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평화로운 일상 (2)
(141/197)
141화. 평화로운 일상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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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화. 평화로운 일상 (2)
2022.10.06.
비카는 웃겨 죽겠다는 듯 배를 잡고 깔깔거렸다.
“마님. 어쩌자고 그렇게 듀리온을 과대평가하신 거예요. 이 녀석은 돌아서면 까먹는 녀석이라고요.”
다행히 비카가 줄줄 외워서는 듀리온을 대신해서 귀족들에게 말했다.
비카의 목청이 듀리온 만큼 크진 않았지만,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은발의 여인이 드레스가 아닌 가죽 슈트를 입고 서서 설명하는 모습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충분했다.
내가 하는 말을 그대로 전달해주는 비카의 모습에서는 카리스마가 넘쳤다.
마치 제 말을 듣지 않는다면 너희 모두에게 저주가 내릴 것이다. 라고 말하는 듯 비카의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다.
“단 한 사람이라도 찬성하지 않는다면, 기부는 없던 일로 하시겠다고 합니다.”
차분하게 말하고 있긴 해도 비카의 표정은 거절하는 순간 너희는 다 죽은 목숨이다. 라고 말하듯 살벌한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하지만, 비카의 표정 때문이 아니라 그들로서도 거절할 이유가 없는 조건이었다.
어차피 공작가에도 잘 보이고, 백성들에게는 민심도 얻을 수 있는 일석이조의 기회였으니까.
“블레이크 가와 함께 좋은 일에 공헌하는데 뜻을 함께할 수 있다면 덧없는 영광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공작부인.”
“좋은 일에 한마음 한뜻으로 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남은 시간 동안 더욱 즐겁고 편안한 연회를 즐기다 가시길 바랍니다.”
비카가 말을 하는 동안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여든 탓에 마지막 이 멘트는 비카를 시키지 않고 내가 직접 할 수 있었다.
돌아가는 상황을 눈으로 본 안드레아는 내가 고개만 까딱거려도 이내 알아듣고 짐을 빼기 시작했다.
손발이 잘 맞는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겠지.
하인들이 짐을 옮기는 동안 일을 끝낸 시카르가 키안과 레이독스와 함께 도착했다.
푸른 해가 뜬 까닭에 키안을 바라보는 귀족들의 눈빛은 예전과는 매우 달랐다.
예전에는 양부의 권력을 등지고 왕이 된 왕족이었다면, 지금은 하늘이 내린 왕이었다.
귀족들은 거역할 수 없는 경외감이 가득한 눈빛으로 키안을 바라보았다.
그 사이에 하례물을 기증하기로 한 일을 보고 받았는지 시카르는 오자마자 그 일에 대해서 칭찬 일색을 늘어놓았다.
“부인을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존경까지 할 일은 아니지만, 그렇게 말하니 더 부끄러웠다. 그래서 나는 시카르의 귓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
“그만해. 창피하잖아.”
“왜? 더 자랑해야지. 하례물 중에는 핑크 다이아도 있었다는데, 그걸 거절하다니. 대단해.”
핑크 다이아 같은 걸 하례물로 바치는 정신 나간 인간이 있단 말인가?!
“피, 핑크 다이아?”
“알도 꽤 컸다고 하던데.”
“누, 누가 그런 걸 보낸 거야?”
“자기가 찍힌 걸 아는 모양인지 하멜 백작이 잘 보이려고 보낸 것 같더군.”
그렇게 정신 나간 인간이 있는 줄 알았다면, 하례물을 좀 추렴해봤을 텐데.
“그, 그렇구나. 괜찮아. 어차피 관심 없어.”
“그러니 칭찬 받을 만하지. 오늘은 하루 종일 칭찬받아도 돼. 그럴 자격이 있어.”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미소를 지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 비싼 가격을 떠나서도 그렇게 희소성이 강하고 영롱하고 아름다운 핑크 다이아를 거부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내 돈으로 사기에는 너무 큰 액수라 감히 엄두를 낼 수는 없지만, 누가 준다면 당연히 사양 않고 넙죽 받고 싶어지는 것이 바로 핑크 다이아인데.
괜찮은 척하려고 해도 괜찮을 수가 없는데?
아무래도 한동안은 속이 꽤나 쓰릴 것 같았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시카르의 칭찬보다도 나를 자랑스러워하는 키안 때문이었다.
“어머니. 정말 힘든 결정이었을 텐데 존경해요. 어머니.”
자식에게 존경받는 부모가 된다는 것만큼 가슴이 벅찬 일이 세상에 있을까.
그래. 핑크 다이아가 아……아깝긴 하지만, 이렇게 나를 감동하게 만드는 키안이 있으니 이걸로 된 거야.
그런데 아까부터 키안이 누군가를 찾는 듯 두리번거리는 것이 보였다.
설마…….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키안은 내가 예상한 대로 레이독스를 향해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
“스승님. 쌍둥이들은 오늘 연회에 참석하지 않았나 봐요.”
키안의 질문에 대한 답을 한 것은 듀리온이었다.
“아, 오셨습니다. 전하. 쌍둥이들은 다른 귀족 자제분들과 함께 모두 저택 안 2층에 있습니다. 올라가시면 있을 겁니다.”
“그렇군요. 크흠……. 이곳은 모두 성인분들이 계시니 그럼 저는 이만 안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키안은 올라가기 전에 내게 한 번 더 인사했다.
“다녀올게요. 어머니.”
“그렇게 하세요. 전하.”
나는 웃으며 말했지만, 마음 한곳이 조금 아쉬웠다.
시카르는 키안의 뒷모습을 보며 기특하다는 듯 미소지었다.
“루시가 꽤 보고 싶었던 모양이군.”
그래. 넌 웃으면서 볼 수 있겠지. 하지만, 나는 키안이 정원에 심어준 장미꽃들을 보며 시무룩해졌다.
이제 루시의 남자가 되어 가는구나.
눈치가 빠른 시카르는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나를 감싸 안았다.
“너무 아쉬워하지 마라. 난 평생 네 남자로 있을 테니까.”
요즘 왜 이렇게 설레는 말을 자주 하는 건지.
시카르의 달콤한 말에 나는 금방 치유된 듯 마음이 녹아내렸다.
“약속한 거야?”
“약속 따위는 일반인들이 하는 것이고, 나는 맹세를 하지.”
내가 알기론 이곳에서 기사가 어떤 맹세를 한다고 하면 그것은 목숨을 거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저주를 받은 기사는 맹세를 하지 못한다. 이미 저주에 목숨이 저당 잡힌 상태라 목숨을 걸 수가 없으니까.
그러니까, 맹세라는 것은 곧 목숨을 담보로 하는 것이었다.
“근데, 너 저주받아서 맹세를 못 하잖아.”
내가 너무 솔직했나.
시카르는 말문이 막힌 듯 입을 꽉 닫더니, 헛기침을 한 번 하며 말했다.
“그……래서 저주가 풀리는 대로 부인께 맹세를 할 작정이었지.”
그래도 뭐, 맹세를 하려는 노력은 가상하니까.
나는 매우 믿음직스럽다는 듯 미소지었다.
“빨리 그날이 오면 좋겠어.”
그건 정말 사실이었다. 간혹 보이는 시카르의 고통은 보통 사람이라면 결코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고통이 완전히 끝나기를 바라고 있었으니까.
레이독스는 말씀 중에 실례라는 듯 내게 묵례를 하고는 시카르에게 귓속말로 뭐라고 속삭였고 시카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길래 또 저러지.
“부인. 사람들과 얘기 좀 나누고 올 테니 다른 귀족 부인들과 함께 연회를 즐기고 있어.”
시카르는 가면서 내 손등에 입을 맞추고 나갔다.
얼마 전 하인들이 보는 데서 계속 입을 맞추길래 뭐라고 했더니 요즘은 이렇게 손등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가 손등에 입을 맞출 때마다 설레었다.
서연과 헤르시아에게 가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등을 돌리자 눈앞에 두 사람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두 사람 다, 자신의 손등을 붙잡으며 부럽다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특히나 헤르시아는 너무나 부럽다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너무 로맨틱해요.”
서연도 이에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요.”
헤르시아는 이해를 할 수 있었지만, 서연의 반응은 조금 의외였다.
“후작님께서도 다정하시잖아요.”
“그렇긴 한데, 후작님은 좀…… 박력이 있다거나 과감한 스킨쉽이 있다거나, 그런 건 없으시거든요.”
서연은 자신이 말해놓고 아차 싶은지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어머. 제가 지금 후작님을 흉본 건가요?”
헤르시아는 뭘 그런 거 가지고 그러냐는 듯 손사래를 쳤다.
“아론은 시도 때도 없이 뽀뽀하고 스킨쉽을 정말 잘하긴 하는데, 섬세한 맛이라곤 전혀 없어요. 눈치도 없고요.”
서연은 놀란 듯 손으로 입을 가렸다.
“어머. 헤르시아 님. 그건 정말 흉보는 것 같아요.”
“흉보는 거 맞아요. 아직까지 저한테 프러포즈도 안 했으니까 흉 좀 봐도 돼요.”
헤르시아가 분명 바가지를 박박 긁었을 텐데, 아직도 프러포즈를 안 하고 있다니, 아론도 참 독하구나.
흉볼만하네, 해.
그래도 여기는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서 우리를 볼 때마다 인사를 하는 사람들 때문에 제대로 대화를 나눌 수가 없었다.
“우리 이러지 말고 저쪽에 가서 앉아서 얘기할까요?”
“좋아요.”
우리는 1층 테라스에 앉아 식사를 하며 담소를 나누었다. 헤르시아는 답답한지 차를 마시다 말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다른 분들은 모두 무슨 프러포즈를 받으셨어요?”
서연은 생각만 해도 부끄럽다는 듯 수줍게 웃었고 나는 생각만 해도 열 받는다는 듯 인상을 구겼다.
목에 칼을 대고 결혼하자고 하는 것도 프러포즈라고 한다면 프러포즈라고 할 수는 있겠지.
나는 괜찮다는 듯 가식적인 웃음을 지었다.
“저는 좀 과격한 프러포즈였어요.”
이미 시카르가 로맨틱한 남자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는 헤르시아는 상상이 그려진다는 듯 부러운 미소를 지었다.
“공작부인께서 겸손하셔서 과격하다고 표현하시는 거지만, 엄청 박력 있는 프러포즈였겠죠?”
박력이야 있긴 했지. 나를 죽일 뻔했으니까.
나는 그저 웃으며 차를 한 잔 들이켰다.
헤르시아의 다음 타겟은 서연이었다.
“서연 님은 무슨 프러포즈를 받으셨어요?”
서연은 쑥스럽다는 듯 얼굴을 긁적이고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 저는…….”
그건 나도 정말 궁금했다. 헤르시아와 나는 이보다 더 집중할 수 없다는 얼굴로 서연을 바라보았다.
서연은 자기 입으로 이런 말 하기 매우 쑥스럽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아시다시피 후작님께서는 박력은 없으시지만 다정하신 면은 있으셔서…… 프러포즈 때 백 송이의 장미꽃과 블루 다이아 반지를 함께 주셨어요.”
그러고 보니 서연의 손가락에 파랗게 반짝반짝이는 저게 블루 다이아 반지였던 모양이다.
내 손에도 5캐럿 다이아가 박힌 결혼반지가 끼워져 있긴 했었다.
헤르시아는 서연의 손과 내 손을 보고는 제 손을 가렸다.
그녀의 손에도 푸른 사파이어 반지가 있었지만 프러포즈 반지가 아니라서 가린 것 같았다.
“아론은 몸만 좋았지. 그것 말고는 정말 꽝이에요! 눈치도 없고 다정하지도 않고 박력도 없고!”
뭐라고 달래줘야 하나. 서연과 내가 눈치를 보는 동안 로엔이 나타났다.
“다들 여기 계셨군요!”
로엔을 본 나와 서연은 동시에 구조자라도 본 듯 두 눈을 반짝였다.
이제 로엔이 왔으니 화제를 전환할 수가 있어!
하지만, 삶이란 언제나 예측할 수가 없는 것이라고 했던가.
로엔은 우리를 향해 보란 듯 손을 내밀며 기분 좋은 듯 웃었다.
“제르미에게 프러포즈 받았어요. 뭐, 반지는 그냥 루비 반지인데 그래도 프러포즈가 꽤 볼만했어요. 제르미가 마법사잖아요. 그래서 엄청 휘황찬란한 불꽃을 터트리며 프러포즈했거든요. 반지가 작고 시시해서 프러포즈를 받지 말까 생각하고 있는데, 서연 님이 말한 자신의 운명의 상대가 나 같다나 뭐라나. 그래서 받아 주기로 했죠. 그리고…….”
로엔은 말하다가 뭔가 이상하다는 듯 나와 서연을 쳐다보았다.
“두 분, 왜 자꾸 검지를 입술 위에 올리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