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축제 (6)
(139/197)
139화. 축제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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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화. 축제 (6)
2022.09.29.
제 손으로 귀를 막고 서 있던 루이드는 키안과 루시를 더는 봐줄 수 없다는 얼굴로 보며 우리에게 걸어오다가, 우리도 같은 자세를 하고 있자 당황스러워하고 있었다.
옆을 보니 커다란 폭죽이 터지는 소리에 잠에서 깬 듀리온이 우리를 보고 얼떨결에 비카의 귀를 막아 주려다 비카에게 한대 얻어맞고 있었다.
“뭐 하는 짓이야!”
“아니. 다들 이러고 있길래 이렇게 해야 하는 줄 알았지!”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시카르의 손을 내려놓았다.
“이제 그만해도 될 거 같아. 그리고 나 별로 안 놀랐어.”
“그렇다면 다행이군.”
키안이 시카르에게도 막대 불꽃을 하나 쥐여주었다.
“아버지! 나와서 같이 놀아!”
시카르는 귀찮다는 듯 막대 불꽃을 비카에게 넘겼고 비카는 그것을 듀리온에게 넘겼다.
키안은 다시 시카르에게 넘겼고 시카르는 그것을 또다시 비카에게 넘겼다.
그러자 비카는 이번에는 못 참겠다는 듯 시카르를 향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이딴 거 나한테 주지 마!”
키안은 키득거리며 비카의 손을 붙잡았다.
“같이 놀아요. 비카 님.”
비카는 한숨을 푹 쉬면서도 키안이 이끄는 대로 의자에서 일어나 막대 불꽃을 들고 참으로 재미없다는 얼굴로 흐느적흐느적거리며 막대 불꽃을 휘둘렀다.
그 모습이 어쩐지 비카와 더 잘 어울리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키안은 다음에 시카르에게도 막대 불꽃을 쥐여주었다. 나에게도 건네주었지만, 나는 서연에게 시녀 일을 부탁해야 한다고 말했고 키안은 바로 내게 알겠다며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레이독스를 끌고 나갔다.
그동안 아론이 우유를 들고 왔고 헤르시아는 왜 이렇게 늦었냐며 뭐라고 하다가 이제야 레이독스와 제르미를 발견하고 인사를 시작했다.
“아휴. 오늘 정신이 하나도 없어요.”
없을 만하지.
“수고 많았어요. 헤르시아 님.”
“시장하시죠? 잠시만 계세요. 머핀 좀 구워드릴게요.”
“그래 줄래요? 마침 출출하던 참이었거든요.”
“물론이죠.”
헤르시아와 아론이 요리를 시작하려고 하자 서연이 또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도 가서 도울게요.”
평소 같으면 그렇게 하라고 했겠지만 오늘은 부탁할 게 있어서 나는 서연의 팔을 붙잡았다.
“서연 님. 저와 잠시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서연은 의아한 듯 나를 보면서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말씀하세요. 공작 부인.”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제 시녀 직을 부탁드려요.”
예상한 대로 서연은 당황스러워했다. 그녀는 납득할 수 없다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제가요? 저는 귀족도 아닌데 어떻게 제가…….”
이 시대의 시녀는 직책이 높아야 가능했기에 이곳에서 아무런 직책이 없는 서연이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신분은 이쪽에서 얼마든지 만들면 되는 일이었다. 이 사람들이 누군가. 모두 악역들이 아닌가.
나쁜 짓이라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해낼 악역들이라 신분 세탁, 위조쯤은 일도 아니었다.
“그런 건 걱정 마세요. 서연 님. 신분 문제는 이쪽에서 얼마든지 해결이 가능하니까요.”
서연도 그건 어느 정도 인정하는 모양인지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긴 그런 그렇겠죠.”
“그럼 하겠나요? 저는 서연 님이 해준다면 너무 든든할 것 같거든요.”
서연은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었다.
“근데 제가 이곳의 예법이 익숙하지 않아서…….”
“그건 저도 그런걸요.”
“하지만, 시녀는 직책상 예법을 잘 알아야 할 것 같아요. 게다가 전 말주변도 없어서 말싸움도 못 할 것 같아서.”
“말싸움 할 일이 있을까요?”
“계속 귀족들을 상대해야 하니까 말싸움을 안 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물론 그렇겠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왜냐면 내게는 기억을 읽는 데다 때로는 무서울 만큼 상대를 밀어붙이는 시카르가 곁에 있었으니까.
“누가 만약 말로 저를 이겨 먹었다? 그럼 공작님이 기억을 다 보실 테니 가만 안 두겠죠.”
서연은 내 말이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겠어요.”
“그쵸? 그러니까 언젠가는 그런 일들이 소문이 나다 보면 모두 제게 조심하겠죠. 그렇게 되면 서연 님이 제 시녀로 있다고 해도 한결 편하실 거예요. 그리고 공작의 말로는 국왕이 효자이기 때문에 이미 제 권위에 도전할 사람이 없을 거라고 했어요.”
내가 이렇게 말해도 서연은 선뜻 한다고 말을 못 하고 있었다.
“사실 쌍둥이들과 친하게 지내는 데 시간을 할애하는 중이라 다른 일은 아직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저한테는 지금 저 일이 가장 중요하거든요.”
“그런 이유라면 더 좋은 기회이지 않을까요? 이제 쌍둥이들도 매일 궁으로 출근하다시피 해야 하니까요,”
서연은 금시초문이라는 듯 나를 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키안이 쌍둥이들에게 수행기사가 돼줄 것을 부탁했거든요. 키안의 수행기사가 되는 건 쌍둥이들의 운명이니, 아이들은 곧 궁으로 와서 훈련을 받게 될 거예요. 그리고 루시는 싫든 좋든 이제 약혼자가 되니 더 궁에 자주 오겠죠. 그때 서연 님이 궁내 사정을 알려주면 더 좋지 않을까요?”
내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서연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고민해 볼게요.”
“고마워요.”
고민해주는 것만도 어느 정도 희망적인 대답을 기대할 수가 있었다.
밤이 깊어 가며 폭죽 소리가 더 많아졌다.
“요란하기도 하군.”
이렇게 축제가 끝나다니 아쉬웠다. 불꽃이 아름답게 피어오르는 이 축제의 밤이 점점 지고 있었다. 폭죽 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하더니 어디선가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사람들은 모두 춤을 추기 시작했다. 레이독스와 서연도 나가서 쌍둥이들과 함께 춤을 추기 시작했고, 헤르시아와 아론도 춤을 추었다.
광장에 모인 이들이 모두 짝을 지어 춤을 추는 광경이 아름다웠다.
그리고 시카르도 내게 춤을 함께 추자고 손을 내밀었다.
내가 시카르의 손을 잡으려 하자, 키안이 내 손을 낚아채 버렸다.
나는 너무 놀랐지만, 그것은 기뻐서 놀란 것이었다.
“키안!”
“사랑해요. 어머니.”
“나도 사랑한단다. 키안.”
나는 시카르를 외면하고 키안의 손을 잡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춤 신청을 해도 루시에게 할 줄 알았는데 나에게 춤 신청을 하다니.
비록 시카르가 팔짱을 끼고 서서 우리를 감시하고 있었지만, 키안의 춤 신청은 정말 너무 큰 감동이었다.
그때 갑자기 축복을 끝낸 듯 로엔이 헐레벌떡 뛰어오더니 제르미를 덥썩 끌어안으며 요란하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못 말리는 사람들이야.
모두가 짝을 이루고 춤을 추는 아름다운 광경에서 비카와 듀리온만 가위바위보를 하며 딱밤을 때리고 있었다.
물론 눈썰미가 좋은 비카가 계속 이기며 듀리온의 이마에 종류별로 다양한 혹을 만들어 주고 있었지만 말이다.
레이독스는 루시와 춤을 추고, 서연은 루이드와 춤을 추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시카르만 혼자서 가엾게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키안. 우리 공작님과 셋이서 같이 춤추지 않을래?”
키안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알겠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어머니.”
키안과 나는 춤을 추며 시카르의 앞으로 다가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시큰둥한 표정을 짓던 시카르는 냉큼 우리의 손을 붙잡았다.
그래서 우리는 세 식구가 동그랗게 모여 춤을 추었다.
모두가 축제에 취해 있는 밤은 그렇게 더욱 여물어 가고 있었다.
제르미가 축체의 피날레를 장식했다. 그가 불러낸 커다란 드래곤의 모습을 갖춘 불꽃이 황금색 왕관을 쓰고 있는 푸른 눈의 왕을 향해 달려들다가 하늘 위로 올라가 사방으로 팡! 불꽃이 터지는 불꽃 놀이었다.
시민들은 모두 마법사들을 향해 박수를 쳤다.
아쉬운 축제가 화려한 불꽃놀이와 함께 그렇게 막을 내렸다.
축제는 또 오겠지만, 다시는 오지 않을 푸른 해를 위한 축제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
너무 즐거웠기 때문일까.
우리는 축제의 아쉬움을 달래듯 궁으로 바로 들어가지 않고 정원에 있는 흔들의자에 앉았다.
“너무 멋진 하루였어.”
시카르는 내 말에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았다.”
시카르가 저렇게 말했다면 아주 좋았다는 것과 진배가 없었다.
오늘이 내게 최고의 하루가 된 것은 사실 축제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시카의 손을 잡고 무슨 일이냐는 듯 나를 쳐다보는 그에게 말했다.
“시카르, 고마워.”
그는 역시나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뭐가?”
“내 저주를 풀어줘서. 고마워.”
“저번에도 그러더니 또 저주라고 하는군.”
“난 광장공포증이 저주라고 생각했거든. 아니, 이건 내겐 저주였어. 사람들이 많은 곳만 가면 현기증이 나고 죽을 것 같이 심장이 뛰곤 했으니까. 내가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하고 살 수밖에 없었지.”
시카르는 차분한 눈으로 내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그런 건 이미 기억에서 봤을 테니 다 알고 있겠지.
하지만 내 생각은 알 수가 없으니 그도 내가 이런 생각을 갖고 산 줄은 몰랐을 것이었다.
“있잖아. 사람들은 다 저주를 갖고 있어. 나 같은 공황장애도 있고 툭 하면 우울감이 치고 오는 사람도 있어. 난 둘 다였는데 생각해보면 너를 만나고 모두 사라진 거 같아. 그래서 난 너도 꼭 저주를 풀게 도와주고 싶어.”
“네 말대 반드시 괴물에게 저주를 받는 것만이 저주는 아니겠지. 그건 네가 사는 현대들이 겪는 저주인 것 같군.”
“맞아. 난 그렇게 생각해. 예전엔 절대 풀지 못할 것만 같은 저주라 생각했는데 네 덕분에 이제 정말 다 풀린 것 같아. 사실 오늘이 축제여서 즐거웠던 것도 있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하면서도 아무렇지 않았다는 사실이 날 더 기쁘게 했어.”
“하긴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버텨본 적이 없었지. 졸업식도 못 가고, 그 흔한 길거리 축제 한 번 참석하지 못했으니까.”
마치 내 일을 자신의 기억처럼 되짚어 보는 시카르가 싫지 않았다. 아니, 그런 날 너무 잘 알아주는 그 모습이 오히려 더 고마웠다.
“그래서 정말 고마워. 내 저주를 풀어준 건 다름 아닌 너야.”
시카르는 나를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
“앞으로 더 행복하게 해줄 테니 옆에 꼭 붙어 있어라. 사라지지 말고.”
요즘 따라 유달리 저런 말을 자주 하는 것 같은데. 내가 너무 좋아져서 괜시리 불안해진 걸까.
오늘따라 나를 바스러지게 끌어안는 것 같기도 했다.
“시카르. 내가 너무 좋아서 불안한 건 알겠는데, 걱정 마. 난 절대 사라지지 않을 테니까.”
“그래. 무슨 일이 있어도 네가 사라지지 않게 내가 더 잘할 테니 내 옆에 꼭 붙어 있어라. 꼭.”
“너무 끌어안고 있는 거 아니야? 그전에 내 뼈가 사라지겠어.”
시카르는 살짝 몸을 떼어내며 나를 쳐다보았다.
“괜찮나?”
“이젠 괜찮아.”
“유라.”
“응?”
“푸른 해가 뜨면 하기로 했던, 나와의 약속을 잊지 않았겠지?”
“무슨 약속…….”
까지만 말하고 나는 그와의 약속이 번뜩 떠올랐다.
푸른 해가 뜨면 아이를 갖겠다고 했었지.
이렇게 빨리 뜰 줄 알았다면 결코 그 약속은 하지 않았을 텐데.
그 약속이 떠오르자,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