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평화로운 일상 (3)
(142/197)
142화. 평화로운 일상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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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화. 평화로운 일상 (3)
2022.10.10.
로엔에게 살짝, 아직 헤르시아가 아론에게서 프러포즈를 못 받아서 그런다고 얘기하자 로엔은 그저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음…… 그럼 노코멘트 하죠.”
미안한 기색도 없었지만 기분 나빠하는 기색도 없어서 다행이었다. 프러포즈 받은 일을 자랑하고 싶어하는 로엔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가 됐으니까.
이제 뭐라고 말을 돌리나 싶던 차에 메이리가 다가왔다.
“마님. 마히딜 부티크에서 헤르시아 님께서 신청한 카탈로그와 함께 옷 마차가 도착했다고 합니다.”
응? 이게 무슨 소리지?
헤르시아는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 마차 덕분인지 그녀의 안색이 밝게 펴진 것 같았다.
“아. 제가 부른 거예요. 전에 카탈로그를 들고 온다고 했던 일 기억하세요?”
“물론이죠. 그런데 옷 마차는…….”
“제가 마히딜 부티크에 가서 공작부인께서 볼 카탈로그가 필요하다고 했더니 옷 마차를 보낸다고 했거든요. 보고 직접 고르시라고 했어요.”
로엔은 오호라 하듯 보며 손뼉을 쳤다.
“그렇다면 그것은, 이동식 부티크겠군요?”
서연은 로엔의 말에 매우 크게 호응하며 박수를 쳤다.
“로엔 님 말씀이 맞겠는 걸요?”
다들 신기해하는 눈치였지만, 나는 조금 고민이 되었다. 좀 전에 하례 물품도 모두 기증을 하겠다고 했는데 연회장에서 이동식 부티크 쇼핑을 해도 되는 건지 걱정되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헤르시아님의 마음은 정말 감사해요. 그런데, 전 아까 하례물도 모두 기증을 하겠다고 했는데 이렇게 이동식 부티크로 쇼핑을 하는 게 괜찮은 건지. 판단이 잘 서지 않는 군요.”
대답을 대신한 건 로엔이었다.
“으음. 이건 과한 건 아니에요. 이 옷을 모두 산다는 게 아니라 구경만 하는 거잖아요. 그리고 하례물과는 다른 거예요. 하례물은 뇌물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이건 왕실의 권위를 돋보이는 거니까요. 그러니 눈치 보지 말고 마음껏 구경하세요. 공작부인.”
헤르시아는 로엔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박수를 치곤 나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하겠냐고 묻는 얼굴이었다.
이렇게 숟가락으로 떠먹여 준다면 먹어야겠지. 나는 옳거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옷 마차가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마차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던 사람들은 마차에서 신상품이 주렁주렁 달린 행거와 마네킹이 속속들이 나오자 신기한 듯 구경을 하다가 내가 있는 곳으로 물건이 도착하자 더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관심이 없어서라기보단, 이쪽을 계속 힐끔거리며 볼 수가 없기 때문에 관심을 아예 꺼버린 것이다.
행거에는 다양한 곳들이 걸려 있었고 직원들은 차분히 서서 우리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었다.
헤르시아가 턱짓을 하자 직원들은 우리에게 카탈로그를 나누어주었다. 다양한 옷들과 설명이 함께 있는 카탈로그였다.
“오늘 옷은 제가 살게요. 오신 김에 서연 님도 고르세요.”
서연은 감동한 듯 미소지으며 카탈로그를 펼쳤고, 헤르시아도 입맛을 다시며 카탈로그를 펼쳤다.
“감사해요. 공작부인.”
“저도 감사해요.”
다만, 로엔은 애석한 얼굴로 카탈로그를 덮었다.
“애석하게도 제의는 없군요.”
제의는 사제복을 말하는 것이었는데 부티크에서 특별 주문이 아니고는 만들 일이 없었다.
“그럼 로엔 님 결혼식 때 입을 옷만 봐두시는 게 어때요?”
로엔은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반가워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공작부인의 마음은 고맙지만, 제가 드레스를 입을 일은 없을 것 같아요.”
“네?”
“저는 신의 자식이잖아요. 그래서 결혼식은 신전에서 기도를 드리며 조촐하게 올릴 예정이라서요.”
제르미에게 겨우 루비 반지를 받았다고 말을 했지만 역시 그녀는 신의 자식이었던 모양이다. 신을 얘기할 때마다 그녀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도 평화로워 보였다.
“로엔과 잘 어울리는 결혼식이 될 거 같아요. 그런데 레페르에는 언제 가시는 거예요?”
“오늘 이 연회를 끝으로 갈 거예요.”
“그렇게나 빨리요? 너무 아쉬워요.”
아쉽기는 로엔도 매한가지였는지 그녀도 애석한 표정으로 미소지었다.
“저도 너무 아쉽지만 이제 신의 곁에 있어야겠죠.”
나는 로엔의 선택을 존중하며 우리 집 사용인들에게 선물해줄 숄을 둘러 보았다.
이렇게 옷 마차를 불러서 사용인들의 옷을 맞추어 줬다고 한다면, 사용인들의 품격도 올라가고 일석이조겠군.
“로엔 님 마음에 드는 게 없는 거예요?”
눈치를 보며 겨우 옷 한 벌을 고른 헤르시아는 로엔이 옷을 고르지 않자 난처한 듯 쳐다보았다.
지금껏 백작가의 영애로 사랑받지 못하고 자랐다고는 해도, 가문의 위신 때문에 드레스만큼은 원 없이 입고 살아온 헤르시아였다. 그런 그녀가 드레스 한 벌로는 만족하기 힘들 것이다.
그런데 서연은 아직도 옷 한 번을 고르지 못하고 있고, 로엔은 옷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있으니 헤르시아 역시도 한 벌 이상 고를 수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헤르시아에게는 내가 옷을 몇 벌 더 골라주었다. 눈치로 봐서 그녀가 마음에 들어 하는 옷으로 말이다.
“괜찮아요. 공작부인. 전 정말 이거면 충분해요.”
비록 그녀가 이런 말을 해도 아쉬움이 뚝뚝 묻어난다는 눈으로 보고 있는 옷은 귀신같이 집어서 골라주었다.
“이렇게 선물을 많이 받아서 어떡해요.”
“어떡하긴요. 예쁘게 잘 입으면 되죠.”
헤르시아는 혼자만 많이 골랐다고 생각해서 조금 민망했는지 애꿎은 로엔의 옷을 고르고 있었다.
“로엔 님, 비록 결혼식 때는 안 입어도 옷은 몇 벌 들고 계신 게 어때요?”
“음……. 왜죠?”
“로엔 님의 미모가 아까우니 몇 벌 들고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하긴 로엔이 이렇게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있는 걸 본 적이 없구나.
로엔은 생각하는 듯 제 턱을 만지작거렸다.
“흠…… 이런 예쁜 옷은 남자를 꼬실 때나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남자를 꼬셔서 남편으로 만들기 직전인데 제가 이 옷을 입을 일이 있을지 모르겠군요.”
“그럼요. 나중에 돈이 될 수도 있잖아요. 특히 마히딜 디자이너가 만든 옷은 나중에 몇 배로 되팔 수도 있다고요. 특히 공작부인께 선물 받은 옷이라고 한다면 더 받을 수도 있을걸요.”
그 말에 로엔의 귀가 고양이처럼 팔딱 솟아올랐다. 로엔은 곧장 헤르시아와 함께 카탈로그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사람들 대놓고 선물하는 나를 앞에 두고 선물 받은 옷으로 제테크할 생각을 하는 거지?
괘씸해야 하겠지만 이 사람들이 너무 귀여웠다. 내가 애정하는 사람들이니 잘 먹고 잘살면 나야 좋지.
“로엔 님. 이 옷 너무 잘 어울리겠는데요?”
헤르시아의 칭찬에 로엔은 결코 겸손으로 포장하는 법이 없었다.
“어머. 정말이네요. 이 옷을 입는다면 미모로 대신관 자리에 앉을 수도 있는데요?”
이런 농담을 하며 말이다.
이렇게 밝기만한 로엔이 가는 걸 생각하니 또다시 아쉬움이 솟아올랐다.
***
“전하의 강력한 약혼자 후보라는데?”
“검술을 엄청 잘한대. 어른들과 대적해도 안 진다는 말도 있어.”
“하지만 왕후 후보가 되기에는 교양이 너무 부족한 거 아니야?”
“왕비 후보가 된 건 유카나다르 후작님이 전하의 스승이기 때문이래.”
“성질도 더럽대.”
이 모두가 루시를 두고 하는 말들이었다.
그리고 이 중 마지막 말을 한 사람은 다름 아닌 루이드였다.
테라스에 모여 앉아 속삭이고 있던 귀족의 어린 자제들은 루이드를 보고 귀신이라도 본 듯 깜짝 놀랐다. 들고 있던 음료 잔을 쏟아버린 아이도 있었다.
“너, 너, 너 유카나다르의 쌍둥이 아니야? 루시의 쌍둥이 오빠!”
“그래. 내가 그 악명높은 루시의 오빠다.”
“여, 여기서 뭐 해?!”
“너희들은 테라스에 처박혀서 왜 남의 흉을 보냐?”
귀족 아이들은 억울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우, 우리가 언제?”
“맞아. 그냥 소문으로 들은 얘기만 한 것뿐인데…….”
루이드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앞으로 걸어갔다.
루시에게 가위바위보를 지는 바람에 야외에 키안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만 하고 들어가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테라스 문을 열기도 전에 루시의 얘기를 나누는 게 귓가에 들려왔다.
이 세상에 누군가 루시를 욕한다면,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게 루이드였다. 그래서 루이드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말했다.
“그 얘기를 누가 했는데?”
아이들이 그 얘기를 들을 곳은 집밖에 없었다. 부모님들이 하는 얘기를 엿듣고 나누는 대화들이었다.
하지만 그걸 루이드에게 말할 수는 없었기에 아이들은 변명거리를 찾지 못하고 서로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유카나다르의 쌍둥이들은 어릴 때부터 사교계에서 말썽쟁이로 유명했기 때문에 엮여서 좋을 게 없었다.
거기다 지금은 재상의 자식들이 아닌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판단한 아이들은 서로의 시선을 주고받은 후 동시에 일어서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도망가자!”
***
한편, 밖에서 소식을 기다리던 루시는 지루함에 자꾸만 하품을 해대고 있었다.
‘대체 언제 오는 거야.’
이전에 별난 이미지를 조금 복구하고자, 루시는 2층 홀에 앉아 독서하는 척 차분히 앉아 책을 손에 쥐고 있었다.
하지만, 좀이 쑤셔서 1분도 못 버티고 책을 덮을 뻔했다가 졸았다가를 반복 중이었다.
제 손에는 책 같은 건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평소 읽지 않는 책을 억지로 읽는 척하는 루시는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다.
책을 손에 들고 있긴 했지만, 마치 온 신경을 동물적 감각에 곤두세우고 있는 듯 루시는 작은 소리 하나에도 귀를 쫑긋거렸다.
그때, 루시의 청각 레이더망으로 들어온 말이 루이드의 외침이었다.
“거기 서!”
고개를 홱 돌려보니 웬 남자애들 셋이 도망을 가고 있고, 루이드가 그 뒤를 쫓아가는 중이었다.
“혼자서 셋을 못 잡아서 저렇게 쫓아가다니. 답답하긴.”
루시는, 자신이라면 저 셋을 어떻게 잡았을지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그려봤다. 일단 두 놈은 신발로 뒤통수를 맞추고 한 놈은 뛰어가서 붙잡는다.
‘간단하네.’
루시는 방금 머릿속으로 그린 것을 실행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망가는 두 아이는 신발로 명중을 시켰다. 쫓던 루이드는 잠시 멈춰서 루시를 보며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쩍 벌렸지만, 이내 남은 한 아이를 쫓기 시작했다.
‘이제 남은 아이는 한 명이니 금방 잡겠네.’
하지만 왠지 지켜만 보고 있기에는 몸이 근질거렸다. 쫓아가려니 너무 멀리 있고 저는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래서 루시는 이번엔 책을 던져서 남은 아이를 명중 시키기로 했다.
마침 아이가 계단으로 내려가기 직전이었기에 서둘러 책을 던져야 붙잡을 수가 있었다.
생각을 했으면 곧장 실행에 옮기는 것. 그것이 루시였다.
루시는 망설임 없이 곧장 책을 들어 던졌다. 빠른 판단과 빠른 행동력으로 인해, 루시가 날린 책은 명중했다.
다만, 상대가 루시가 맞추려던 상대가 아니었을 뿐.
책에 이마빡을 맞은 아이는, 계단을 따라 걸어 올라오던 키안이었다.