠다고 밤에 정원을 돌아다니는 바람에 감기에 걸린 거잖아!”
“네가 태워 달라고 해서 탄 거잖아!”
“참, 너 푸른 해가 뭘 의미하는 줄 알아?”
“알아. 희대의 성군 탄생을 의미하는 게 푸른 해라고 하잖아.”
루시는 정말 신기하다는 듯 푸른 해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키안이 그런 성군이라니. 정말 신기해.”
루이드는 언제 아팠냐는 듯 킥킥거리기 시작했다.
“루시는 좋겠네. 저 푸른 해의 주인공인 푸른 왕 키안의 약혼자가 돼서.”
루시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아, 아직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유모가 그러는데 무조건 키안이 너를 선택할 거라고 했어. 너도 알지? 유모가 하는 말은 대부분 다 맞는다는 거 말이야.”
“유, 유모가 그런 말을 했다고? 정말?”
“그래. 네가 나중에 이 왕국의 왕후가 될 거라고 했어.”
루시는 지금 당장 왕후라도 된 듯 제 볼을 만지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루이드는 재미있는 구경이라도 하는 듯 낄낄대며 웃었다.
“그걸 믿냐?! 네가 레카도르의 왕후가 되면 내가 레카도르 최고의 헌터다.”
기대한 듯 보던 루시는 김이 빠진다는 듯 루이드를 향해 베개를 던졌다.
“내가 왕후가 되면 넌 레카도르에서 추방시켜 버릴거야!”
루이드는 루시가 던진 베개 위에 다리를 올리며 아주 편한 자세를 취했다.
“내가 추방당할 일은 없을걸. 넌 절대 왕후가 되지 못할 테니까. 세상에 네가 왕후라니 말이 돼? 킥킥.”
루이드가 배를 잡고 웃으며 비웃는 게 거슬리긴 했지만, 루시 역시도 자신이 왕후가 된다는 것이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런 일이란 결코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