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평화로운 일상 (1)
(140/197)
140화. 평화로운 일상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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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화. 평화로운 일상 (1)
2022.10.03.
심장이 뛰어서 도저히 이대로 앉아 있을 수가 없었던 나는 잠을 핑계로 재빨리 궁으로 들어갔다.
시카르가 뒤를 따라오며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들리지 않는 척 하품을 하며 빠른 걸음으로 나아갔다.
한 방을 쓰고 있으니 궁으로 들어온다고 해서 도망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공작저였다면 키안의 방이라도 갔을 테지만, 정말 이곳은 갈 곳이라곤 전혀 없었다.
시카르에겐 서재가 있듯이 내게는 재봉을 하는 방이 따로 있기는 했지만, 각종 옷감들과 비품으로 가득한 곳이라 그곳에서 잘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나는 꼼짝없이 시카르와 같은 방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분당 심박수가 100회 이상을 넘어가면 빈맥이라는데, 지금 내가 딱 그 상태였다. 지금 막 씻고 나온 시카르가 또 상의를 벗고 들어왔으니까.
화들짝 놀란 나는 곧장 눈을 가리긴 했지만 이미 볼 건 다 본 뒤였다.
손가락 사이로 빼꼼 눈을 뜨고 보다가, 아직 덜 젖은 머리를 털며 나를 보고 있는 시카르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곧장 옆으로 누우며 이불을 끌어안았다.
“나 졸려서 먼저 잘게. 갑자기 졸음이 쏟아지네…….”
사실 앞에서 윗옷을 벗고 설쳐대는 시카르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말짱한 정신이었다.
조금 더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시카르가 옆 침대에 앉는 소리가 들렸다.
“유라.”
갑자기 이름까지 부르는 것을 보니 오늘 정말 작정을 한 모양이다.
아니나 다를까, 갑자기 시카르가 뒤에서 나를 껴안았다.
“오늘은 약속의 날이다.”
나는 못 들은 척 입을 꾹 다물려고 했지만, 시카르가 내 목덜미에 대고 말을 하는 바람에 그가 내 뿜는 입김이 간지러워 몸을 꿈틀거리고 말았다.
“아무래도 오늘은 너무 졸려서…….”
“그렇다면 내가 재워주지.”
웬일로 순순히 재워준다고 하는 걸까. 이제 정말 착해지기로 작정을 했구나…… 는 역시나 섣부른 판단일 뿐이었다.
재워준다던 시카르의 입술이 어깨에 와 닿았다.
이, 이게 재워주는 건 아닐 텐데?
나는 어깨 아래로 내려간 잠옷을 재빨리 위로 올리며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몸을 돌리자마자 보이는 것은 시카르의 촉촉하게 젖은 입술이었다.
순간, 숨이 멎을 것만 같아서 곧장 시선을 내렸다.
“이건 되레 잠을 깨우는…….”
시카르는 내 턱을 잡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의 얼굴이 바로 코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난 당장 재워주겠다고는 안 했는데.”
심장이 방망이질을 치고 있었지만, 시카르가 허리를 꽉 끌어안고 있는 통에 도망갈 곳도 없었다.
“일단 우리 먼저 대화를…….”
“대화는 시간 낭비지.”
역시…… 말이 안 통해!
시카르는 내가 다른 생각을 할 시간도 주지 않았다. 그는 곧장 내게 입을 맞춰왔다.
저돌적이고 박력 있는 몸짓과는 달리 내 머리를 떠받고 있는 손은 묵직했고, 나를 어루만지고 있는 손은 한없이 따스하고 조심스러웠다.
진한 키스 후 입을 떼는 그는 지그시 나를 내려다보았다.
“싫으면 싫다고 말해. 네가 싫어하는 짓은 안 할게.”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평소와 달리 나를 보며 따뜻하고 애틋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시카르를 보자 더욱 심장이 쿵쾅쿵쾅거릴 뿐이었다.
시카르는 그런 나를 보며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사랑해.”
그리고 그 포근한 품속으로 나를 끌어당겨 주었다. 너무나 안온하고 따뜻한 그 품이 꿈처럼 감미롭고 달콤했다.
이런 행복을 내가 누려도 되는 걸까 싶을 만큼, 시카르는 내 이름을 수십 번을 부르며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사랑해. 유라.”
그러곤 사라지지 말라는 말도 계속 속삭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 과분한 행복이 간혹 낯설어 내가 사라질 것이 두렵다고 했다.
우리의 밤은 길었고, 아름답고 소중했다.
이 꿈결 같은 달콤한 밤을, 행복을 속삭였던 기나긴 밤을,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벅찬 감동과 사랑으로 가득했던 우리의 첫날밤을.
***
며칠 후, 우리가 궁에 온 것을 기념하는 작은 연회가 열렸다.
궁에서 하는 연회치고 작은 연회일 뿐. 저택에서 여는 연회와 다를바가 없었기에 준비할 게 상당했다.
그래서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야외에 연회장을 준비했다.
예전 같았으면 모든 걸 안드레아에게만 맡겼을 테지만, 키안이 있는 궁에 들어온 만큼 내가 직접 나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작은 식기 하나부터 식탁에 놓아둘 꽃까지 모두 내 손을 거쳤다.
나 혼자라면 쉽지 않았겠지만, 안드레아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안드레아가 없었다면 이렇게 예쁘게 꾸미지 못했을 거야.”
“모든 건 다 마님께서 준비하셨지요. 저는 조언만 한걸요. 이젠 야외 준비를 끝냈으니 손님맞이를 위해 치장할 시간입니다. 마님. 메이리에게 준비해둬라 일렀으니 들어가 보시지요. 남은 건 제가 해놓고 있겠습니다.”
“그러게. 손님들이 오는 거에 몰두한 나머지 치장하는 걸 깜빡하고 있었네.”
안드레아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행히 지금부터 준비하면 늦지 않을 겁니다. 마님. 어서 들어가시지요.”
“그래. 그래야겠어.”
“들어가시면 메이리가 모두 다 준비해놓고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알았어. 수고해.”
안드레아의 말처럼 메이리는 모든 세팅을 끝내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렸다는 듯 머리와 화장을 마치고 옷까지 입는데 3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이렇게 일취월장하다니.
메이리는 칭찬을 해줄수록 더욱더 잘하려고 하는 성격이었다.
“메이리, 놀라운데? 왕실 미용사들이 울고 가겠어.”
아니나 다를까, 감동한 듯 메이리의 눈꼬리가 내려갔다.
“마님…… 그런 과분한 칭찬을 해 주시다니. 감동이에요! 앞으로 더욱! 열심히 할게요!”
메이리는 바쁜 듯 뒤도 안 돌아보고 야외로 향했다. 일손이 바빠서가 아니라, 내게 칭찬받은 이 사실을 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하려고 가는 것이었다.
더욱 열심히 하라는 뜻으로 한 말이기도 했지만 메이리는 손이 야무졌다. 덕분에 품격 있고 우아한 자태가 묻어났다.
칭찬을 말로만 할 게 아니라 전에 생각해둔 숄을 빨리 사줘야겠는데.
머리와 화장이 마음에 들어서 기분 좋게 방을 나오다 듀리온과 마주쳤다.
듀리온도 연회에 맞게 예쁜 슈트로 갈아입은 모습이었다.
“듀리온. 그렇게 옷을 갈아입으니 아주 멋져 보이는군요.”
듀리온은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이고는 내게 이상한 말을 던졌다.
그러니까…….
“마님께서는 공작님과 같은 방을 쓰시고 나서 화색이 좋아지셨습니다.”
이런 말을 말이다.
나는 조금 낯이 뜨거워 어색하게 웃었다.
“그렇게 보이나 보군요. 제 생각엔 것보단 키안과 같은 궁에서 지낼 수 있게 돼서 요즘 혈색이 좋아진 것 같군요.”
이렇게 잘 넘어가려고 했는데. 가죽 슈트를 멋지게 차려입고 나온 비카가 넥타이가 불편한 듯 인상을 쓰며 걸어 나와 내게 치명타를 던졌다.
“그거야 매일 공작과 사랑을 나누시느라 혈색이 좋아지신 거겠지.”
그때, 잊었던 사실 하나가 떠올랐다. 바로 비카의 귀가 너무 밝다는 것.
덕분에 낯이 뜨거워 얼굴에서 점점 열이 나고 있었다.
길리언의 문제도 해결된 마당에 이제 그만 비카를 자유롭게 놓아줘도 될 텐데, 왜 아직도 맹약을 이어가고 있는 걸까.
“듀리온. 공작님은 아직도 어전에 계신가요.”
“네. 재상과 일을 마치고 온다고 하셨습니다.”
오늘도 일이 있다더니 얘기가 길어지는 모양이었다.
“마님! 손님들이 오고 있어요!”
“어. 그래! 지금 나가!”
데이지궁 입구에서 마차가 줄줄이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따라 나온 비카와 듀리온을 일렬로 가지런히 세우고 말했다.
“손님이 오니 인사할 준비들 해주세요.”
“네. 마님.”
가장 먼저 도착한 건 서연과 쌍둥이들이었다. 그리고 다음으로 헤르시아와 귀족들과 귀족가의 자제들이 줄줄이 마차에서 내렸다.
내가 손님을 더 기다리듯 입구에 계속 서 있자 눈치 빠른 비카가 내가 누굴 기다리고 있는지 안다는 듯 말했다.
“제르미와 로엔은 공작님의 분부 때문에 폐궁 재건을 조금 도와주다 올 테니 들어가시죠.”
“유폐 궁이요?”
“길리언을 유폐시킬 궁이요.”
무슨 소리지. 유폐를 궁에 한다는 얘긴가?
“잠깐만요. 비카 님. 제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모르겠는데, 길리언을 궁에 유폐하는 건 알겠는데 재건이요?”
“네. 왕궁에 있는 궁들 중에서 폐궁 하나를 길리언이 머물 수 있게 재건해주고 있다는군요.”
“그게 무슨…….”
당장 죽여도 이상할 게 없는 폐군에게 유폐될 궁을 재건해준다니. 무슨 일이지?
시카르의 성격상 아무 이유 없이 길리언에게 그런 특혜를 내려주진 않을 것이다.
나중에 그 이유도 물어봐야겠는데.
“알겠어요. 비카. 이제 그만 식사하세요.”
연회 테이블을 향해 가던 나는 저택 입구에 줄지어 있는 짐들을 보고 깜짝 놀라 안드레아에게 갔다.
“안드레아. 이게 다 뭐야?”
“오늘 오신 하객분들의 하례 선물입니다. 마님.”
단순히 하례물이라고 하기엔 선물이 너무 과할 정도로 많았다. 이것을 다 받았다간 민심이 좋지 않을 것만 같았다.
전하의 양부모인 공작 부부의 집에 밤낮없이 진귀한 하례물이 문전성시를 이룬다고 소문이 날 게 눈에 훤했다.
그렇게 소문이 나게 할 수는 없지.
“안드레아. 받은 하례물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시 꺼내도록 해.”
“마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귀족들께서 공작님과 마님의 입궁을 축하하는 하례물을 안 받겠다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그래. 받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모두 꺼내.”
안드레아는 도저히 내가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 건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긴 했지만, 그녀는 자신의 분수를 아는 사람으로 더는 묻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마님.”
이 하례물을 모두 물린다면 귀족들의 성의를 거절하는 것이기에 백성들의 민심은 잡을지 모르나 귀족들의 신임을 얻기는 힘들 것이다.
우리가 받지 않고, 귀족들의 위신도 깎지 않을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애석하게도 나는 목청이 좋지 못했다. 그래서 듀리온을 불렀다.
“네, 마님. 부르셨습니까.”
“듀리온.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들을 여기 모이신 귀족분들께 대신해주세요. 해주실 수 있죠?”
“물론이고 말고요. 여기 있는 귀족들뿐 아니라. 이 세상에 대고 떠들라고 해도 마님의 분부라면 뭐든 할 겁니다.”
듀리온은 정말 너무나 든든한 사람이었다.
“고마워요. 듀리온.”
그리고 난, 예전이라면 꿈도 못 꿨을 행동을 했다.
그러니까 저 많은 사람 앞에 섰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사람들 앞에 서본 적이 없던 내가, 백 명은 족히 되고도 남을 귀족들 앞에 섰다.
물론 떨렸고 심장도 쿵쾅쿵쾅 뛰었지만, 예전처럼 호흡이 가빠지고 죽을 것 같은 느낌은 아니었다.
시카르의 충복인 듀리온이 곁에서 든든하게 나를 지지해주고 있던 탓에 다리가 떨려도 버틸 수가 있었다.
“듀리온. 제 말을 귀족들에게 그대로 전해주세요.”
“네. 마님.”
“오늘 여기, 이 자리에. 블레이크의 입궁을 축하하러 와주신 귀빈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의 정성이 담긴 마음도 감사히 받겠습니다. 이 뜻깊은 행사를 기념하여, 제게 보내주신 하례물을 좋은 일에 쓰려고 합니다. 그래서 여기 모이신 귀족분들의 이름으로 빈민층을 돕는 데 사용할까 하는데,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내 얘기를 전해주기 위해 잔뜩 의욕에 차 있던 듀리온은 당황한 얼굴로 입을 쩍 벌렸다.
“왜 그러시지요? 듀리온?”
듀리온은 이거 정말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로 말했다.
“죄, 죄송합니다. 마님. 너, 너무 길어서 까먹어 버렸습니다.”
아, 그렇지. 너무 길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