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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화. 축제 (5) (138/197)


138화. 축제 (5)
2022.09.26.



“나 위로하려고 하는 말이지?”

“진심으로 하는 말이지.”

시카르가 그렇게 말을 해서인지 심장이 고장 난 듯 두근두근거렸다.

이 무심한 놈에게 내가 영순위라니. 너무 기분이 좋았지만 애써 티 내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무심한 척 무표정으로 말했다.


“뭐, 조금 위로는 되네.”

“많이 위로가 됐으면 하는데 조금이라니 곤란하군. 내가 비록 네게 축복을 해줄 수는 없지만, 네게 물 한 방울도 튀지 않게 널 지켜줄 수는 있는데. 이건 좀 위로가 되지 않나?”

사실 그런 건 아무렇지도 않았다. 내게 위로가 되는 건 그가 나를 영 순위로 생각한다거나, 나를 물세례로부터 보호해준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물론 해 주면 좋겠지만, 그보다 더 위로가 되는 것은 나를 위로해주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었다.

덕분에 나는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하고 웃고 말았다. 내가 웃자 시카르는 날 보며 따라 미소를 지었다.


“이젠 좀 위로가 됐나 보군.”

그렇게 말하며 혼자 흐뭇해하는 모습이 귀엽게 느껴졌다.

둘이서 바보처럼 히죽거리며 웃고 있다 보니, 헤르시아가 서연이 만든 브라우니를 들고 왔다.


“공작 부인, 한번 드셔보세요. 정말 맛있어요.”

헤르시아는 내게도 건네며 쌍둥이들에게도 브라우니를 건네주었다. 쌍둥이들은 갓 구운 브라우니를 하나씩 먹더니 별이라도 본 듯 놀란 표정들을 지었다.


“우와! 너무 맛있어!”

“진짜 맛있어!”

갓 구운 브라우니만큼 맛있는 건 없지.


“전 그럼 사람들에게 브라우니 좀 나눠주고 올게요.”

“그러세요. 헤르시아 님.”

서연은 이제 한시름 놓았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내 옆으로 와서 앉았다.


“맛이 어때요?”

“서연 님은 정말 요리를 잘하시는 것 같아요.”

서연은 만족한 듯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좋아하다 보니 잘하게 된 것 같아요.”

그냥 잘 만든 게 아니라 매우 잘 만든 브라우니였다. 루이드는 브라우니에 취한 듯 방방 뛰며 좋아했다.


“유모는 정말 못 하는 게 없구나! 유모가 내 엄마면 좋겠다.”

루이드가 무심결에 내뱉은 말에 서연은 놀란 듯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고, 나도 놀란 듯 루이드를 쳐다보았다.


“루이드. 정말 서연 님이 어머니가 되면 좋겠어?”

나는 진지하게 물었지만, 루이드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브라우니를 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엄마가 생긴다면, 유모가 요리도 잘하고 저한테 잘하니까 유모가 엄마가 되면 좋을 거 같아요.”

루시에게도 물어보려고 했지만, 루시의 표정은 별로 좋지 않았다. 서연도 이미 알고 있는지 나를 보며 하지 말라는 듯 손을 저었기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엄마에 대한 빈자리에 목마른 루시였지만, 아빠에 대한 애정도 각별하니 서연이 아무리 잘해준다 한들, 선뜻 엄마로 삼기에는 무리가 있겠지.

브라우니를 먹으며 담소를 나누다 보니 해는 점점 지고 노을이 깔리기 시작했다.


“이제 이렇게 푸른 해도 지는군요.”

서연이 아쉽다는 듯 꺼져가는 푸른 해를 보며 말했고, 나도 아쉬운 마음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광장에 나와 있는 모두가 저물어 가는 푸른 해를 보며 소원을 빌고 기도를 올렸다.

저물어 가는 해를 보며 이렇게 아쉬운 적이 있었던가.

이제 해가 저물고 내일이 오면 다시 붉은 태양이 떠오르겠지만 이렇게 멋진 광경의 푸른 해는 다시 볼 수가 없겠지.

해가 지는 모습이 마치 우리의 찰나의 삶을 보는 것만 같았다.

이 모든 찰나의 순간이 다시 오지 않을 순간이라는 것이 못내 아쉬워서 우리는 누가 먼저랄 거 없이 서로의 손을 꽉 잡으며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이제 사라지면 다시 볼 수 없는 저 푸른 태양을.


 

***

사람들의 환호성이 들리기 시작한 것은 해가 완전히 지고 난 후였다.


“비카.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시끄럽지?”

“마법사 길드에서 마법사들이 나왔군.”

“그래서 시끄러웠던 거군.”

아, 기억난다. 원작에서도 해가 지고 난 후 마법사 길드에서 마법사들이 나와서 축제를 마무리했다고 했다.

마법사 길드에서 마법사들이 나왔다는 말에 조금 전에 해가 지는 것을 아쉬워하던 마음이 금세 다시 들뜨기 시작했다.

갑자기 광장 중앙으로부터 로켓이 솟아오르듯 커다란 불꽃이 피어오르며 시민들의 함성 소리가 우레처럼 울려왔다.

조금 지나니 마법사들이 이곳까지 오고 있었다. 마법사들은 손에서 작은 불꽃을 만들어 시민들에게 불꽃을 튀기고 있었다. 그 중엔 제르미도 보였다.

사람들은 혹여나 튀어오는 불꽃에 맞지 않기 위해 몸을 사렸지만, 저것들은 모두 가짜라 물질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은 아니었다.

쌍둥이들은 불꽃을 맞고 싶은지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기에 나는 아이들을 앞으로 밀었다.


“가서 서 있으면 마법사님들이 재미있게 놀아주실 거야.”

쌍둥이들은 나를 보며 환하게 미소지었다.


“감사해요. 공작 부인!”

나도 이렇게 기대가 되는데 아이들은 얼마나 기대가 될까.

한껏 들떠 있는 우리와 달리, 시카르는 인상을 굳히며 앞을 보고 있었다.


“재미없어?”

시카르는 시큰둥한 얼굴로 머리를 쓸어넘겼다.


“재미있을 것도 없겠지. 하지만 그것보다…… 파시움이 저기 있군.”

“파, 파시움이 저기 있다고?”

서연도 놀랐는지 어디 있냐며 괜시리 내 뒤에 숨었다.


“저기 백발을 하고 있는 자가 파시움이다.”

시카르가 말하는 백발의 남자는 백발이었지만 살짝 웨이브 진 머리가 귀여운 젊은 남자였다.


“저렇게 순수해 보이는 남자가 파시움이라고? 말도 안 돼.”

“진짜 말도 안 돼요. 파시움은 되게 무섭게 생긴 줄 알았는데, 저렇게 귀엽게 생겼다니.”

원작에서는 끝까지 후드를 덮어쓴 얼굴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저렇게 귀엽고 앳된 얼굴의 남자였다니…….

서연도 너무 놀라서 말이 안 나오는 모양이었다.


‘이건 너무 귀여운 막내 동생 같이 생겼잖아?’

시카르는 냉소적인 얼굴로 콧방귀를 뀌었다.


“파시움에게 이제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케이지가 부서져서 놈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만, 기억도 잃었고, 눈은 있되 앞을 볼 수가 없고, 혀가 있되 말을 할 수가 없게 되었지.”

“왠지 가엾다.”

“파시움을 저렇게 만든 장본인이 할 말은 아닌 것 같군.”

아. 그렇지 내가 저렇게 만들었지.

그때는 신념이 다른 적이었으니. 어쩔 수가 없었지만 그래서 지금은 가여워할 수도 있는 것이겠지.

파시움은 앞이 보이지 않아도 제법 잘 걸으며 사람들에게 불꽃을 만들어 주고 있었다.

저렇게 귀여운 미소를 짓는 소년 같은 남자가 그런 무서운 원한을 품고 살았다 생각하니 안타까웠다.


“내가 저주에만 걸리지 않았어도 저런 놈에게 그렇게 당하지 않았을 텐데.”

시카르는 그때 일이 떠올라 약이 올랐던 모양이다.


“참. 요즘은 저주가 잘 발현되지 않는 것 같던데. 어때?”

“이 저주는 시간이 지나갈수록 심해진다는 것을 잊진 않았겠지? 저주가 잘 발현되는 게 아니라 키안이 잘 치료해주는 것일 뿐이다.”

그렇지. 원작에서는 갈수록 심해져서 결국엔 죽음에까지 이르게 한다고 했었지. 그래서 키안과 싸우다 시카르가 죽었던 게 떠올랐다.

이제는 키안이 시카르를 위해 제때제때 치료해주고 있으니 참 다행이었다. 시카르가 저주 때문에 죽을 일은 없을 테니까.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제르미는 쌍둥이들을 보고 반가운 듯 토끼처럼 달려왔다.


“오! 쌍둥이들. 여기서 뭐 해?”

“보시다시피. 공작 부인과 같이 있어요.”

앙증맞은 루시가 우리를 보란 듯 가리키자 제르미는 우리를 향해 곧장 인사를 올렸다.

그러니까 불꽃을 쏘았다는 말이다.

서연과 나는 저 불꽃이 가짜인 것을 뻔히 알았지만, 막상 날아오니 비명을 지르며 몸을 피하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가 몸을 피하기전에 시카르가 그의 검으로 간단하게 불꽃을 받아쳤다.


“막아냈어?”

불꽃이 가짜임에도 시카르의 검이 튕겨내는 게 신기해서 나온 말이었다.

와중에도 제르미가 장난을 치며 계속 불꽃을 날렸지만 시카르는 그것을 거뜬하게 튕겨내면서도 내게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내 검은 웬만한 마법들은 모두 튕겨낸다.”

아. 그러니까 마법을 튕겨내는 검이라서 그렇다는 거군. 그래도 정말 신기한데?


“내가 그랬지. 너한테 물방울 하나도 튀게 하겠다고.”

아니, 이런 장난은 그냥 내버려 둬도 괜찮은데.

시카르의 말이 너무 의외였는지 서연은 나를 보며 입을 쩍 벌리며 속삭였다.


“세상에. 공작 부인. 지, 지금 제가 들은 저 말이 정말 그 시카르 블레이크 공작님이 하신 말이 맞는 거예요?”

나는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네……. 간혹 저렇게 성격에 안 맞는 말을 하곤 하더군요.”

보통사람이라면 저렇게 험상궂은 표정으로 나를 지켜주겠다고 말하는 시카르를 보며 미친놈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시카르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아는 서연은 매우 놀란 듯했다.


“저런 말도 할 줄 아시는지 몰랐어요.”

레이독스는 저런 식으로 스윗하진 않겠지. 아마 꿀이 뚝뚝 떨어지듯 스윗하겠지.


“후작님은 아주 다정하시죠?”

“아…… 후작님께서는 아시다시피 원래 성격이 차분하셔서…….”

“참, 두 분의 러브스토리는 언제 들려주실 거예요?”

서연은 부끄러운지 고개를 숙이고 입을 가렸다.


“오늘은 아이들도 있으니 다음엔 꼭 들려드릴게요.”

“거절하지 않아 줘서 고마워요. 서연 님.”

“별말씀을요. 공작 부인.”

불꽃을 막아내는 시카르는 아주 여유 있어 보였지만, 오기로 불꽃을 쏘던 제르미는 지친 듯 손을 들며 항복을 선언했다.


“독하십니다. 공작님.”

“또 까부는군.”

제르미는 천진하게 웃으며 제 허리춤에 손을 올렸다.


“오늘 저에겐 삼십만 대군의 마법사가 있으니까요.”

“삼십 명이겠지.”

제르미는 씨익 웃으며 시카르에게 허리를 숙이는 척하다가 내게 다시 불꽃을 날렸다.

바로 코앞까지 날라온 불꽃을 시카르가 검날로 재빨리 튕겨내었다.

그러자, 제르미는 놀랍다는 듯 조금 입을 벌리고는 박수를 쳤다.


“제가 졌습니다. 인정하죠. 그리고 오늘은 제 장난을 받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오늘이라 받아준 것이다. 그건 알고 있겠지?”

“그럼요. 평소에 이런 장난을 쳤다간 그 검으로 제 머리카락 다 베어가셨겠죠.”

그러고도 남을 위인이긴 하지.

평소에 시카르가 제르미의 대련을 받아주지 않으니 오늘, 날이 날인 만큼 이런 장난을 친 모양이군.

제르미의 옆에서 작은 막대 불꽃을 들고 놀던 쌍둥이들은 시카르의 검술 실력에 놀란 듯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불꽃놀이보다 시카르의 화려한 검술이 더 볼거리라는 얼굴들이었다.

그러는 동안 키안이 도착했다. 키안도 어디 났는지 막대 불꽃을 들고 있다가 내게 하나를 건네주었다.


“어머니. 이것 좀 보세요. 마법사들이 광장에 있는 시민들에게 이런 걸 나누어줬어요.”

그러고 보니 시민들 모두가 손에 막대 불꽃을 들고 있었다.

마법으로 만든 것인지 심지가 타지도 않는 신기한 막대 불꽃이었다.

그때 갑자기 요란한 폭파음이 들리며 섬광이 터지듯 불꽃이 하늘로 튀어 올랐다.

그러자 곧 키안이 놀란 루시의 귀를 막아주었다.


 
불꽃이 터지는 소리에 잠시 놀랐던 나는 키안을 보고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봤어요? 방금? 키안이 루시의 귀를 막아주는걸요.”

서연도 놀랐는지 나를 보며 입을 쩍 벌렸다.


“네. 굉장하던걸요.”

그러자 레이독스는 서연의 귀를, 시카르는 내 귀를 재빨리 막아주었다.

지금 다들 키안을 따라 하는 건가. 이 남자들이 아주 웃기는구만.

그래도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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