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7화. 축제 (4) (137/197)


137화. 축제 (4)
2022.09.22.


하지만 비카는 전혀 고맙지 않다는 눈으로 레이독스를 보며 투덜거렸다.


“재상이 나설 자리가 아닐 텐데?”

“비카 님을 위해 나선 것이 아닙니다.”

레이독스는 비카를 지나쳐 키안을 향해 목례를 하며 손에서 칼을 놓치고 놀란 듯 보고 있는 사내들을 향해 걸었다.


“감히 국왕 전하 앞에서 함부로 칼을 꺼내든 죄는 죽어 마땅하다는 것을 알고 있겠지.”

“국왕 전하?”

사내들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레이독스를 보다가 소름 끼친다는 듯 키안을 쳐다보았다.


“그, 그럼…… 저기 저…….”

레이독스가 손을 들어 올리자 수도의 경비대들이 쫓아 나왔다.


“부르셨습니까.”

“이놈들을 모두 잡아 가두어라.”

비카가 손을 잡고 있던 사내를 경비병을 향해 내던지듯 밀쳐냈다.

경비병은 날아오는 사내를 피해 살포시 옆으로 비켜섰고 사내는 자신의 사기꾼 친구들이 있는 곳을 향해 데구르르 굴렀다.

일어나려던 두 명의 사내는 자신들을 향해 덮쳐오는 사기꾼 친구로 인해 도미노처럼 같이 쓰러졌다.


“앞으로 또다시 이런 짓 하지 마라. 너희들 때문에 내가 오늘 얼마나 귀찮았는 줄 알아?”

비카가 화가 많이 나 있는 것을 보니 정말 귀찮았던 모양이었다.

경비병들은 레이독스를 향해 경례를 한 후 순식간에 쓰러져 있는 사기꾼들을 붙잡아 갔다.

레이독스가 분명 쌍둥이를 간호하기 위해서 일찍 갔다고 들었는데, 둘러봐도 그는 혼자였다.


“후작님. 쌍둥이들이 아프다고 들었는데, 아이들은 좀 괜찮은가요?”

“아. 로엔 님이 축복을 해주러 오셔서 쌍둥이들이 모두 나았습니다. 그래서 로엔 님이 레페르의 신관분들과 함께 축복을 위해 광장에 오셔서 함께 나왔습니다.”

“그래요? 그거 잘 되었군요. 그럼 쌍둥이들은 집에 있고, 레이독스 님 혼자 나오신 건가요?”

“아, 아닙니다. 아이들은 뒤를 따라오고 있는 중입니다.”

“그렇군요.”

오랜만에 쌍둥이들을 보겠는데.


“참, 비카 님. 이제 저기 있는 남자에게 돈을 돌려줘야 할 거 같아요.”

뻐근한 듯 몸을 풀고 있던 비카는 남자를 향해 귀찮다는 듯 물었다.


“잃은 돈이 얼마지?”

“300실링입니다.”

“거짓말하면 죽는다.”

“……200실링입니다.”

비카는 그제야 남자를 향해 돈을 휙 던졌다.

기다렸다는 듯 두 손으로 돈주머니를 받은 남자는 두 손을 벌벌 떨며 돈주머니를 확인하곤 비카를 향해 고개를 숙이려 했다.

그러자 비카는 남자를 향해 더 눈을 부라렸다.


“감사하다고 하면 도로 뺏는다. 귀찮으니까 그냥 조용히 꺼져.”

감사하단 인사를 받으면 기분이 좋던데. 인간에게 관심이 없는 비카는 그마저도 귀찮은 모양이었다.

생각해보니 시카르도 터커에게 저렇게 말했지. 두 사람이 정말 많이 닮았다니까.

남자는 조금 전 비카의 날렵한 동작은 본 탓에 겁을 먹은 까닭인지 정말 감사하단 인사도 없이 제 돈을 찾았으니 됐다는 듯 쏜살같이 자리를 떠났다.

비카는 남은 돈을 모두 레이독스에게 건네주며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러니 남은 돈은 네가 알아서 처리해.”

레이독스는 알겠다는 듯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알겠습니다. 비카님.”

비카가 궁내부장이라 레이독스가 훨씬 더 직위가 높은데도 두 사람은 여전히 서로의 방식으로 인연을 이어가고 있었다.

다시 시카르가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발걸음을 돌리던 찰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푸른 해맞이를 기념하여 축복을 드리고 있습니다.”

고개를 돌려보니 로엔이 신관들과 함께 사람들에게 축복을 내리고 있었다.

시민들은 방금 비카가 벌인 소동을 금세 까먹고 신관들을 향해 손을 모았다.

신관들은 축복을 받을 준비가 돼 있는 사람들의 이마 앞으로 손바닥을 살포시 보였다.

그러자 손에서 작지만 밝은 빛이 사람들을 투과했다.

그 뒤를 따라오던 루시와 루이드는 키안을 보고 굳은 듯 멈춰 섰다.

이렇게 볼 줄은 몰랐겠지.

루이드는 로빈 후드 의상을 연상하게 하는 깃털이 달린 고깔모자를 쓰고 있었고 루시는 등 뒤로 커다란 리본을 마치 날개처럼 달고 귀엽게 똥 머리를 하고 있었다.

내 눈에는 루시가 공주처럼 예쁘기만 했다.

루이드와 루시는 딴청을 부리듯 쭈뼛거리며 뒤로 숨었지만 레이독스가 둘을 키안의 앞으로 미는 바람에 더는 숨을 수가 없었다.

쌍둥이들은 키안을 힐끔거리며 보면서도 선뜻 다가서지 못하고 있었다.

키안이 먼저 다가서자 루이드는 놀란 듯 인사를 시작했다.


“안녕. 아, 아니. 안녕하세요.”

긴장한 모습이 역력한 루이드와 달리 루시는 차분하게 인사했다.


“유카나다르의 소후작 루시 유카나다르가 천세 만세를 빛내실 국왕 전하를 뵙습니다.”

처음 키안을 만났을 때 얼굴에 낙서를 했던 루시는 온데간데없이 여주인공답게 어리지만, 우아하면서도 참한 모습이었다.

루시의 우아한 모습에 엄마 미소가 절로 나왔다. 감동한 눈으로 루시를 보고 있자니 서연이 이쪽으로 걸어와서 우리에게 인사를 하고는 나와 같이 감격스러운 눈으로 루시와 키안을 바라보았다.

지금 이 순간 남주인공과 여주인공의 애정이 꿈틀거리고 있을 것이기에 손에 땀을 쥐고 볼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공감대를 나눌 수 있는 서연이 있다는 게 새삼 즐거웠다.


“서연 님도 저와 같은 마음이겠죠?”

“물론이죠!”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떨리는 마음으로 키안의 다음 대사를 기다렸다.

이제 곧 루시가 키안의 약혼자가 될 것이기에 키안이 여기서 남주인공으로서 어떤 활약을 할지 기대되는 순간이었다.

키안은 루시에게 천천히 다가가 루시의 이마에 손바닥을 갖다 대었다,

그러자 키안의 손에서 옅은 빛이 새어 나왔다.


 
로엔에게 축복을 받았다고 들었는데 또 축복을 내리는 건가?

하지만, 국왕이 직접 내리는 축복이니만큼 그 의미가 남다르긴 하겠지.

그리고 이어지는 키안의 다음 대사로 인해, 키안이 루시에게 축복을 내린 이유를 알 수가 있었다.


“감기에 걸렸었다며?”

루시는 다소 놀란 듯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여주인공의 품위를 잃지 않고 차분히 대답했다.


“로엔 님께서 축복을 내려주신 덕분에 치료되었습니다.”

“방금 내가 내린 건 축복이 아니야.”

“그럼……?”

루시 눈에는 잘 안 보이겠지만, 우리들 눈에는 방금 키안이 내린 축복이 뭔지 아주 자세히 잘 보였다.

키안은 루시의 주변에 커다란 비눗방울 같은 보호막을 쳐주었다. 키안은 차분히 미소지으며 루시를 보고 말했다.


“작은 바람과 물세례쯤은 막아 줄 거야. 이제 감기가 나았는데 다시 또 감기에 걸리면 안 되니까.”

키안이 왜 저런 걸 걸어주나 했는데, 광장 분수대에서 서로에게 물을 뿌려주며 노는 사람들 때문인 것 같았다.

서연은 애꿎은 자신의 볼을 꼬집었다.


“너무 스윗해요…….”

키안은 루이드에게도 작은 보호막을 씌워주며 감기 조심하라고 말해주었다.

그동안 저를 괴롭혔다는 이유로 복수할 줄 알았던 키안이 축복을 내려주자 루이드는 더 어리둥절해하는 모습이었다.

루이드, 내가 뭐랬니. 키안은 주인공이라 그렇게 지난 일을 들출 만큼 속이 좁지가 않다니까.

쌍둥이에게 축복을 내린 후 키안은 내게로 걸어왔다.

뭐야. 나한테도 설마 그런 축복을 내리려고 하는 거야? 난 물방울 좀 튀어도 괜찮은데.

괜히 이런 것까지 안 챙겨줘도 되는데. 그래도 나를 정 챙겨주고 싶다면 챙김을 받아야겠지.

나는 키안의 눈높이에 맞게 허리를 살짝 숙여주었다. 내게 편하게 축복을 내리게 해주기 위해서.

그런데 키안이 내게 온 것은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


“어머니. 저도 신관분들과 함께 사람들에게 축복을 내려주고 올게요.”

“아…….”

“허락해 주실 거죠?”

이젠 위험한 일도 없는 데다, 저 장정한 분들이 곁을 지키고 있으니 허락을 못 해줄 것도 없겠지만, 이거 왠지 서운한데.


“물론 허락해주고말고.”

키안은 내 말을 듣자마자 로엔에게 가버렸고 레이독스가 키안을 보필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서연은 그동안 쌍둥이들을 데리고 나와 함께 있기로 했다.


“전하는 레이독스가 보필할 테니 이만 공작에게 돌아가시죠. 마님.”

“그래요. 비카 님.”

다시, 돌아가니 시카르가 만든 브라우니가 불티나게 팔리고 없었다. 사람들은 브라우니를 찾고 있고 헤르시아는 발을 동동 굴리며 만들고 있긴 했지만, 실패한 브라우니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시카르는 내 알 바 아니라는 듯 앉아서 차를 마시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렇게 사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줄을 서 있는 상황에서도 느긋하게 나 몰라라 하며 차를 마실 수 있는 시카르의 저 무심함이란.

나 같은 사람에게는 무심함에도 거절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법이지만, 시카르에게 그런 건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와 친한 헤르시아가 혼자서 저렇게 고생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안쓰러웠다. 시카르가 서연과 쌍둥이들과 인사를 끝내는 것을 보고 난 후 나는 그에게 넌지시 말했다.


“공작님! 뭐 하세요?”

“뭐하긴. 부인을 기다렸지.”

“지금 헤르시아 님이 혼자서 고생하고 계시잖아요.”

“그래서?”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어차피 이 장사는 본인이 스스로 해야 하는 것이다. 급한 불은 스스로 끌 줄 알아야겠지. 이 정도도 못 하겠다면 장사를 접어야지.”

“하지만, 그건 브라우니를 만드는 법을 완전히 익혔을 때나 가능하지, 지금은 아무것도 모르잖아. 아니, 그것보다 브라우니는 왜 팔고 있었던 거야?”

“팔진 않았다. 헤르시아가 쓸데없이 지나가는 아이한테 브라우니를 주는 바람에 일이 이렇게 된 것이지.”

우리 얘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서연이 팔을 걷어붙이며 나섰다.


“저도 브라우니 좀 만들 줄 아는데, 제가 헤르시아 님을 좀 도와드릴게요.”

“그렇게 해주시면 헤르시아 님께서 정말 고마워하실 거예요.”

서연은 믿고 맡기라는 듯 내게 윙크하며 헤르시아를 도우러 갔다.

그게 대체 뭐냐는 듯 나를 보고 있는 쌍둥이들에게 나는 브라우니에 대해 설명 했고, 아이들은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화덕 앞에 있는 서연을 보고 있었다.

그동안 시카르는 내 손을 잡고 내 기억을 읽고 난 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비카가 아주 질색했겠군.”

“말이라고 해?”

비카는 넌덜머리가 난다는 듯 의자에 앉아 등을 기대었다. 그 바람에 테이블에 얼굴을 처박고 졸고 있던 듀리온이 벌떡 일어났다가 다시 테이블에 얼굴을 처박고 졸았다.

이 와중에도 저런 자세로 잠을 잘 수 있다니. 듀리온은 어떤 면으로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란 말이야.

앉아서 잠시 쉬고 있는데 키안을 비롯한 신관들이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우리는 키안과 로엔에게 손을 흔들어주었고 키안은 내게 미소를 날렸다.

나는 너무 좋아서 비명을 지를 뻔했다가 내 옆에 루시가 있는 것을 보곤 그 미소가 나를 향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루시와 루이드가 서연이 만드는 걸 구경하기 위해 화덕이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을 보고 나는 시카르에게 푸념하듯 말했다.


“누가 그러더라. 아들에게 여자친구가 생기는 순간, 엄마는 뒷전이라고. 엄마가 열심히 새우 까서 아들에게 주면 그걸 여자친구에게 주는 게 아들이라고.”

시카르는 무슨 소리 하냐는 듯 어리둥절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무슨 소리야? 누가 새우를 먹어? 키안은 알레르기 때문에 새우를 먹으면 안 되지 않나?”

“예를 들어서 한 말이야.”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시카르는 루시를 보곤 이제야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슬며시 웃으며 내게 속삭였다.


“키안이 쌍둥이들에게만 축복을 내려줘서 서운했던 모양이군.”

“그런 건 아니야. 그냥…… 나도 추위를 잘 타서 물에 맞으면 감기에 걸릴 수도 있다는…….”

“솔직하게 말해.”

그래. 차라리 귀신을 속이는 게 낫겠지. 나는 이실직고 했다.


“이제 더는 키안에게 영 순위가 아닌 것 같아서 조금 아쉬웠어.”

시카르는 내가 귀엽다는 듯 내 볼을 꼬집었다.


“넌 내겐 언제나 영순위다.”

나를 보며 은근히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시카르를 보니 심장이 쿵쿵 뛰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